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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받은 뜻밖의 선물

가족 간에 표현은 삶을 더 따뜻하게 합니다

by 추억바라기

"생일 축하해요!!! 서방님~"


자정을 넘기자마자 아내는 내게 생일 축하한다고 말했다. 어떤 누구보다도 내 생일을 먼저 축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주는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내였다.

"내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지수 때문에 미역국도 못 끓여주는데 서방님 먹고 싶은 거라도 챙겨주고 싶네요"

딸이 고등학교 3학년 입시생이라 올 한 해는 집에서 미역국을 끓이지 않기로 했다. 큰 아이 때부터 지켜지던 불문율이라 둘째 때도 예외는 없었다.

"오늘 지수 학원 때문에 저녁 밖에서 먹을 텐데 그냥 둘이서 맛있는 거 먹어요. 메뉴는 내가 생각해 볼게요"

안 그래도 요즘 장애인 활동지원사 교육받으러 다니느라 아내도 아침 일찍 나갔다가 퇴근하듯이 귀가했다. 이런 아내에게 저녁에 귀가해서 음식까지 준비하라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 같았다. 그럼에도 내 생일이라 챙기려는 아내 마음이 예쁘기도, 고생할 아내가 안쓰럽기도 했다. 아니 오히려 학원 가는 딸아이 덕에 아내와 오붓하게 평일 저녁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하니 더 기대가 컸다.

"그래요, 그럼 뭘 먹을지 잘 생각해 봐요"

"네~, 그럼 전 이만 출근할게요. 이따 저녁에 봐요"

그렇게 아침부터 분주한 아내를 두고 출근길을 서둘렀다.


하루 종일 들뜬 기분으로 퇴근 시간을 기다리다 급하게 오후 휴가를 내고 두 시간 빨리 퇴근했다. 아내의 교육이 끝나기 전에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가서 저녁 시간을 제대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영희 씨, 교육받는 곳이 OOOO 교육원 맞죠?'


그렇게 아내를 만나 분위기 좋은 선술집 야외 테이블에 앉아 우린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도란도란 산책에, 평소 해보지 않던 타로까지 보며 저녁 시간을 알뜰살뜰 탈탈 털어 썼다. 귀갓길에 그래도 생일인데 생일케이크에 초라도 붙이자는 아내의 말에 우린 작은 조각케이크 두 개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애들이나 아내 생일 때 온전한 케이크를 샀다가 매번 반은 남아 버리곤 했던 터라 이번엔 정말 먹을 수 있는 만큼의 케이크를 샀다.

딸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아내는 오늘의 마지막 생일 이벤트를 준비했다. 딸이 귀가 후 집에 들어오는 길에 산 작은 조각 케이크 두 개를 접시에 놓았다. 따로 생일초를 받아오지 않아서 집에 있던 작은 향초를 피웠고, 거실등을 끄고 생일곡을 함께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향초를 끈 다음 불을 켜고 난 뒤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터졌다.

'흑... 흑... 아~앙~'

딸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대성통곡은 아니어도 목 놓아 소리 내 우는 통에 아내도 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대답대신 더 큰 소리로 눈물만 떨구는 딸이었다.


고 3 입시생 스트레스가 커서 그런가 아니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걱정이 더 깊어졌다. 시간이 흘러 더 걱정스러운 내 마음과는 달리 아내의 표정은 점점 편안해 보였다. 마치 모든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딸은 그렇게 한참을 더 울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는 듯싶었다. 그제야 딸에게 난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 있었고, 딸의 대답으로 그 순간 내가 울음이 터져 나올뻔했다.


'말하려고 하니 또 눈물 나려고 하네. 힝~, 오늘 아빠 생일인데 하루가 다 갔는데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못 했고, 케이크는 이게 뭐야. 가족들 생일 때는 근사한 데서 외식하면서 정작 아빠 생일엔 아무것도 없고...'


한 마디로 아빠 생일이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는 말이었다. 딸의 생각이 기특했고,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올해엔 딸이 고 3이라 우리 기념일을 가급적 간소화하려고 했었는데 딸은 오히려 자신 때문에 생일도 못 챙긴다는 자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마음 쓸 여유가 없을 텐데 괜히 마음 쓰이게 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 아내와 단둘이 즐거운 하루를 보낸 나로서는 미안함으로 딸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민망했다.


"괜찮아 딸. 오늘 엄마가 지수 대신 아빠랑 엄청 재밌게 놀아줬어. 그러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고. 다음 달에 오빠 휴가 나오면 그때 제대로 외식하자. 알았지?"

아내는 이미 딸의 이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지수야, 아까 못했다는 거 지금이라도 해봐"

"응, 뭐?"

딸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여기서 물러날 내가 아니었다.

"아빠한테 생일 축하한다는 말. 아직 11시 밖에 안 됐어. 아빠 생일 지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잖아"

"했잖아. 아까. 생일 축하 노래할 때"

딸의 대답에 조금은 황당했지만 마음 추스르고 다시 평상시 모드로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더 이상 오늘 일로 마음 쓰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내가 늘 줘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만을 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아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 완벽한 생일이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이다. 늘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며 살고 있지만 오히려 타인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적게 느껴질 때가 많다. 늘 함께하다 보니 소홀함은 습관이 되고, 배려는 오히려 인색해지기 쉽다.


자녀들의 웃음, 가족의 따뜻한 눈빛은 말없이 큰 위로가 될 때도, 끝없는 응원이 되기도 한다. 더 늦기 전에 더 자주 표현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해야만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을 것이다. 가족은 단순한 구성원들이 모인 단체가 아닌 나의 그리고 우리의 삶의 이유이자 가장 따뜻한 사랑의 이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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