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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항시인 Sep 30. 2023

장애가 무슨 벼슬....이다!

좋은 나라란?유럽의 장애인 권리보장

파리의 버스 

 파리에서 저는 지하철 보다 버스를 좋아했습니다. 이쁘고 볼거리가 많으니 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재미가 컸지요. 파리 버스는 계단 없는 저상 버스(승하차시 버스가 밑으로 내려 옴)라서 노약자가 이용하기 편하고,  유모차도 바로 승하차가 가능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 성가대 합창 연습을 다녀온 어느 날, 버스가 출발 안 하고 한 참 서 있었어요. 휠체어 탄 분이 손짓을 한 것입니다. 버스문이 열리고 휠체어용 어뎁터 브리지가 나와서 도로와 버스를 이어줍니다. 전동 휠체어가 능숙하게 버스에 오르고 버스는 그분이 자리를 고정하기까지 기다려 줍니다. 네 정거장 뒤에 그분이 하차 벨을 눌렀는데, 기사가 휠체어 하차인지 모르고 버스 문만 열었어요. 버스 안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기사에게 외치자, 기사가 '오! 죄송해요!'라면서 브리지를 펴줍니다. 휠체어는 천천히 버스에서 내리고 정류장의 시민들은 그분의 길을 열어줍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혼자 이동하는 장애인. 휠체어가 버스에 오르고 내릴 때, 시간이 소요되지만, 모두가 당연히 배려하는 모습. 파리의 이 일상적인 풍경이 저에겐 감동이고 부러움입니다. 장애인에게 친절한 선진국 이야기를  봅니다.    

파리의 흔한 버스 - 천연가스 버스가 많고, 100% 저상 버스입니다.
인도와 연결되는 브리지가 펼쳐진 상태

어디에나 있는 장애인들

 유럽에 살다 보면 문득 한국에서보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훨씬 자주 보임을 알게 됩니다. 휠체어뿐 아니라, 안내견, 지팡이를 두드리며 지나가는 시각 장애인들, 범상치 않은 자세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보행이 불편하신 분들과도 심심찮게 마주칩니다. 버스나 지하철 혹은 기차역이나 건물 입구에는 휠체어나 유모차를 위한 별도의 출입구와 엘리베이터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장애인들이 안에만 있지 않고 거리와 상점, 대중교통과 관광지에서 비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관광지가 많아 어딜 가나 줄 설 일이 많은 파리에서 장애인, 임산부, 유모차는 특별 배려를 받습니다. 줄 안 서고 바로 입장이 가능할뿐더러, 특별 엘리베이터 탑승이 제공되기도 합니다. 비단 관광지뿐 아니라, 슈퍼마켓이나 상점에서도 장애인 카드만 보여주면, 줄이 아무리 길어도 제일 앞으로 끊고 들어가도 됩니다.

 제가 세일 기간에 파리 ZARA에 갔다가 긴 줄에 서 있는데, 어떤 중년 여성분이 옷을 가득 들고 제일 앞으로 가서 먼저 계산을 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뭔데 새치기를 해도 뭐라고 안 하고, 직원이 바로 계산을 해 주는 걸까?' 했더니 '장애인 카드'를 소지한 분이더군요. 눈에 보이는 장애이건 그렇지 않은 장애이건, 장애인 카드는 언제나 프리패스였습니다.

시험을 신청하거나, 입장권을 살 때, 혹은 어떤 교육 과정에 등록을 할 때에도, '보행장애 등을 포함한 신체적 어려움으로 인한 도움/배려가 필요합니까?'라는 질문에 체크하는 절차가 있더라고요. 장애인을 배려하고 우대해 주는 제도적 장치보다 더 놀랍고 부러웠던 것은, 장애인들이 누리는 특혜아무런 불만도, 짜증도 내지 않는 시민의식이었습니다.

유럽에선 거리에 휠체어가 많이 보입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혼자 다니는 장애인들도 종종 봅니다.

휠체어로 알프스까지 온다고?

 베르사유 궁전,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에서도 장애인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휠체어와 마주칩니다. 가을 방학 때, 프랜치 알프스 지역의 전망대를 찾아간 적이 있어요. 푸니쿨라 케이블 카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한참 올라가, 다시 100미터 넘는 돌밭을 걸어 산 정상에 올라가야 했지요. 15분에 한 대씩 오는 케이블카 앞 긴 줄 제 앞쪽에 휠체어를 탄 여자분과 남편으로 보이는 분이 있었어요. 저는 아무 생각이 없이 서 있었는데, 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불어로 뭐라고 하면서 앞쪽으로 가라고 가리킵니다. 그분은 제일 앞으로 '스킵 더 라인' 하고, 케이블카에 바로 탑승! 순간 그 케이블카의 1회 탑승 정원 안내가 20명에서 14명으로 줄어들더라고요! 휠체어 타신 분이 넓은 공간에서 편히 갈 수 있도록 탑승 인원을 확 줄여버리는 세심  배려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저희는 다다음 케이블 카를 타고 돌밭을 걸어, 프랜치 알프스의 비경을 보며 아이들과 사진도 찍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놀다가 내려가려던 참이었어요. 우리 보타 훨씬 먼저 케이블 카를 탔던 장애인 분과 휠체어를 밀던 남자분이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울퉁불퉁한 오르막을 휠체어로 오느라, 우리보다 두 세배 오래 걸린 거였어요. '휠체어를 밀고 여기까지 오다니!' 속으로 감탄하며 그 미세스 휠체어 여자분을 봤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 중 가장 환희에 찬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전망 좋은 곳에 휠체어를 고정시키고, 남편분과 함께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주었어요. 시원하고 깨끗한 바람, 가슴이 뻥 뚫리는 아름다운 경치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 그런 대자연의 품에서 쉼과 힘을 얻어야 할 사람들은 튼튼한 두 다리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이들보다, 누군가의 도움과 배려 없이는 그곳에 쉽게 이를 수 없는 보행 장애인들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 정상에서 본 유럽의 아름다운 장면..휠체어가 못 가는 곳은 없습니다.

특별하 힘겨운 외출

 우리나라에도 프랑스와 비슷한 수의 장애인들이 있지만, 대한민국의 장애인들은 거의 집 안에만 있습니다. 20여 년 전, 두어 달간 동안 장애인 이동 봉사를 했던 적이 있어요. 그 당시에는 버스는 아예 휠체어 탑승이 불가했고, 그나마 이용 가능했던 지하철도 계단이 너무 많아서 장애인 한 명 이동하는데, 일반인 두 명이 필요했습니다. 40분이면 가는 이 1시간 반이나 걸렸었죠.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힐끗힐끗 보면서 외면하거나 불편해하는 시선도 느꼈고, 봉사하겠다고 스스로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분 가족들은 집에 있는데,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장애인을 돌보는 것은 당연히 '그 가족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편견이 있었던 거죠.

검색해 보니 우리나라 장애인들의 이동권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나아지지 않았더군요. 저상버스 보급율은 아직도 50% 이하, 장애인 택시는 2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하고, 지하철 휠체어 리프트는 고장이 많고 너무 느려서, 장애인 혼자 타고 가다 떨어져 죽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동 휠체어가 있어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이 있어서, 장애인 혼자 어디론가 이동하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보행 약자의 이동권은 꼭 필요한 기본권입니다. 어딜 가야 뭐라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가야 할 곳,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해 주세요!"라는 장애인들의 요구는 '특권을 달라는 외침'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라'는 절규입니다.


장애가 벼슬인 사회

프랑스는 장애인의 이동권뿐 아니라, 교육권, 취업권에 심지어 예술권까지 보호합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에선 장애인을 특정 비율로 의무 고용해야 하고 이를 어길 시 어마어마한 벌금을 때려 맞습니다. 버스, 지하철, 기차역 등 모든 공공시설에 장애인용 엘리베이터 필수. 미술관 박물관 무료, 장애인 수당 및 장애인 쿼터 등 촘촘한 지원제도가 많습니다.

Bienvenue chez les ch'tis(웰컴 투 슈티)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어요. 파리의 우체국에서 일하는 남자 주인공은 남부 지점 발령이 소원이에요. 몽펠리애 같은 멋진 지중해 바닷가에서 2년만 살다 오면, 소원한 부부관계도 좋아질 것 같지만 경쟁이 너무 치열합니다. 남부에 살아보고 픈 부인의 닦달에 그는 그만 편법을 쓰고 맙니다; 장애인인척하는 것!

남부발령을 위해 휠체어 장애인 행세를 한 주인공

 장애인 가산점을 통해 남부 발령이 확정되려던 찰나! 속인 것이 들통나서 오히려 징계를 받아 저 북쪽 끝으로 쫓겨나고 말지요. 그렇게 날씨 매서운 북프랑스로 쫓겨나간 어느 아저씨의 이야기인데 유쾌하고 재밌어서 프랑스에서도 대히트를 친 영화랍니다. 그 영화만 봐도 "아하, 프랑스에선 장애가 벼슬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령이 확정되자 너무 기뻐서 벌떡 일어나 악수하는 바람에 들통남 ㅋ

좋은 나라란?

좋은 나라는 부자가 잘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실상, 부자들은 후진국 일 수록 더 잘 먹고 잘 살아요. 남미나 아시아 어느 지역에 가면, 부자들은 아예 담쌓고 지들끼리만 삽니다. 부잣집 노동자 아니고선 아예 그 동네 진입이 불가하지요.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과 엮일 일 없는 '그들만의 편한 리그'를 꿈꾸는 것 같아요.

좋은 나라일수록 부자들은 고달픕니다. 세금도 무지하게 떼이고 이리저리 기부하란 압박도 많고, 여기저기 보는 눈도 많아서 속으론 시렁대면서도, 품위 유지를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며 착한 척해야 해요. 어쨌든, 세상 어디에서나 그냥 내버려 둬도 부자들은 알아서 다 잘 살고, 점점 부를 더 쌓아요. 그런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들은 내버려 두면 점점 어려워지다가 죽기도 해요. 정부는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힘을 쏟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정치와 법치의 존재 이유가 약육강식, 적자생존에 맞서는 '적극적인 약자보호'가 아닐까요?


장애인에 대한 혜택은 많이 늘었다지만 여전히 장애인 복지와 기본 인권 보호와 인식이 부족한 우리나라. 장애인들의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가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지하철 탑승이 '시위'라니.... 그건 당신들의 당연한 권리예요!! 파업으로 인한 시민들의 불편이 일상인 프랑스이다 보니, 장애인들이 휠체어채로 끌려나가는 사진, 그들을 맹비난하는 시민들의 댓글들이 충격이었습니다. 전장연의 과도한(?) 민폐유발 시위행동에 대한 비난만 하기보다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고, 왜 그런 시위를 하는지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싸워 줄 마음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라 그런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내가 입는 피해와 불이익에 지나치게 예민한 우리들, 장애를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당사자나 가족 차원에서 알아서 감당해야 할 일'로 여기는 우리들의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파리가 아름다운 건 센강이나 에펠 때문만은 아니오.....
유모차자 휠체어를 밀고도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배려받아 마땅한 사람들의 자리를 기꺼이 마련해 주기 때문이라오.

 한 사회의 선진화 척도는 '국내 총생산이나 빠른 인터넷 속도'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처우'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이, 비정규직이, 미혼모와 고아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나?', '국가와 사회가 그들과 얼마나 연대하고 있는가?' 이것이 좋은 사회의 척도입니다. 편리하고, 효율성 높은 우리나라에 정말 필요한 것은 '약자와 함께 하고, 내 것을 기꺼이 포기하여 약자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프랑스식 연대 정신(솔리다리떼)'인 것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엔 각자도생의 무한경쟁 토너먼트 대신, 적극적으로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 안전망, 실질적이고 강력한 약자 보호 시스템이 절실합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뿐 아니라, 전망 좋은 핫플에서도 휠체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대한민국을 꿈꾸어 봅니다.


"우리가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인간을 향한 우리의 비전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장애인들의 차이점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자 한다. 그것이 프랑스의 약속이다."

 -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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