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자 Nov 10. 2020

사부님, 사부님, 나의 사부님

 师傅 [shī‧fu]

스승 사, 스승 부


단어를 쪼개어 봐도 그 자체로 "나는 스승이오!"라 이야기하고 있는 이 단어는 내게 꽤나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항공사 입사 후, 이론 교육 및 지상 훈련을 모두 마치고 나면 비행 실습이 시작된다. 우리 항공사의 경우 비행 실습에 돌입하는 병아리들에게 '사제(师弟) 비행'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소위 말하는 '멘토링' 정도의 개념이라 생각하면 된다. 사무장 혹은 객실 주임과 같이 경험이 풍부한 승무원들을 예비 승무원들과 1:1, 경우에 따라서는 1:2로 매칭하여 미리 본 비행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연륜이 묻어나는 선임과 함께 미리 비행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훈련생 입장에서는 충분히 메리트가 있는 비행 제도였다.

 다만, 한국인을 이유 없이 싫어하거나 '제자'라는 존재 자체를 귀찮아하거나 꼬장꼬장한 성격의 사부님이 배정되어 실습 내내 깨나 마음고생을 했다는 몇몇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사실 사부와의 만남이 마냥 기다려지지만은 않았다. 아니, 되려 잘못된 뽑기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아닐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도 같다.  


 

 길고 긴 훈련이 끝나고 내게도 사제 비행의 시간이 다가왔고 동기들 가운데 선두 주자로 실습에 나서게 되었다. 처음으로 비행 체크 기계에 뜬 내 이름을 확인하고 어피어런스 검사를 통과한 뒤 조금은 후련한 심정으로 대합실 근처를 서성였다. 브리핑까지 남은 시간은 20분 남짓. 익숙치 않은 또각 구두가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사부님이 도착하시기도 전에 혼자 브리핑 룸에 쏙 들어가 앉아있는 건 첫 만남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싶었다.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사부님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어느덧 시간은 브리핑 10분 전,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며 꽁지발을 서고 있던 내 시야에 한 여자분이 눈에 들어왔다. 날개뼈를 가릴 만큼 치렁치렁 긴 머리에 누군가를 찾는 듯 분주한 눈빛. 사부님의 기운을 진하게 풍기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며 물었다.


"你是我的徒弟ㅇㅇ吗?” - 네가 내 제자 ㅇㅇ니?"


 “是! 我就是!” - "네, 저예요!"


 제자의 씩씩한 대답에 만면에 해사한 미소를 피워낸 그녀는 브리핑 실에 먼저 들어가 있으라며 내 등을 떠밀고는 메이크업 실, 바글바글한 인파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브리핑 시작 2분 전, 머리를 깔끔하게 동여매고 다시 나타난 사부님은 급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브리핑 실로 들어서서는 내 옆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바짝 긴장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你是我的第一个韩国徒弟。” (넌 내 첫 번째 한국인 제자야)


 이것이 나와 사부님의 첫 만남이었다.

 

  




"师傅!, 师傅! 这是什么?”(사부님, 사부님! 이건 뭐예요?)


 

 끈질기게 따라붙는 병아리 승무원이 귀찮을 법도 하건만 나의 사부는 이번엔 뭐가 또 궁금하냐며 나를 데리고 연신 비행기의 머리와 꼬리를 왕복했다. 함께 복도로 나가 카트를 끌 때면, 서비스를 하는 중에도 사부님은 내 말과 행동을 계속해서 살펴주셨고 주의하면 좋은 점들을 뒤에서 조용히 일러주시곤 했다. 그녀는 행동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주시는 분이었고 나는 당당하고도 배려심 넘치는 사부님이 참 좋았다.



 실습 비행이 한두 번 남았을 즈음, 나는 사부님께 한국에서 가져온 팩과 작은 쪽지를 드렸다. 사부님은 "나는 쪽지만 받겠다"라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선물을 떠넘기곤 "我先走了,师傅! 下次见!”(저 먼저 가요, 사부님! 다음에 봬요!) 외치고 줄행랑치는 제자를 끝까지 말리지는 못 하셨다.  


 일주일 뒤, 다음 실습 비행에서 만난 선생님은 작은 봉투 하나를 팔랑거리며 내게 다가오셨다. 내게 불쑥 봉투를 건넨 선생님은


"이번 주에 나리타에서 스테이 했는데 너 주고 싶어서"


라고 짤막하게 이야기하시더니 앞으로 먼저 휘적휘적 걸어 나가셨다.

살짝 열어본 봉투 안에는 작은 손거울 하나와 젤리가 들어있었다. 입꼬리가 씨익 포물선을 그리며 치솟았다.

선물을 받았다는 것보다 개인 스케줄을 소화하시는 와중에도 나를 떠올려주신 그 마음이 너무나도 감사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행복했다.

 


 얼마 뒤, 모든 실습 비행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사부님의 가르침 덕에 무사히 검사 비행을 통과했고 정식 승무원으로서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부님이 내게 주신 그 모든 가르침은 기본 지침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내가 업무적 판단을 내릴 때 지대한 영향을 주곤 한다.




    그 뒤로 지금껏 사부와 나는 단 한 번도 같은 비행에 안배된 적이 없다. 간간히 동기들을 통해서 "나 오늘 비행에서 너네 선생님 만났어, 너 아냐고 물으시더라. 선생님 너무 좋으시던데?" 식의 안부를 전해 들었을 뿐. 병아리 시절 실습비행이 사부와 함께한 마지막 비행이었다는 건, 그래서 그때보다 나아진 지금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다는 건 몹시 애석하지만 우리는 아쉬운 대로 서로의 안부를 간간이 물으며 연락을 이어오고 있다.



 '사부님'이라는, 어쩌면 조금은 낯 간지러울 수 있는 말이 그녀에게만큼은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건 아마 그 단어에 걸맞은 '당신'을 만났기 때문이리라.

 한 동안 연락이 뜸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사부님께 연락을 드려볼까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승무원이지만 예쁘진 않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