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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차이고 결혼 후 복수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오래된 관계의 가장 큰 무기는 견고함이다

by 추억바라기

'오빠, 제 마음이 오빠 마음 같지 않나 봐요. 저희 그만 만나요'


아내와 연애 시절, 아내에게 고백하고 한 달을 만났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면전에서 보기 좋게 차였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내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날 좋아하는 마음이 크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서글펐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마주 앉아 있기가 힘들어 헤어지자는 말을 듣자마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어딜 가야 할지 몰랐지만 무작정 그곳을 벗어나려고 걸었다. 아파서인지, 서러움에 북받쳐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길을 걸으며 눈물이 차올랐다. 내 사랑이 현재 진행형 일지 몰랐던 그날은 내 아픈 사랑의 시작을 후회했고, 끝을 아파했던 하루였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다시 만났고, 오랜 시간을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여느 부부처럼 사소한 일에 말다툼도 했었고, 가끔은 상처되는 말로 얼굴 붉히는 일도 있었다.


지금이야 주변에서 다정다감한 남편의 대명사인 것 같이 많이들 알고 있지만 한땐 아내가 불편할 정도의 눈빛을 쏘아낼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옛일이 됐지만 과거엔 조금 예민하게 굴었던 시절이었다.


'오빠, 남들만큼은 아니어도 애들 대학 학비까지는 어떻게든 마련해 줘야지'

'영희야, 있으면 해 주지. 근데 당장 우리 노후 준비도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 주어진 대로 살자'


그렇게 시작했던 아이들 학비 문제는 아내가 아이들 대학교 들어갈 무렵에 탈 수 있는 적금을 들어서 어느 정도 해소한 상태다. 아내의 철저한 준비와 계획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이었지만 살아온 환경에서 아픔이 되었던 일이나, 타고나면서 생겨난 모난 내 성격 탓이었다.


이런 문제 외에도 우린 몇 가지 이유들로 언쟁을 하곤 했었다.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은 부부가 살면서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중에 '부부싸움'이란 단어도 존재한다는 걸 잊지 않을 정도였던 것 같다.


결국 부부간에 싸움도 서로의 의견이 오가는 대화 속에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무관심 속에 사는 부부들은 이런 부부싸움조차 없는 것이 보편적이다. 다만 생각해 보면 부부가 싸우는 이유는 그리 많지 않다. 부부마다 싸우는 이유야 제각각이겠지만 한쌍의 부부가 싸우는 이유는 거의 유사한 실수와 문제들이다.


인간은 참 어리석은 동물이다. 학습을 해서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반성하고, 고쳐야 하지만 늘 같은 실수나 문제를 반복한다. 이는 긴 시간 만들어온 습관에서 기인한다. 몸에 배거나, 머릿속에 각인된 습관이나 사고는 좀처럼 고치기 어렵다. 평생 늦잠을 자던 사람이 일찍 일어나기가 어렵거나, 약속 시간을 5분씩 늦는 사람이 제시간이나, 5분 일찍 도착하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오래된 나쁜 습관이나 문제들을 고친다면 더 이상 같은 문제로 싸울 일은 없어질 것이다. 이런 습관이나 문제를 해소한 부부는 다른 문제가 생기더라도 충분히 개선하거나 바꿀 수 있는 기초가 이루어진 관계이므로 더 이상의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난 결혼 후 항상 아내 바라기로 살고 있다. 한때는 집착이라고 보일 정도로 아내와 함께 하려고 했지만 살다 보니 아내를 위한 나만의 배려와 이해를 찾았다. 그래서 아내의 시간과 아내의 관계 등을 존중하고, 배려하게 되었고, 아내 또한 나의 관계와 나만의 시간을 이해하게 되었다.


난 늘 나에게 묻는다. 내가 함께가 아니어도 아내가 좋아할 만한 시간인지, 내가 함께 해야만 아내가 좋아할 만한 시간인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기준으로 난 아내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려고 애쓴다.


또 가사는 분담을 기본으로 해왔다. 처음엔 가사를 돕는다는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마음으로 도왔더니 가끔은 하기 싫거나 힘들 때마다 삐죽하게 올라오는 내 마음을 종종 보게 됐다.


'밖에서 일하고 와서 힘든데 오늘 설거지는 그냥 하지 말까'

'오늘 너무 힘들었는데 설거지할 게 너무 많네'


이렇게 드는 마음이 불편해서 아예 저녁 식사 후 설거지는 내가 할 일이라고 마음을 바꿨다. 저녁 준비를 아내가 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더니 저녁에 아내가 시키는 일들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난 아내를 위해 많은 걸 하려고 애쓴다. 아내가 배우려고 하면 응원하고, 격려하고. 아내가 주말, 휴일에 혼자 다녀와야 할 곳이 있으면 자주 따라나선다. 혼자 왔다 갔다 할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내 시간을 아내에게 투자한다.


'영희 씨, 이거 마음에 들까 모르겠네. 그냥 이너로 입기에 맞을 듯싶어서 샀어요. 요즘 안에 입을 흰 면티 없다는 얘길 들어서 지나는 길에 하나 사 왔어요'

'톡톡하니 두께감도 있고, 사이즈도 맞는 거 같아요. 일하는 사람이 바쁠 텐데 고마워요'


얼마 전 사무실 근처를 지나다가 옷매장 진열 윈도에 가지런히 놓인 흰색 여자 면티를 보고 2장을 사 왔다. 얼마 전부터 면티를 사야겠다는 아내의 혼잣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특별히 디자인을 봐야 하는 옷이 아니어서 큰 고민 없이 구매했다. 다행히 아내가 마음에 들어 했다.


이 외에도 아내와 함께 외출 시에 아내가 필요한 것들을 미리 챙긴다. 먼지나 온도에 민감한 아내를 위해 마스크나 목을 쌀 머플러는 기본이다. 날씨가 애매할 때에는 혹시나 하는 기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바람막이도 가방에 넣어서 다닌다. 긴 시간 지하철이나 기차로 이동시에는 아내가 읽는 책과 잦은 기침 해소를 위해 물도 함께 챙긴다. 여기에 핸드로션, 양산, 휴지나 물티슈까지 챙기면 모든 준비물은 끝이다. 그렇게 난 매일매일 아내에게 복수하며 살고 있다. 날 좋아하지 못했던 그날의 아내에게 날 좋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그런 매일로 말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 보면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많다. 하지만 표현은 필요하다. 사소한 감정 표현만으로도 관계는 더 돈독해지고, 견고해지기 마련이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오래된 관계의 가장 큰 무기는 누구도 깰 수 없는 견고함이 아닐까. 다른 사람이 비 짚고 들어갈 틈이 없는 그런 견고함 말이다. 얼굴만 봐도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당장 무엇이 필요한지 행동만으로도 유추가 되는 그런 관계의 견고함이다. 이런 관계는 상대를 알아도 너무 잘 아는 사이일 것이다.


상대에 대해서 속속들이 안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는 얘기다. 방금 다져진 관계에서는 상대를 알기 전까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이런 시작도 적절한 시기가 있다. 실수를 받아줄 여유는 있어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누구나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잘 안다고, 익숙하다고, 편하다고 무시할게 아니고 아는 만큼 더 배려하고, 이해하고,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이렇게 익숙하고, 편한 관계에서 유지가 얼마나 쉬운지 알게 될 것이다. 방심하다 차이지 말고, 곁에 있을 때 잘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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