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관계란, 서로를 존재하게 해주는 것
"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
조지 버클리는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는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 소리는 기록되지 않고,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무가 있다는 사실도 쓰러졌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그 나무는 있었지만 없었던 것이 된다.
이 말은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한다'는 의미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이다. 이 문장을 관계로 옮긴다면, "서로가 알아주지 않는 마음이란 건, 과연 관계 안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좋은 관계란 무엇일까.
우리는 관계를 설명할 때 늘 겉모습부터 떠올린다.
함께 오래 있어도 좋은 관계, 만나면 자주 웃는 되는 눈에 보이는 모습들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물어보면 어떨까.
서로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정말 존재하고 있었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한다는 건, 단순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게 아니다. 나의 일상에서 무엇에 웃게하고 무엇에 속이 상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뭘 먹었는지 그저그런 사소한 하루의 조각들을 이야기속에 흘려 보내면서 누군가의 기억에 남기는 일이다. 서로의 세계에 기억의 조각을 남기으로써 서로를 존재하게 해준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시간을 보낸다는 건 세상에 선명하게 나를 각인 시키는 일이 된다. 반대로 계속된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던가, 같이 있어도 다른 곳에 시선을 둔다던가 하는 일에 서운함을 느끼다 심지어 화가 나는 일들이 생긴다. 화가 나는 이유는 분명하다. 나의 존재가 너에게 지워지는 일이니까. 서로를 부정하면서 매번 나의 존재를 설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증명해내야 하는 관계안에서는 나를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건 지속적인 자기 소거를 경험하는 것에 가깝다. 이별이 아픈 이유는 그가 떠난것에 있다기 보다 내가 그 안에서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환호도, 증거도, 목격자도 없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조용한 나의 일상에, 누군가 들어와서 모든 순간에 이름을 붙여 주고 나의 변화를 알아차려 주면 그제서야 나는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좋은 관계란 '서로를 존재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너로 인해 내가, 나로 인해 네가, 비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인생은 결국 관계 속에서 더 또렷해진다. 누군가의 귀 기울임 하나가 내 삶의 방향을 바꾸고, 한 번의 인정이 오래된 시간을 다시 살게 한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는 나무가 쓰러져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의 숲에 들어가는 그 순간, 조용히 지나간 수많은 시간들이 비로소 소리를 내고 존재하게 한다. 그러니 누군가를 만나 관계를 만든다는 건, 열심히 상대를 알아차려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너로 인해 나의 사소한 시간들을 존재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알아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