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51세에 엄마 43세에 태어난 나
"너는 할머니가 오셨네" 학교에 엄마가 왔을 때 친구들은 이야기했다. "아닌데 엄마인데" 창피했다. 아버지 51세, 엄마 43세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과 폭력이 심했고 밖에 나가면 거의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1남 3녀지만 언니, 오빠와의 터울은 5살, 10살, 21살이다. 큰언니는 태어났을 때 결혼해서 이미 집을 떠났고 작은 언니도 일찍 우리가 살던 포항에서 떠났다. 오빠만 대학교 갈 때까지 같이 지냈지만, 내가 중1까지였다. 엄마는 행상으로 꽈배기 도넛과 찹쌀 도넛을 팔았다. 내가 23살 때 돌아가신 엄마 대신 그 두 가지 도넛을 지금도 좋아한다.
자다가 뭔가 느낌이 이상했는지 눈이 떠졌다. "엄마야" 깜짝 놀랐다. 엄마 얼굴이 내 얼굴 바로 위에 있었다. "엄마 왜?" 엄마는 "아니 그냥"이라고만 하고 연이어 말했다. "내가 니 볼 날이 얼마나 되겠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엄마는 자고 있던 내가 안쓰럽게 보였나 보다. 늦둥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부모는 키우는 재미가 있을지 몰라도 엄마를 볼 수 있는 날이 나에게는 짧았다.
오빠는 꽁치를 나는 갈치를 좋아했다. 지금은 갈치가 비싸지만, 그때는 가격 차이도 없었다. 엄마는 밥상에 꽁치만 놓았다. 고구마를 삶아도 오빠는 2개, 나는 1개 따로 닮아서 줬다. 우리 집은 초가집이었고 가마솥에 밥했다. 엄마는 화가 나면 말은 하지 않고 불 지피는 막대기로 가마솥만 때렸다. 엄마를 놓칠세라 엄마 치마를 꼭 잡고 집과 멀리 떨어진 우물에서 물 긷던 그때가 그립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첫 발령이 경남 하동으로 났다. 엄마는 버스 타고 내가 자취하는 집에 오셨다. 엄마는 자주 아프셨다. 아플 때마다 오열이 심해서 이불 10개를 덮어도 추워서 떨 만큼 열이 심했다. 병원에 가도 병명을 알 수 없었다. 하동에 도착해서 밤에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했다. 아침에 출근해야 했다. 심하게 아프신 엄마를 억지로 시외버스에 태워 보냈다.
엄마와 추억이 없다. 행상하며 고생하던 일, 아버지한테 자주 폭력에 시달렸던 일, 엄마에게 따뜻한 말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일만 했다. 지나치게 부지런해서 제발 좀 하지 말라고 해도 엄마는 묵묵히 씻고 닦고만 하셨다. 68세 때 엄마는 암에 걸리셨다. 체력이 좋아서 의사 선생님은 경과가 좋다고 하셨는데 직접적인 사인은 암이 아니라 폐가 헐어서 돌아가셨다.
친구 엄마들은 젊었다. 형제들도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볼 때마다 부러웠다. 큰 언니는 2남 1녀다. 딸은 나와 동갑이고 아들은 3살 6살 차이다. 나는 언니인데 조카들은 '엄마'라 부른다. 언니 가족은 지금도 자주 모이고 여행 간다. 우리 부부도 언니가 같이 가자고 했다. 가끔 같이 간다. 즐겁고 행복하지만, 가끔 뭔가 허전하다. 나는 절대 늦둥이는 낳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