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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푸른빛의 파동

별이 지고, 새벽이 오다

by 추억바라기

바다 안개가 낮은 구름처럼 항구를 뒤덮었고, 산자락에서 내려온 밤바람이 안개를 결대로 가르며 도시 곳곳에 숨소리를 입혔다. 퇴근길 회사원들은 피로를 얼굴에 고스란히 묻힌 채 버스를 탔고, 교복 입은 아이들은 저녁 찬바람에 교복 깃을 여미며 하굣길을 서둘렀다. 모두가 하루를 마감하는 이 시간에 도시는 어둠의 기운으로 넘쳐났다. 어제 새벽 다리 위에서 마주친 하얀 옷의 남자. 자신을 해원의 정원 교주라고 말한 그의 말이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이 도시는 피로 씻겨야 한다. 피로 씻기는 밤, 그땐 정말 문이 열릴 거야.'

성림시의 밤은 날이 갈수록 더 붉어졌다. 강림과 해담은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걸치고 해원의 정원 본부의 후문으로 스며들었다. 낮에는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던 입구지만, 밤이 되자 허락받지 못한 자들의 출입을 통제하려는 듯 경계는 삼엄해져 있었다. 벽을 타고 2층 채광창을 넘어 들어가니 어둠 속에 붉은 선이 감지선처럼 깔려 있었다. 바닥, 벽, 천장. 모든 표면이 붉은 선이 엮어진 문양들의 연장이었다. 해담이 숨을 고르며 퇴마검에 손을 얹었다. “살아 있는 건물이에요.” “맞아. 벽과 바닥에 있는 붉은 선들이 의식의 혈관이야.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 강림이 속삭였다.

두 사람은 강당 뒤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복도 끝에 휘어진 판자문이 있었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끈이 문턱에 걸려 있었다. 강림은 즉시 손목 장치를 켜 결계를 넓게 펼쳤고, 붉은 선을 살짝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선이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다 '탁~'하고 스스로 끊어졌다. 판자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두 사람을 덮쳤다. 냉기가 두 사람의 폐 속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냉기에 익숙해지자 비릿한 피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섞인 병원 수술실 같은 차고, 기분 나쁜 냄새가 둘의 코를 찔렀다.

방 안에는 의자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돌판이 놓여 있었다. 돌판의 표면을 덮은 검은 얼룩은 말라붙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흐르는 물결처럼 살아 있었다. 강림은 돌판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시선을 옮겨간 쪽에서 작은 홈을 발견했다. 홈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고여있었고, 고인 액체는 조금씩 넘쳐 작은 방울들로 모였다. 이렇게 모인 액체 방울은 돌판 모서리를 따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검고 짙은 잉크 같기도, 검붉은 피 같기도 한 액체였다. “여기서... 제사를 지냈나 봐요.” 해담의 목소리가 가늘게 울렸다.

그때 복도 쪽에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즉시 두 사람은 소리를 죽였지만 양쪽벽 좌우에 있는 경보등이 요란하게 울렸다. 경보등이 울리는 동시에 어두웠던 방안에 갑자기 '번쩍'하고 불이 켜졌고,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똑같은 복장의 검은 옷을 입은 신도들이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강림이 반사적으로 처음 들어오는 무리를 향해 특수 탄환을 발사했다. 탄환이 공중에서 은빛 원을 그리며 폭발했고, 그들을 향해 달려들던 여러 명이 고꾸라지며 검은 실로 변하더니 모두 안개처럼 흩어졌다.

"이기어검, 연섬!" 해담이 소리치며 오른손에 뽑아 들었던 퇴마검을 날렸고, 이렇게 날아간 검은 파도처럼 연속 궤적을 그리며 뒤이어 달려들던 무리들을 꿰뚫었다. 검이 벤 자리마다 검은 실이 뒤덮였지만, 뒤를 이어 덮쳐오는 신도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은 굵고 검은 사슬을 던졌고, 해담의 팔과 허리를 동시에 감아쥐었다.

“놈들이 속박의 주문을 썼어요!” 해담이 이를 악물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먼저야.” 강림이 던진 섬광탄이 주변을 하얗게 태웠고, 해담을 감고 있던 사슬도 함께 느슨해졌다. 그렇게 느슨해진 사슬을 풀려던 찰나에 다른 사슬이 뱀처럼 해담을 속박했고, 어느새 강림의 발목에도 굵은 사슬이 감겼다. 감긴 사슬은 뱀처럼 살아 움직였고, 순식간에 두 사람을 결박해 붉은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중앙으로 끌어갔다.

강당 중앙에는 많은 신도들이 모여있었고, 이미 의식은 진행 중이었다. 무대 위 스크린에는 성림시 곳곳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비쳤다. 모두 붉은 문양의 표식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항만 컨테이너, 숲 속 폐가, 다 쓰러져 가는 건물들, 폐업한 지 오래 지난 병원이 교차되면서 비쳤다. 모두 강림과 해담이 간밤에 조사차 다녀왔던 곳이었다. 천장에서는 붉은 천이 넝쿨처럼 내려와 중앙 돌판을 둘렀다. 강당 중앙에 있던 흰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기도문을 읊조렸다. 간밤에 두 사람이 본 교주였다. 그가 매 구절을 마칠 때마다 돌판의 십자가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신도들은 들고 있던 칼로 자기 손바닥을 그었고, 상처 난 손에서 배어 나오는 붉은 피를 바닥 문양에 떨어뜨렸다. 그 피가 문양의 선을 따라 흘러, 커다란 눈동자를 이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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