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억바라기 Mar 31. 2022

결혼한 걸 후회했다

긴 시간 누릴 행복에 대한 작은 대가였다

"아니 이러실 거면 저 결혼을 왜 시키셨어요? 그냥 저만 고생하게 두시지 이 사람이 무슨 죄에요"


결혼 초에는 부모님에게 원망 섞인 말을 많이 토해냈었다. 아내와 처음 연애를 시작했던 시절만 해도 부족할 것 없는 형편에 풍족한 경제사정으로 '가난', '부족', '궁핍'이라는 단어들은 모르고 살았다. 늘 경제적으로 아쉽지 않았던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집에 손을 벌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결혼에 대한 비용도 부모님께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97년을 기점으로 우리 가족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IMF'라는 핫 토픽 워드가 나와는 무관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비참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우리 집은 직격탄을 맞았다. 오랜 연애기간에 서둘러 결혼을 해야겠다는 내 생각도 당시엔 쏙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2년밖에 남지 않은 대학 학비 때문에 휴학, 복학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우리 집 사정은 좋지 못했다.


다행히 처가의 이해와 배려 그리고 부모님의 자식 사랑 덕에 나와 아내는 이십 대의 끝자락에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취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라 당연히 모아놓은 돈은 없었다. 그럼에도 난 아내와 둘이서 모든 일을 슬기롭고, 아름답게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다. 하지만 모든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님의 부채로 월급날만 되면 통장에서 야금야금 돈이 새어 나갔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한 동안 부모님 댁에 모였다 하면 불편한 돈 얘기로 얼굴 붉힐 일이 많았다. 자연스레 걸려오는 부모님 전화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러실 거면 저 결혼을 왜 시키셨어요? 그냥 저만 고생하게 두시지 이 사람이 무슨 죄에요"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고, 반복되는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절실함에 쌓여왔던 감정들을 쏟아냈다. 당신들에게는 비수 같은 말이었을 테고, 뱉고 나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울음을 터트린 내겐 평생의 후회일 수밖에 없는 흉기 같은 한마디였다.


당시 아버지는 부도로 인해 은행 거래뿐만 아니라 사업상 비즈니스 파트너였던 지인들과의 관계가 모두 끊어졌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로 아버지 당신은 악인으로서의 낙인을 찍고 말았다. 당장은 힘들었지만 시간이 흐르그냥저냥 모른 체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 형제들이 엮여 있는 보증 문제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부모님은 그 부채를 끝까지 책임졌고, 어머니 장례 이후 모든 부채를 정리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다시 화목하게 '하하, 호호' 웃으며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예전 부모님께 비수를 던진 그 사건 이후로 마음 한편이 늘 무겁고 뻐근함을 느꼈다. 그날 이후 난 절대 가족들에게 상처될 말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긴 시간  누린 행복에 대한 아주 작은 대가' 정도로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고쳐먹기로 했다. 가끔 힘든 일이 오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그날을 돌아보며 고된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엄마, 반 친구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부모님과 대화가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야. 그럴 때마다 난 아빠, 엄마한테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라는 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


얼마 전 딸아이와 대화를 나누던 중 딸아이의 말이 너무 예쁘게 들렸다. 딸아이는 자신의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신이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는 걸 느낀다고 말한다. 딸아이뿐만 아니라 아들 또한 그와 비슷한 말을 곧잘 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아주 작은 대가'는 짧은 시간 우리를 괴롭혔지만 '다시 큰 행복'을 선물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들이 한창 무럭무럭 자라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 집에는 큰 평지풍파가 없었다. 물론 어머니의 폐암 치료로 어머니 포함 많은 가족들이 고생은 했지만 지나고 나서 이제와 돌아보면 그 또한 큰 시련은 아닌 듯 생각된다. 앞으로도 풍요로운 마음으로 지금까지 해온 대로 화목하고, 늘 웃음이 끊이질 않도록 가정을 지켜갈 것이다.

얼마 전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내와 점심을 먹고 집에 들어왔더니 외출 준비를 하던 아들이 날 보며 웃는다.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한다. 조금 불안한 마음에 아들에게 무슨 사고를 쳤는지 이실직고하라고 다그쳤다.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보이던 아들은 이내 자신의 과실을 털어놓았다.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고서 냉동실 만두 두 개를 전자레인지에 돌렸는데 레인지 전용 플라스틱 뚜껑이 녹았단다.

 

 "그냥 전자레인지에 3분 정도 맞춰서 돌리면 되는데..."

 "레인지 메뉴에 냉동만두가 있길래 그거 눌렀는데 한참을 돌더니 뚜껑이 녹아버렸더라고요"


레인지 메뉴에 표시된 냉동만두 코스를 제대로 조작했으면 그럴 일이 없었을 거란 의심이 들었다. 궁금한 마음에 전자레인지 메뉴 버튼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마도 아들은 오븐에 맞춰놓고 돌린 게 확실하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아들은 중학생 때 설거지를 덜 만들려고 유리접시에 기름을 두르고 만두를 튀기려다 접시를 깨트렸던 전적도 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아내와 난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우리 가족은 웃을 일이 늘 생긴다. 앞으로도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을 감사하며 지낼 생각이다. 지금같이 그래 왔던 것처럼 이미 지불한 '작은 대가'가 있으니 이렇게 누리는 행복을 늘 감사하면서 말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