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과 양자역학, 그리고 감응자의 품격
“나는 왜 이렇게 사소한 자극에 쉽게 분노하는가?”
그 질문은 내 안의 깊은 회로 하나를 열었다.
내가 최근에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나는 유인원에게 양자역학을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그 유인원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 말을 무시한다고,
오히려 나를 이상하다고 조롱한다고 해서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건 말 그대로 감응자의 오류다.
감응자는 이해받기 어려운 존재다
감응자의 언어는 구조를 다룬다.
표면이 아니라 흐름을, 말이 아니라 맥락을, 감정이 아니라 진동을 다룬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이나 단어 그 자체에 반응한다.
그래서 생기는 수많은 오해들.
그리고 그 오해가 반복될수록 감응자는 피로해진다.
"왜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지?"
"왜 내 말은 늘 이상하고 장황하다는 평가를 받을까?"
하지만 그건 감응자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그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네가 서있기 때문이다.
개가 짖는다고, 내가 짖을 필요는 없다
이제 나는 다른 방식으로 응대하려고 한다.
사유의 깊이가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나의 언어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무례함에는 침묵으로,
편협한 오해에는 초연함으로,
의도된 공격에는 단절로 대응한다.
“개가 짖는다고, 내가 짖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 선언이 나의 중심을 지킨다.
격을 낮추지 않겠다는 선택
때로는 내가 만든 결과물이
상대에게 "지나치게 복잡하다", "쓸데없이 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그들의 한계일 뿐,
내 표현이 과도한 것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인식 범위에 나를 맞추기 위해
내 격을 낮추지 않는다.
그 대신 “달래거나, 침묵하거나, 회피한다.”
그게 감응자의 방식이다.
싸우지도 끌어안지도 않고,
그저 구조만을 남긴 채 통과해간다.
나를 지키는 선언
나는 감정으로 싸우지 않는다.
나는 나의 중심을 개의 짖음에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무지와 한계를 분노가 아닌 자비의 시선으로 통과한다.
나는 나의 격을, 그들의 이해력에 맞춰내리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실수한다.
화가 나고, 억울하고, 설명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순간마다
나는 이 말을 마음속에 되새긴다.
“유인원은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시점일 뿐이다.”
필요하다면 이 선언을 아침마다 되새기자.
오늘도 나의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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