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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훈 Feb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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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눈을 뜬다는 것 


살 수록 사는 일의 속절없음이 자명하다. 세상살이는 더 가혹해졌다. 우울은 일상화되었고 욕망은 광폭해졌다. 결핍은 고백할수록 범람했고 치유가 불가능한 정신적 결함이 늘었다. 금년이 두 달 반절 밖에 안 지났는데 자살 확정자가 십일만이 넘었다. 거의 대다수가 괴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는 이맘때. 나는 벙어리가 된다. 버티자는 말에는 뼈대가 없고 괜찮냐는 말도 슬슬 진부하기만 하다. '말'에 인색해지고 있는 나 자신이 다소 끔찍했다. 거리에는 오늘의 증오가 고백처럼 쏟아지고 내일의 고단이 자갈처럼 굴러다녔다. 그 누구도 고단을 대신할 수 없었고 오늘의 증오를 말하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곳곳에서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이 가장 많이 들렸다. '때'라니, 끔찍하다. 도대체 때라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이 나를 알아주는 순간인가.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는 순간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어낸 순간인가. 진실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순간인가. 모르겠다. 회의적인 나는 '때'라는 게 꼭 공허의 출발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무수한 '때'를 지나온 것 같고, 아무런 '때'도 당도하지 않은 것 같다. 정녕 인간이 평온해지는 지점이 마치 결승선처럼 존재한다는 말은 믿기지 않고, 삶은 그곳까지 걷고, 달려가고, 자빠지고, 다시 일어나는 일의 과정이라는 말에는 흥미가 없다. 나는 지쳤다. 무엇으로부터 지쳤는지, 무엇으로부터 회복할지가 망막하다. 


결국 사는 일은 각자의 고행을 얼마나 잘 씹어 넘기느냐에 달린 게 아닌가. 가장 필요한 근육은 사실 치악력이 아닐까 생각하는 요즘이다. 이 대책 없는 글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여백이 없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들은 또 하나의 고비를 넘는다. 묵연히, 그러나 가끔씩 티를 내면서. 누군가 자신을 봐주기를 소망하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이 가난한 극이 막을 내리든, 어쩌면 새로운 극이 막을 올리든. 살아서, 어둠을 뚫고 가야만 한다. 수월할 수 없다는 것. 그 무엇도, 처음부터 그러했다는 것. 나는 그 말을 다시 되씹는다. 


아, 도대체 어떤 미친 인간이 현실을 직시하고 싶어 하는가. 나는 그 어떤 인간도 현실에 순응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저마다의 심부를 들춰보면 우리는 다 철부지다. 그건 지당한 일이다. 놀고먹기 싫어하는 인간이 대체 어디 있는가. 잘 노는 방법을 잊었을 뿐. 형편이 안 될 뿐. 그래서 다들 차라리 일하기를 좋아하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끝내 즐겁고 싶다. 가볍고 싶다.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다. 인간은 가벼움을 갈망하는 존재로 설계되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어떤 인간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력하다. 현실을 살아야 한다. 현실에 속해야 한다. 아니면 죽거나, 둘 중 하나. 다른 방도가 없다. 세상에서 죽고 싶은 인간은 없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고 외치고 싶은 인간만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세상 밑에서 웃는 일이다. 아, 홀로 웃는다는 건 얼마나 고독한 일인가. 웃지 못하는 인간에게 웃어라는 말은 얼마나 참혹한가. 어설픈 희망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살 수록 살지 못하겠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거리에는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이 무표정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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