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터를 사서 너에게로 가는 길
오늘은 퇴근 후 남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보통은 일요일 데이트를 하므로 평일 저녁 데이트 약속이 어쩐지 낯설다. 그럼에도 오늘은 꼭 만나야 한다. 가져갈 것이 많아 아침부터 백팩을 꺼내 주섬주섬 챙겼다. 수채화를 끼운 액자 2개, 2년 전에 사놓았던 남성용 반지갑, 손편지 2장, 앙증맞은 디자인의 초 한 세트. 빠진 건 없겠지? 아, 하나 있다. 라이터. 라이터는 집에 없으므로 가는 길에 잊지 말고 꼭 살 것!
그가 드디어 취업을 했다.
아니, 해버렸다. 갑자기 취업을 해버렸다. 5년간의 숙원사업을 이렇게 한달음에 처리해버리다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해치울 수 있었던 거면, 5년 동안은 왜 못했던 거야? 아, 이게 아니지. 그래, 정말 감격스럽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 9년. 그중에 5년. 그가 직장을 갖기 위해 매달린 시간만 5년이다. (공무원 고시에 쏟은 4년, 취업 준비에 쏟은 1년이라고 덧붙여달란다.) 그동안 무수한 심경의 변화와 갈등을 겪고 이제 좀 직장인과 취준생 연애에 적응해볼까 싶었는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그동안 어떤 굴곡을 겪었었는지 이 자리를 빌려 토로해야겠다!
친구들 중에 남자 친구가 취준생인 경우는 내가 유일했다. 하긴, 후배들 조차도 모두 직장인과 교제하고 있으니 말 다 했다. 1~2년 연애 후 어려움 없이 결혼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불안감이 암덩이처럼 불어났다. 나는 언제 결혼하려나. 아니, 남자 친구는 언제 취업을 하려나. 취업을 할 수 있긴 한 걸까? 휴...
처음부터 조급했던 건 아니다. 1,2년 차에는 '괜찮아. 될 거야. 너 아님 누가 취업하니?' 3,4년 차에는 '많이 힘들지?ㅠㅠ 힘든 만큼 빨리 취직이 되어야 할 텐데..' 하다가 이제는 '왜 안되지?? 아니, 애초에 취업을 못할 운명 아냐??!!'가 된 것일 뿐.
취준생과 교제 하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은 부족한 돈도, 적은 데이트 횟수도 아니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 자신이었다. 직장 상사가 남자 친구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남자 친구가 취준생이라고 하면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 그냥 아무 회사나 다닌다고 말해버릴까? 하고 가짜 대본을 적은 날도 있다. 친구들과의 대화 중 남자 친구 얘기가 나오면 자격지심에 홀로 주눅 들어 버린 날도 있었다. 친구 남자 친구의 직장 이야기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이 정도 표정이면 자격지심을 들키지 않겠지. 정작 주위 사람들은 내 남자 친구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말이다.
단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 뿐인데도, 어느 순간에는 내 능력의 부족으로 치부해버릴 때도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마음이 쌓이면서 주변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기도 했다. '쟤들은 뭐가 잘나서 처음부터 좋은 직장 가진 남자 친구들을 턱턱 만나는 거지? 나는 뭐가 못나서 5년을 기다려도 아직도 취준생과 연애 중인 거지?' 아무리 괴롭더라도 나만 괴롭히면 됐을 텐데, 그 화살은 최종적으로 남자 친구에게 날아가 박혔다.
"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여태 기다려왔는데, 요즘은 네가 안 되는 사람인가 싶기도 해." 하고 자존심 밟기 또는 "30살까지 취업 안되면 너랑 헤어질 거야."하고 협박하기 또는 "너는 효율적이지 못해.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요령이 없는 거 같아."하고 꼰대질 하기 등. 길어지는 취준 기간에 지쳤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해서는 안될 말들을 논리 정연하고 당당하게 내뱉은 날들도 있었다.
"여기, 라이터 있어요?"
"네."
"제가 켜는 방법을 몰라서요, 한 번 보여주실 수 있나요?"
"이렇게 켜면 돼요."
잊지 않고 라이터를 샀다. 라이터 켜는 방법도 알아냈다. 이따 카페에 가서 앙증맞은 초를 케이크에 꽂고 이 라이터로 불을 붙이리라. '생일 축하합니다' 멜로디에 맞춰 '취업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리라. 작게 부르겠지만 눈치를 채 버린 주위 손님들이 함께 축하해준다면 참 좋겠다. 마음 같아서는 TV에 생중계로 내보내고 싶다. 긴급 속보입니다. 제 남자 친구가 드디어 취업을 했답니다!!!!!
착한 남자 친구는 모든 화살을 피하지 않고 덤덤히 맞았다. 그렇게라도 5년간의 내 기다림을 위로할 수 있다면. 마무리로는 항상, 그것이 제 탓이지 내 탓이 아님을 상기시켜줬다. 그러면 나는 또 그게 안심이 되었다. '맞아, 내 탓이 아니야. 이 친구 탓이야.'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친구이지만, 그럼에도 취업문이 열리지 않는 건 어찌 됐던 이 친구 탓이었다. 피해자의 가면에 숨어 5년간 얼마나 닦달을 했는지. 내 참한 겉모습으론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 내가 그랬었지. 악처로 소문난 소크라테스의 아내처럼. 그 아내도 이 정도 했을 거다. 이보다 더 하면 사람이 아니다. 불안감에 눈이 멀어 내가 그랬었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가 취준 기간 동안 참 외로웠겠다. 기쁨의 감정이 걷히고 마음이 쓰리다. 아려온다.
내게도 나 스스로가 초라해 어쩌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에게는 '취업'문제가 그랬을 것이고 나에게는 '가족'문제가 그랬었다. '가족'이 주제일 때 나는 맨몸으로 길거리에 쫓겨난 것 같은 초라함을 느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참 알맞은 온도로 맨몸의 나를 덮어주었다. 가족을 원망하는 내 마음이 경멸스러울 때마다, 그렇다고 가족을 포용할 수 없어 괴로울 때마다,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탓하거나 내 가족을 탓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 많은 것들을 겪은 내가 대단하다고, 멋지다고, 훌륭하다고 추켜세워주었다.
불행한 일만 줄줄이 생겨 덜컥 겁이 나는 날들이 있었다. 내 운명이 불행의 연속이라면 더 이상 살 가치가 있을까 생각하게 한 날들이 있었다. 내 운명이 그렇다면, 주변 사람들까지도 내가 불행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에게 전화해 '나에게서 도망쳐. 내가 너까지 불행하게 할 거야. 내 운명은 불행 그 자체니까.'하고 울음을 쏟아낸 날이 있었다. 그의 대답은 '정말로 그렇다면, 내 행운까지 너에게 다 줄게. 다 줄 때까지 옆에 있을 거야. 그럼 괜찮지?'였다. 그리고 한달음에 1시간 반 거리를 달려와 우리 집 앞에 섰다. 영업 종료를 앞둔 유명한 빵집에서 급하게 골라 담은 빵을 한 아름 건네며 '이게 행운이야.' 했다. 이렇게 계속 줄 테니 옆에 있게 해 달라고. 네 불행까지도 같이 감당하겠다고. 내 행운까지도 다 네 거 하라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그의 취업을 함께 축하하고 있는 지금. 함께 초를 불고 케이크를 입에 넣는 지금. 정말로 너의 행운은 나의 행운이 되었다. 자신의 취직을 내 행운의 일부로 헌납하기 위해 너는 땀을 쏟았을 거다. 내 행운을 짓기 위한 너의 노력. 내 불행을 상쇄하기 위한 너의 노력을 생각하니 눈물겹다.
너는 그렇게 나를 지키고 있었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나일수 있도록.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내가 일어설 수 있도록.
나는 너를 홀로 두고 있었구나. 불리한 상황에서는 발 뺄 계산을 하며. 채찍이라는 명분 하에 너를 깎아내리고 있었구나. 너는 나를 잃을까 봐 많이 불안했겠구나.
너는 '모든 게 네 덕분'이라고 한다. 나는 기분에 따라 채찍을 열심히 휘둘렀을 뿐인데 그 또한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그런다. 실상을 다 아는 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이렇게 예쁜 너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항상 너보다 늦는 나는 이제야 저만치 앞선 네 마음을 읽는다. 내가 이렇게도 못났다. 그럼에도 너를 닮아야겠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는 내 행운을 너를 위해 써야겠다. 네가 불행할 때 내 행운을 꺼내놓는 뿌듯함을 느껴봐야겠다. 내 행운은 네 불행의 보험이다.
너의 취업 앞에서. 너의 더없이 좋은 일 앞에서. 나는 네 불행을 생각한다. 행운 앞에서 기뻐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거 말고. 언젠가 네게 불운이 닥칠 때, 모두가 너를 떠나갈 때, 네 옆에 홀로 남아 함께 버티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네가 속상한 어느 날, 나도 너를 웃게 할 수 있기를. 네가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줄 수 있기를. 나도 '너가 너일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기를. 네게 받은 행운을 도로 갚을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5년 동안 많이 힘들었지?
체력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을 거야. 정말 고생 많았어.
내가 마음고생의 원인이었던 것 같아서, 미안해서, 나는 기뻐할 자격도 없어..
그럼에도 이렇게 좋은 소식 가져다주어 고마워!
예전에는 직장인 남자 친구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는데, 지금은 아니야.
그 모든 과정을 함께 겪은 지금은, 널 기다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를 단단하게 지키는 성을 차곡차곡 함께 쌓은 느낌이 들어서 이게 더 좋아.
예전엔 왜 몰랐을까, 미리 알았다면 너를 괴롭히지 않았을 텐데.
앞으로도 힘든 일이 많겠지만, 지금처럼.
누군가가 불행하면 행운을 몰아주고
누군가가 행복하면 함께 두 배로 행복하자.
그리고 내가 더 나눠줄게.
다시 한번 너의 취업을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