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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un 23. 2021

이 구역 레알 빌런은 당신입니다

회식에서 팀장을 따돌리는 동료들

"수호야, 이제 수습도 끝났고 월급도 제대로 받는 정식 직원이니 한 턱 내야지"



첫 직장을 다닌 지 5년이 다 되어갈 즈음 다니던 회사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커져가는 다른 갈증 때문에 조금씩 딴생각을 할 때였다. 첫 직장은 내게 늘 고마운 곳이다. 지금도 그곳을 생각하면 슬며시 미소도 나오고, 늘 그리운 마음이 든다.


그랬던 그곳에서 유일하게 해결이 안 되는 두 가지가 있었다. 다니던 회사는 대기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매년 성장세가 뚜렷했던 소위 잘 나가는 회사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5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막내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직급이 올라가면 팀에 후배도 생길 줄 알았는데 대리로 진급을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신입 연봉이라는 게 뻔해서 그런지 해마다 연봉은 오르는데 오르는 폭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조금은 더 받고 싶었고, 직장 후배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던 때였다.


그럴때쯤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아 든 내 귓가로 '설마'하는 놀라움과 근무 중인 사무실이라는 당황스러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OO회사 인사팀인데 입사를 위한 인터뷰를 제안한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을 때였다. 인터넷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 업데이트를 자주 할 때여서 마음의 준비는 늘 하고 있었다. 


다행히 제안한 인터뷰를 무사히(?) 잘 봤고, 회사에서 제시한 조건 또한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회사에서 5년 만에 새로운 보금자리로 자릴 옮겼다. 옮겨간 회사에서 이직에 대한 스트레스가 꽤 있었지만 그런대로 잘 버티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입사한 지 3주가 지나서야 팀장이 입사 환영회식을 겸해서 부서 회식을 제안했다. 당일 오전에 얘기했음에도 모든 부서원들이 예외 없이 참석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내가 이직한 회사에 재직했던 팀은 나를 포함해서 총 일곱명이었다. 팀장을 제외하고는 나를 포함해 네 명이 직급과 나이가 비슷했고, 두 명이 입사한 지 일 년이 안된 신입사원이었다. 젊은 팀이라 업무도, 생각도 모두 활기 넘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꼰대의 정석을 보인 나이차 있는 팀장 덕에 무겁게 내려앉은 팀 분위기가 입사하면서부터 늘 신경이 쓰였다.


 '오늘 저녁 6시 30분까지 모두 회사 앞 A 숯불갈비 집으로 모이세요. 예약자는 내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팀장은 오전 회식 공지를 팀 전체 메일로 보냈다. 다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함께하는 회식자리가 불편하다는 감정이 표정에 역력했다. 점심 식사 이후 팀장을 제외한 동료들과 함께 얘기할 기회가 생겼고, 그 자리에서 팀원들이 팀장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아휴, 그나저나 수호 씨 팀장이 정말 오늘 술 값 내래요?"

 "지난번에 얘기했으니까 무조건 제가 계산하게 하려고 할 거 같아요. 팀장님 너무하세요"

얘길 듣던 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동료들에게 확인을 위해 대화의 의미를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회식비 회사에 청구하는 거 아닌가요? 그걸 왜 사원인 수호 씨 보고 내라고 해요?"

 "저희 팀장님이 좀 그래요. 나오는 회식비는 정해져 있는데 번번이 회식비 모두 쓰고 이렇게 직원들에게 술 값을 내라고 은근히 권하세요. 뭐 본인도 본인 사비로 밥이랑, 술 많이 산다고 가끔은 돌아가며 술 사라고 해요. 아마 몇 달 뒤에는 대리님 보고도 술 사라고 할 거예요"

이런 경우가 있나 싶었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는 바람에 난 더 이상 그 불합리한 조직 문화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동료들은 회식 관련 추가 공지를 내게 얘기했다. 뒤늦게 나온 얘기에 난 이 조직의 절대 빌런에 대한 실체를 똑똑히 알게 됐다.


 "오늘 1차 끝나고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잘 빠져나갔다가 OO역 1번 출구에서 봐요. 김 대리님 환영회는 제대로 해야죠. 팀장님한테 안 걸리게 다들 조심하고. 김대리님도 알아서 잘 빠져나오셔야 해요"


 어차피 회식자리에 윗사람이 있는게 편할 수야 없겠지만 조직적으로 모두 따돌림을 한다는 게 의아했고, 조금은 불편한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팀장은 회식을 시작하자마자 동료들의 따돌림에 대한 정당성과 잠깐의 내 불편했던 마음을 한 방에 '싸~악~' 날려 보내줬다. 꼰대도 그런 꼰대가 없었고, 회식 자리에서도 동료들의 잘못을 따져 물으며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는 정석을 확실히 보여줬다. 게다가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이 확실한 '빌런'임을 보여주는 마지막 한 방을 구사했다. 그 한 방은 바로 사원에게 계산 떠넘기기.


 "수호야, 오늘 잘 먹었다. 3주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너도 다른 선배들처럼 가끔은 한 번씩 술 사야지"

 "팀장님, 함께 먹었으니 그냥 1/N 하시죠"

 "어이 김 대리가 우리 회사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러는데 우리 원래 이렇게 회식해. 다음 달에는 그럼 김 대리가 사라"


그렇게 1차 회식은 팀의 막내인 수호 씨가 계산을 했고, 우린 미리 약속한 대로 개인 사정을 이유로 1차 회식에서 자리를 파했다. 물론 사전에 약속한 대로 개별적으로 'OO역 1번 출구'에 헤쳐 모여 동료들과의 진정한 환영 회식을 했고, 그 순간만큼은 너무도 서로가 공감되고, 팀장을 따돌렸다는 재미에 스릴감까지 느꼈다.


관리자들 모두가 '빌런'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행동들로 때로는 '빌런'으로, 때로는 든든한 조직의 수장으로 팀 동료들에게 비친다. 하지만 제아무리 빌런 관리자라고 해도 업무에서는 팀원들에게 책임과 권한을 주면서, 신뢰하는 수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진정한 관리자는 팀원이 업무적 과실을 범했을 때는 자신의 선에서 따끔하게 혼을 내지만, 자신의 상사에게는 자신의 과실 인양 떠안는 넓은 아량을 보이는 너그러운 모습이 필요하다. 회식자리는 업무의 연장이지만 쌓였던 업무 피로나, 서운했던 감정들이 풀릴 수 있게 언제든 계급장을 떼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형으로서의 모습도 때론 필요하다. 물론 그런 모습이라도 긴 시간 후배 직원들과 함께하는 관리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낄끼빠빠'란 말이 있듯이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한다. 관리자는 아무리 편해도 직장에서 선배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 꼰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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