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식남이 결혼해서 아빠가 되면 생기는 일

혼밥 레벨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by 곽재혁
레벨 1 : 편의점
레벨 2 : 푸드코트, 학생 식당, 구내식당
레벨 3 : 패스트푸드점
레벨 4 : 분식집
레벨 5 : 중국집, 냉면집 등 일반음식점
레벨 6 : 맛집
레벨 7 : 패밀리 레스토랑/피자·파스타 전문점
레벨 8 : 고깃집, 횟집
레벨 9 : 술집

꽤 오래전부터, 마치 도장깨기처럼 인터넷을 떠돌고 있는 이것은 ‘혼자 밥 먹기에 대한 난이도 분류표’, 이른바 혼밥 레벨 테스트다.


마흔 넘어 결혼하기 전까지 남의 시선 따윈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나는, 최상위 티어(tier)인 레벨 9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만족시키고도 남았다.

연인 또는 가족 단위 손님들로 북적대는 아웃백에 혼자 앉아 스테이크를 써는 일이 내겐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시끌시끌한 불금의 라운지 바에 아무렇지 않게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인 적도 있었으니까.

상기 레벨 분류표에선 빠져있지만 개인적으로 혼밥의 최상위 레벨이라고 생각하는 '풀코스 정찬'도, 혼자 대만 여행 갔을 때 두 번이나 해본 경험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혼밥의 만렙을 넘어 고인물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고 할까?




혼밥 얘길 하니, 문득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에피소드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혼밥 얘기를 꺼낸 게 맞다.)


2009년이었으니,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잠깐 같이 작업한 적이 있었던 '생로병사의 비밀' 작가분을 통해 KBS2TV 30분 다큐 '결혼 안 하는 남자'라는 프로그램에 섭외되어 출연한 바 있다.

자신만의 생활을 멋지게 즐길 줄 아는 전문직 남성의 하루를 찍고 싶다고 해서 섭외에 응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프로그램은 '초식남'에 관한 다큐였다.

3일에 걸쳐 나름 공들여 찍었건만, 정작 방송이 나간 뒤에는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톨이처럼 보였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시작은 꽤 그럴싸했다.

당시 내 단골 헤어샵이었던 라뷰티코어 미용실에 가서

두피 마사지 후에 헤어컷 하는 장면도 찍었고,

닐 바렛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쇼핑하는 장면도 찍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 장면까진 그리 나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엔 핫 플레이스였던) ‘느리게 걷기'에서 혼자 파스타 먹는 장면을 본 고향 친구로부터 ‘니 미친놈 아니가?’라는 과격한 피드백을 듣기에 이른다.

사실 그때 나는 내 레지던트 여동기들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도 촬영했었고, 당시에 근무하던 병원 직원들의 인터뷰도 따갔었다.

그런데 그런 장면은 모두 편집된 채 혼자 미용실 가고 쇼핑하고 밥 먹는 장면들만 보여줬으니, ‘화려한 싱글’이라기보다는 함께 어울릴 사람이 없는 ‘외톨이’로 비쳤던 것이다. 그러니 가족과 친지들이 못마땅하게 여길 만도 했다.

지금에 와서 확인해보니, 레스토랑에서 파스타 먹기는 ‘혼밥 레벨 테스트’ 기준으로는 '레벨 7'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청담동에서 저 장면을 촬영한 후에 바로 부천까지 출근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스테이크보단 덜 부담스러운 파스타를 시킨 것이었다. 한데 '오늘의 파스타'가 하필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크림 파스타'였던 관계로, 잘 안 넘어가는 것 억지로 삼키느라 애먹은 기억이 난다. 아직도 그 불편했던 촬영 분위기와 느글느글한 스파게티 맛을 떠올리면, 생목이 올라오는 것만 같다.

제작팀에서 섭외한 여자분과 소개팅하는 장면도 촬영했는데

알고 보니 이런 화면을 통해

다른 곳에서 여성분들이 소개팅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더라는….

나도 나지만, 소개팅녀로 섭외되었던 그 여자분은 저렇게 구경당한 기분이 어떠셨을지…

내가 마치 오디오 마니아라도 되는 척하며 찍었던 저 장면은 협찬 장소였던 보스 매장에서 촬영된 것이다.

태생적 관종인 나로선, 카메라가 나만 따라다닌 며칠이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저 당시에 나는 여차한 사정으로 인해 큰누나 집에 들어가서 살 때였는데, 제작팀에서 집에 혼자 있는 장면이 꼭 필요하다고 해서 별수 없이 친한 동생 D모군의 집을 빌려 촬영해야 했다.

방송 출연을 몇 차례 해보면서 느낀 게 있다면, 인터뷰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방송은 결국 대본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무리 말을 길게 해도, 편집 땐 필요한 말만 갖다 쓰더라는 말이다.

저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로, 애초부터 제작진이 필요로 하는 내용과 멘트는 따로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며칠에 걸친 촬영 기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의 목적은 내 생각을 듣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의도하는 바를 내 입을 통해 말하게 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이 다큐가 방송되었던 2009년 7월에는 (일본에선 아베 히로시 씨가 주연해서 큰 인기를 모았었고, 국내판에서는 지진희 씨가 까칠한 독신남 역할을 맡았던 드라마) '결혼 못 하는 남자'가 한창 큰 이슈를 모으며 방송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다큐에 출연한 초식남들은, 전반적으로 '쿠와노 신스케(조재희)' 비슷한 인물로 그려졌던 것 같다.

이 방송때문에 혼사길 막히겠다는 몇몇 친척 어른들의 우려와는 달리, 나는 이 방송이 있은 후로부터 6년 후에 평생의 배필을 만나 무사히 결혼을 했고 토끼 같은 딸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혼자만의 삶에 깊이 몰입해 사는 초식남이었던 내가, 지금은 사뭇 달려져 있음을 느낀다.


솔직히 말해, 가정의 테두리 안에 살면서 가끔씩은 홀로 남겨지는 시간을 갈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혼자만의 시간이 내게 주어져도, 예전만큼 재미가 없다.

거침없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내가 어느새 가족과 함께 하는 즐거움에 길들여졌나 보다.


혼자서도 남 부럽지 않게 잘 먹고 다니던 나였는데, 이젠 혼자 있으면 대충 떼우고 만다.

요즘엔 레벨 7에 해당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은커녕, 레벨 4인 분식집도 혼자선 가기 싫어진 게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혼밥 레벨이 하락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혼자만의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함께할 누군가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보다 더 큰 의미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나에겐 좀처럼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았던 지상의 행복을 알게 해 주고, 혼자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우리집 두 여자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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