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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우 Mar 19. 2023

공중 급유기 4

KC-135 Stratotanker 이야기1

Boeing KC-135 Stratotanker


KB-29를 시작으로 공중 급유기는 KB-50과 KC-97를 거쳐 발전해왔으나 이들은 모두 1940년대 설계된 B-29 폭격기에 그 뿌리를 둔 왕복 엔진 기반의 공중 급유기였다. 그러다보니 나날히 빨라져 가는 제트 항공기와 함께 공중 급유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급유를 받는 기체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줄여야만 했으나 반대로 공중 급유기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올려야 했다. 그리고 제트 엔진과 왕복 엔진은 서로 운용하는 고도가 달랐다. 블레이드를 돌려 공기를 압축할 수 있는 제트 엔진은 보다 높은 고도에서 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왕복 엔진은 그렇지 못해 보다 낮은 고도에서 비행했다. 그러다보니 제트 군용기들과 같은 고도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중 급유기도 제트 엔진을 탑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1954년, 미 공군 전략공군사령부는 제트 폭격기를 위한 공중 급유기 개발 사업에 대한 입찰을 공고하게 된다. 이에 보잉(Boeing), 더글러스(Douglas), 컨베이어(Convair), 록히드(Lockheed), 페어차일드(Fairchild) 그리고 마틴(Martin)이 제안을 받았으나 이들 중에서 관심을 보인 곳은 록히드, 더글러스 그리고 보잉 뿐이었다. 록히드는 설계상으로만 존재하는 L-193 설계안을 제안했고, 보잉은 제트 여객기를 위한 기술 실증기 성격의 B367-80을, 마지막으로 더글러스는 훗날 자신들의 첫 제트 여객기 DC-8이 되는 설계안을 제안했다.


이후 미 공군은 세 회사에서 제안한 설계안 중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가진 보잉의 367-80 시제기에 관심을 보였고 이를 기반으로 공중 급유기를 개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을 뿐 미 공군은 보잉보다 더 큰 록히드의 L-193 설계안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1954년 8월, 미 공군은 367-80 설계안을 기반으로 제작된 KC-135 29대를 주문했고, 1955년 2월에는 록히드의 L-193을 기반으로 설계된 CL-291를 최종 승자로 선정했다. 문제는 CL-291가 선정되었을 무렵 미 공군은 이미 보잉으로부터 200여대의 KC-135를 주문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런 기이한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더글러스는 군 내부에서 승자를 정해두고 사업을 진행한 것이 아니냐며 반발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글러스는 사업에서 이탈하여 공중 급유기가 아닌 민항기 개발로 노선을 변경했고 그렇게 탄생한 여객기가 바로 더글러스의 첫 제트 여객기 DC-8이었다.


B367-80(뒤) KC-135A(앞) / Flight Global

다시 보잉과 록히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오늘날 미 공군이 운용하고 있는 공중 급유기는 록히드가 아닌 보잉의 KC-135이다. 1950년대 중반에 미 공군이 록히드의 설계안을 선정했는데 보잉의 KC-135가 최종 승자가 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추측해보자면 보잉의 KC-135는 록히드 설계안에 비해 연료급유량이 적은 것은 사실이나 3개의 후보안 중에서 가장 빠르게 실전 배치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는 상대방의 핵실험에는 더 큰 핵실험으로 대응하는 광적인 핵실험이 이뤄지던 시기였는데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1] 따라서 전략 폭격기만이 유일한 핵투발 수단이었는데 장거리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공중 급유기가 필수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미 공군은 부족한 연료급유량은 더 많은 수량을 보유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판단해 KC-135를 우선 도입하기로 결정한 듯 하다. 반면, 록히드의 설계안은 오늘날 광동체 여객기 기반 공중 급유기인 KC-10에 준하는 연료급유량을 가졌음에도 어디까지나 설계상으로만 존재하던 하나의 안이었으며 개발 지연에 시달리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미 공군 입장에서는 굳이 개발이 지연되고 있는 록히드의 설계안을 기다릴 수 없었고, 개발이 완료된 시점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공중 급유기를 운용하는 것에서 오는 운용 상의 비효율성 역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KC-135는 연료급유량이 록히드의 설계안에 비해 부족했을 뿐 다른 문제는 없었다. 우선, 보잉은 B-29부터 시작하여 B-47까지 성공적으로 대형 항공기등을 제작한 기업이었다. 그리고 미 공군을 위한 폭격기 전용 공중 급유 시스템인 플라잉 붐을 포함하여 KB-29부터 KC-97까지 공중 급유기를 개발하며 미 공군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이런 배경 속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KC-135 공중 급유기는 B-29에서 시작해 KC-97까지 이어져 온 왕복 엔진 기반의 공중 급유기의 끝을 알리며 제트 엔진을 기반으로 하는 공중 급유기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전략 공군의 아버지이자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커티스 르메이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빠르게 배치되었다. 그는 공중 급유기 자체보다는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전략 폭격기의 효과적인 지원을 위한 차원에서 공중 급유기 확보에 힘썼다. 덕분에 1957년 7월에 출고되어 8월에 초도비행을 실시한 KC-135A는 1965년에 마지막 기체가 인도되기까지 순수하게 공중 급유기로만 700여대가 생산되었으며 그밖에도 기타 특수임무 수행을 위해 100여대가 생산되었다. 그리고 6-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양한 파생형들과 함께 운용되는 중이다. 미 공군에서도 이를 잘 알기에 대체 기종으로 KC-46A Pegasus를 개발하였으나 입찰에서부터 개발 및 도입까지 계속되는 잡음으로 KC-135의 퇴역은 여전히 요원하다.




[1] 다행히 중국이나 프랑스 등에서도 핵실험을 수행하면서 핵확산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되었고, 1962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한 뒤 미국과 소련은 다양한 조약을 맺으며 광적인 핵개발 레이스를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희생자들과 피해로부터 방사능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환경오염과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려해 핵실험을 단순한 선전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폭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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