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은행 대형 프로젝트에서 내가 재직 중인 회사는 당당하게 사업을 수주했고, 해당 사업의 프로젝트 리더로 내가 낙점이 되었다. 물론 자발적인 나의 의사가 어느 정도 개입이 되었었다. 프로젝트 리더로서 내가 A 은행에 상주하며 사업을 끌고 가기는 했지만 대형 금융권 프로젝트다 보니 A은행에서 요청한 사업 총괄도 프로젝트 룸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A 은행에 자리를 함께 하신 분이 담당 영업 대표였던 박 상무님이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출근은 A은행 프로젝트 룸으로 했다가 오후가 되면 본인의 영업 업무를 보기 위해 외근을 나가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어느덧 2달이 지나갔고, 본점 프로젝트 룸에 머물며 업무를 하던 그날은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에 출근해서 본점 직원들의 도움 요청에 대응하고, 함께 프로젝트에 투입된 팀원들과 하루의 업무 시작 회의를 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날은 본점에 설치되었던 장비와 동일한 기능의 장비를 A은행 전체 서비스 확산을 위해 은행 전산센터에 설치하는 중요한 업무가 잡혀 있었다. 난 야간작업이라 오전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오후에는 장비 설정 및 납품 준비를 해야 해서 조금은 정신없을 하루를 걱정하고 있었다.
난 이렇게 오전을 보내고 나서 오후에 전산센터에 납품할 장비에 전원을 넣고 준비를 시작했다. 설정 작업을 위해 장비에 컴퓨터를 연결하고, 그리 어렵지 않은 장비 설정을 수차례 넣으며 잠깐 실제 저녁에 할 작업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계획을 확인하고 있었다. 손은 익숙한 설정을 타이핑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손이 하는 작업을 나 몰라라 하고 있을 때쯤 뭔가 '싸' 한 기분이 들었다.
눈에 들어온 것은 분명히 전원 종료 명령어인데 지금까지 설정하던 옆에 있는 장비의 전원은 꺼지지 않고 있었고,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스치는 사이 프로젝트 룸 안과 밖에서 조금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난 그 소란스러운 소리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 차장, 지금 인터넷이 안되는데 본점 장비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순간 난 모니터의 전원 종료 명령어가 입력된 장비가 본점 장비라는 것을 알았고, 찰나의 순간 A 은행 담당자가 얼굴이 상기된 채 프로젝트 룸으로 들어왔다.
"김 차장, 지금 본점 업무가 마비 상태인데 무슨 일 있어?"
"죄송합니다. 과장님. 제가 오늘 저녁에 설치할 전산센터 장비 설정을 하다 실수로 본점 장비 전원을 원격에서 내렸나 봅니다. 서비스 정상화시키려면 본점 전산센터 가서 전원 올려야 합니다."
"우선 노트북 챙겨서 빨리 나 따라 나서. 아휴~"
A 은행 담당자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고, 실수로 서비스 장애를 일으킨 난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시 건물이 달랐던 본점 전산센터로 어떻게 뛰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장비 전원을 올리고 서비스 정상화가 되고 나서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걱정이 몰려왔다. 본점 전산센터에서 프로젝트 룸으로 복귀했을 때 걱정은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박 상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저녁에 할 업무 때문에 정신이 없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일하다 보면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 괜찮아 김 차장. 그나저나 은행 책임자가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이네."
그날 오후에는 저녁에 있을 중요한 야간작업으로 추가적인 소집이나 문책은 없었다. 하지만 불안했던 얼음판 위는 금세 금이 갔고, 금 간 얼음판은 금세 깨져 버렸다. 다음날 은행 책임자, 담당자 요청으로 회의가 소집됐고, 관련 담당자들 입회하에 프로젝트 담당인 나에게 모든 책임을 물었다. 다만 A 은행의 서비스 장애에 대한 금전적 책임은 묻지 않을 테니 회사 내부적으로 인사 불이익을 주라는 은행 책임자의 공식 통보가 있었다. 물론 그 사건으로 회사에서 별도의 징계는 없었다. 다만 A 은행에 제출할 '경위서'는 직접 작성하여 대표 이사 결재까지 받아서 제출했다.
10년도 넘은 일이지만 그 날을 기억해보면 지금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밖에 없다. 철렁 내려앉은 심장을 추스르는 데는 수 일이 걸렸을 정도다. 며칠을 의기소침해하는 나를 보며 사업총괄이었던 영업본부장인 박 상무님이 농담으로 기분을 풀어준 일로 조금은 회복이 되었지 않을까 싶다.
"김 차장, 앞으로 다시 생기면 안 되겠지만 누구나 한 번은 그런 사고 치잖아. 괜찮아. 힘내라고. 그나저나 내가 금융권 영업하면서 은행장을 직접 본건 처음이야. 그 양반 인터넷 안되니까 여기까지 달려왔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