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를 날리며
이십 대의 절반에 안녕을 고함 - Epilogue
이제 너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침대에 누웠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 모순이다. 너는 한 번도 내게 온 적이 없었으니까. 내 마음속으로만 너는 내 옆에 있었다. 때가 안 맞았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너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그때 너는 삼수를 시작했다. 너를 사랑하기 시작했던 그때 너는 편입을 시작했다. 너에게 빠져 그 누구도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때 너는 편입 재수를 시작했다. 공부를 할 때면 모든 것을 내치고 공부만 하던 너. 그런 너를 배려하기 위해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좋은 핑계가 되었다. 사실은 용기가 없고, 자신이 없었음을 인정한다.
너를 좋아한 이래로 몇몇이 내게 다가왔다. 차갑게 내친 적도 있지만, 마치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기다림이 두려워 내게 내미는 손을 잡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이 심연 속에서 꺼내 주기에는 너무 약했다. 단 한 발짝도 너라는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연애는 대개 한 달만에 끝나곤 했다.
지금껏 내게 있어 너를 기다림은 집행일을 모르는 사형수의 괴로운 아침과도 같았다. 어쩌면 오늘은 하루 더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잔인하게도 너무나 잘 알았다.
어제 갑자기 네 생각이 났다. 네 생각은 으레 후폭풍을 몰고 오곤 했다. 자기 전 네 생각이 나던 밤은 괴로운 밤이었다. 네가 너무 밝아 잠을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날엔 반드시 네 꿈을 꾸곤 했기 때문에 나는 마치 불나방처럼 네게 날아들려 했다.
어제는 달랐다. 너를 좋아했던 기억이 아름답게 떠올랐다. 너를 처음 만나고 한눈에 반했던 기억. 입대 전 너를 만났던 기억. 휴가를 나와 수 시간씩 고민하다 짧은 카톡을 보내고 가슴 졸이던 기억. 어렵게 잡은 약속이 파투 나자 혼자 청승 떨며 울었던 기억. 전역 후 네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고 싶어서 치열하게 살았던 기억. 한 동안 연락을 안 하다가 네 생일날에 소심한 카톡 하나를 보냈고, 그 답장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가 되었던 기억. 그 모든 기억이 이젠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하고 있다. 기억이 추억으로 변할 때, 나는 비로소 인생에서 한 발짝 내딛을 수 있었다.
너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생긴 것은 아니다. 내게 있어 아직도 너의 대체재는 없으니까. 너는 여전히 내게 있어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다. 추억 속에 박제됐으니 영원히 그렇게 기억되겠지. 진짜 천사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널 꼭 닮은 딸을 낳아주렴. 다음 생에 태어나면 네 딸을 이번 생애 내가 너를 바라보듯 바라볼 수 있도록. 늘 지금처럼 어여쁘렴. 다음 생에 태어나면 한 생을 건넜지만 너를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도록.
인생의 한 점에서 참 오래도록 머물렀었다. 나는 이제야 한 걸음 더 내디뎌보련다. 너의 앞날 역시 축복한다. 언젠가 무엇을 통해서든 내가 네 소식을 듣고, 내가 네 소식을 듣는다면 추억이 되어버린 기억을 떠올려주길. 그리고 떠올릴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