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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Oct 01. 2020

난 오늘 아내의 며느리가 되었다

명절 차례 음식을 아내와 정성스레 준비했어요

영희 씨, 내년부터 오징어튀김은 빼면 안 돼요? 기름이 너무 튀어요.


올해 설날부터 우리 집에는 그동안 없었던 큰 행사가 생겼다. 작년 12월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명절 제사는 아내와 나의 몫이 되었다. 원칙대로라면 조부모님 제사까지 모셔야 하지만 친지들이 모두 고향에 계신 이유로 명절 제사와 어머니 기제사만 내가 모시기로 결정했다.


설날 제사에는 아내, 나 그리고 아들까지 팔을 걷어붙였다. 그래도 첫 명절제사 준비 치고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아내가 명절 이틀 전부터 조금씩 제사 준비를 했고, 결정적으로 아들이 아내와 손, 발을 맞춰 명절 준비를 도맡아서 하는 통에 내겐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첫제사 준비만으로는 명절 며느리들의 고충을 몸소 체험하고,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올 추석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큰 조력자인 아들로부터 아내와 난 배신을 당했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를 맞으면서 아들은 더욱 바빠졌고, 공부를 이유로 제사준비 전력 외 인력으로 빠졌다. 연휴 첫날도 수학 특강에, 영어 학원까지 스케줄까지 있어서 명절 음식 준비에서 아들의 역할은 모두 나의 몫이 됐다. 


연휴 전날부터 산적 준비를 위해 늦은 시간까지 아내가 썰어주는 각종 야채, 햄, 맛살, 노란 무 등을 산적꽂이에 하나하나 끼우는 일부터 노동은 시작됐다. 여러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시계가 새벽 2시를 넘어가는 시간까지 잠을 쫓으면서 일하기란 쉽지 않았다.


 "영희 씨, 이거 내일 하면 안 될까요? 너무 졸린데요."

 "그래도 되는데 미리 준비 안 하고 그냥 자면 내일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요. 조금만 참고 이것까지만 오늘 하고 자요."

 난 아내의 완곡한 부탁에 밀려오던 잠도 쫓고, 손가락을 찔려가며 열심히 산적 준비를 했다.  

 "철수 씨, 이걸 이렇게 끼우면 어떻게 해요. 내가 보여주면서 순서대로 꽂으라고 했잖아요."

 "영희 씨, 순서 안 지킨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입에 들어가면 그 산적이 그 산적인데요."

 "맛살을 그렇게 뒤집으면 빨간색이 뒷면으로 간다고요. 버섯도 제일 뒤에 끼우면 모양도 안 이쁘잖아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내가 말한 것처럼 아내가 꽂아놓은 산적과 내가 꽂아놓은 산적은 모양부터가 달라 보였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처럼 내가 만든 산적은 맛도 별로였다. 우여곡절 끝에 산적 준비하는 '일 지옥'도 마무리가 됐다. 지친 몸을 잠시 뉘이고 스쳐가는 잠을 자고 나서야 정식 명절 차례음식 준비의 지옥 같은 날이 밝았다.


아침을 일찍 먹고 청소를 시작으로 우리의 명절 차례음식 준비는 다시 시작되었다. 난 오늘 하루 아내의 진두지휘 아래 유일한 부하로서의 맡은 소임을 충실히 수행해야 했다. 물론 아내의 마음에는 차지 않아 '잔소리'를 많이 듣기는 했다. 그렇지만 긴 시간 동안 명절이 되면 늘 어머니와 함께 음식 준비하느라 고생한 아내가 생각이나 음식 하는 내내 과거 명절 준비하던 아내의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했다.


 "철수 씨, 산적 밀가루 묻혀서 털어 냈어요? 밀가루가 너무 안 묻었는데요."

 "밀가루 묻혔더니 너무 뭉치길래 그래서 털어서 놨는데요."

 "이렇게 밀가루가 적당히 묻어 있어야 하는데 털어내면 어떻게 해요."

열심히 하려는 내 마음과는 달리 아내의 목소리는 조금씩 커져갔다. 처음 하는 내게는 모든 게 서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내의 '잔소리'가 조금은 서운하게 들렸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아내의 조수로서 톡톡히 한 사람 몫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얌전히(?) 아내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계란 풀어놓은 데 많이 담갔다가 바로 넣어야지 계란물 다 빼고 넣으면 안 돼요."

 "영희 씨, 제대로 알려주고 해야지 나도 처음인데 어떻게 알겠어요."

 "아들이 낫네요. 설날에 아들은 척척 잘했는데 철수 씨는 암튼 나랑 안 맞아요."

 "회사에서도 처음에는 선배들이 다 알려주는데 영희 씨는 나쁜 선임이네요."


아들이 없으니 내가 할 몫은 늘어났고, 당연히 셋이 하던 일을 둘이 준비하다 보니 시간도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산적을 시작으로 고구마튀김, 깻잎 전, 고추전, 육전, 명태 전, 오징어 튀김, 새우튀김까지 차례 음식 준비는 장장 5시간을 꼬박 튀기고 끝이 났다. 이렇게 전 준비가 끝나고도 아내는 나물국, 탕국, 생선찜까지 장시간의 노동이 더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해마다 고생했을 아내를 오늘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뜻깊었던 하루였다. 물론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드실 음식 준비를 직접 했다는 기쁨도 더해져서 더욱 보람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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