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이야기

세인트 레지스(St. Regis)와 불레이(Bouley)의 추억

by 곽재혁

갓 결혼한 새신랑 ·새신부로부터 듣는 첫날밤 이야기는 교생 선생님이 들려주는 첫사랑 스토리만큼이나 흥미진진하고 또 설렌다.


하지만 나는 첫날밤이라는 세 음절이 유발하는 재미와 케미 따위는 잊고 지낸 지 오래다. 내 친구 녀석들 대부분은 이미 학부형이 되었고, 또래 중에 가장 늦게 장가간 나마저 결혼 4주년을 바라보고 있는 입장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종류의 설렘에 영 무뎌진 건 절대 아니다.

모든 순간이 좋았던 첫날밤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내 입가엔 므흣한 미소가 번지곤 한단 말이다. 단지 털어놓을 기회가 없어서, 그저 마음속 추억으로 묻어두었을 뿐….




현실에 묶인 내 몸과는 달리 시·공간 이동이 자유로운 내 영혼은, 어느새 4년 전 맨해튼의 여름밤 속으로 회귀해 있다.

시공을 거슬러 가던 내 영혼의 궤적이 멈춘 곳은 바로, 뉴욕 시각으로 2015년 8월 10일 밤 11시 경의 맨해튼 5번가다.


한국 시각 2015년 8월 9일 낮 12시에 결혼식을 올린 후 그랜드 하얏트 인천에서 1박을 한 우리가, 그다음 날에 향한 목적지는 다름 아닌 뉴욕이었다.


"신혼여행을 왜 하필 뉴욕으로 가?"


당시엔 그런 질문을 꽤 여러 번 받았더랬다.

정작 나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건만….


의사가 된 후로 5일 이상의 휴가는 받아본 적 없었던 내게, 결혼식 후에 주어진 최장의 7일 휴가는 멀리 떠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비행시간이 긴 미대륙, 그중에서도 어릴 적부터 내 드림 시티였던 뉴욕을 망설임 없이 골랐던 것이다.


물론 그 결정은 아내의 수긍과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신혼여행지는 신부 측에서 고르는 거로 알고 있는데, 고맙게도 아내는 그런 관례를 깨고 선뜻 내 뜻을 따라주었다.

3년 간의 영국 유학 생활도 하고 여기저기 여행도 많이 다녀본 아내라고 해서, 신혼여행에 대한 로망이 왜 없었겠나?

늘 넉넉지 않은 휴가 기간 때문에 십수 년 간 아시아 지역을 벗어나 본 적 없던 나를 위해서, 본인의 뜻을 굽혀준 거였겠지.

마치 꿈속 같은 맨해튼의 밤거리에서 그저 신난 표정의 내 모습이 보인다.

이 사진 속에 보이는 저곳이 바로 우리 부부가 첫날밤을 보낸 세인트 레지스 호텔이다.

사실 우린 결혼식 당일 밤, 그랜드 하얏트 인천에서 1박을 한 바 있다.

하지만 내 친구네 부부 세 쌍이 호텔 근처까지 찾아와 자정 가까이까지 술판을 벌이고 간 관계로(물론 그 시간도 즐겁고 소중했지만), 둘만의 로맨틱한 밤을 보내진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인천 하얏트 스테이는 무효로 하고, 세인트 레지스에서의 1박을 공식적인 첫날밤으로 기억하기로 쌍방 간에 합의를 봤다.




적어도 하룻밤만은 꼭 세인트 레지스였으면 했다. 보통 여행도 아닌 허니문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웬만한 호텔 3박 정도에 해당되는 금액을 하룻밤에 지불해야 한다는 건 약간 손 떨리는 일이긴 했다.

내가 경험한 세인트 레지스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치 딴 세상에 온 듯 으리으리하게 화려한 호텔이 아니라

찬찬히 살펴볼수록 더 고상한 품격이 느껴지는,

'아, 정말 좋은 호텔이구나!'라는 생각을, 들어갈 때보다는 나올 때 하게 되는 그런 호텔이었다.


특히 센스 있고 든든한 버틀러는 세인트 레지스와 여타 호텔들을 구분 짓는 가장 강력한 차별점이다.

뉴욕에서의 첫 디너는 정말 좋은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정찬을 즐기고 싶어서 담당 버틀러에게 추천과 예약을 부탁했다.

컨시어지에서 보내온 리스트 중에서 고르고 또 골라서 선택한 곳은

트라이베카에 위치한 불레이(Bouley)라는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포멀한 곳이라고 해서 버틀러가 받아가서 다림질해다 준 프라다 정장을 입고 갔다.

택시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야 간판을 발견했을 정도로 외관은 수수한 편이었다.

그런데 나이 지긋한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내부는 자못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요란스럽지 않으면서 화려하고, 고급스럽지만 어딘가 정다운 인테리어가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던 것이다.

우리가 마치 맨해튼의 엘리트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제공되는 여섯 개의 코스를 맞이했다.

두 가지의

아뮤즈 부쉬에

(우리 그저께 결혼했고 지금 허니문 중이라고 하니까) 서비스로 하나 더 준 웰컴 디쉬.

성게알이 베이스에 깔려있고, 무스 위에 캐비어가 올라가 있었는데 비리지 않고 상큼했다.

CHILLED WELLFLEET OYSTERS


내가 여름엔 생굴을 먹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내 몫으로 나온 세 개 중 두 개를 후루룩 흡입해버린 후였다.

거슬리는 향 1도 없이, 지나치게 잘 넘어가는 요리였다.

남은 하나도 마저 먹으려다가는, 아내에게도 맛 보게 해주고 싶어 맞은편 쪽으로 접시를 밀어주었다. (아내가 시킨 부시리 요리를 먹어보려는 심산으로 한 행동은 절대 아님.)

HAWAIIAN HIRAMASA & NANTUCKET BLUE FIN


아내가 주문한 메뉴였는데, 한 점 얻어먹어보니 캐비어가 올라앉은 부시리는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고소했다.

MARYLAND SOFT SHELL CRAB


분당의 중국집 '호접몽'에서 몇 번 먹어봐서 익숙했던 식재료였던 소프트쉘 크랩은 매혹적인 식감과 감칠맛을 선사했고,

PORCINI FLAN


게살과 트러플이 들어간 해물 수프는 샥스핀 수프나 불도장을 떠올리게 하는, 깊고 풍부하면서도 뭔가 건강해질 것 같은 맛이었다.

NEW YORK STATE ROASTED FOIE GRAS


나의 최애 메뉴인 로스티드 푸아그라가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코스 메뉴의 옵션에 포함되어 있어서 무척 반갑고 기뻤다.

입에 넣는 순간 바로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부드러움과 오감을 휘감는 풍미에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28달러의 추가 요금(supplement)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MAINE LOBSTERS


감동적이었던 푸아그라에 비해, 아내가 시켰던 랍스터는 영 기대에 못 미쳤다고 했다.

푸아그라를 한 조각으로 끝내기엔 너무 아쉽고 아내에게도 푸아그라를 좀 더 맛보게 해주고 싶어서, 추가 주문을 부탁했더니 한 접시를 두 개로 쉐어해주겠다고 했다.


한입에 마실 수도 있을 것 같은 보드라운 푸아그라를 아껴먹느라, 작은 조각으로 썰고 있으려니 살짝 슬퍼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맛있는 로스티드 푸아그라를 언제 다시 먹어보지?'

A5 #12 TRUE KOBE BEEF


앙코르까지 받은 푸아그라의 강력한 퍼포먼스 바로 뒷 순서에 나와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또 다른 느낌의 부드러운 존재감으로 메인을 장식한 고베 비프.

CHILLED COCONUT SOUP


상큼하고 시원한 코코넛이 들어가니 입안이 리셋되면서, 다시 코스를 시작해도 좋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HOT VALRHONA CHOCOLATE FRIVOLOUS


다소 배가 부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싹싹 긁어먹었던 달콤이들.

LE VACHERIN D'ETE


뒤늦게 찾아보니 바슈랭은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지대인 산간지방에서 서늘한 계절에만 생산되는 귀한 치즈라고 했다.

그저 부드럽게 술술 잘 넘어가던 것만 떠오를 뿐, 정확히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바슈랭이 그렇게 귀한 식재료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의식하고 집중해서 먹어볼걸 그랬다.

결혼 축하한다며 디저트도 한상 더 차려줬다.

이 한 끼에 몰빵한 후 다음날부터는 햄버거와 샐러드 등으로 연명했던 것이 전혀 아쉽지 않을 만큼,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던 허니문 디너였다.




내 영혼은 다시 세인트 레지스로 돌아와, 우리 부부가 공식적인 첫날밤을 보내고 있는 호텔방 안으로 잠입한다.


우리가 불레이에 다녀오는 동안 버틀러가 칠링해놓은 크룩의 풍미는 정말 기가 막혔다. 나는 아직도 그보다 더 맛있는 크룩을 마셔보질 못했다.


그리고 샴페인 병이 다 비워진 이후의 상황은, 수위 조절을 위해 이만 생략할까 한다.


BOULEY (163 Duane Street, TriBeCa, New York )

1991년에 저갯(Zagat)이 7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 조사에서 '생애 마지막 식사를 한다면 어디서 하고 싶나요?'라는 질문에, 불리(Bouley)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뉴요커들의 사랑을 받는 레스토랑이었는데, 안타깝게도 2017년 7월에 영업을 종료했다.

지금은 다른 위치(31 West 21st Street, NY 10010)로 이전하여 '불레이 앳 홈(Bouley at Home)'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불레이에서의 한 끼와 세인트 레지스 1박은 내 경제적 능력으론 과분한 호사였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내 마음속에서 이자처럼 불어나는 추억의 값어치만으로도 벌써 본전은 뽑고도 남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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