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히피 Oct 27. 2024

48~50세

2005~2007


48세


자기소개서

작성자 함종학, 2005,6,28     


모처럼 자기소개서를 쓰려고 하니 쑥스럽기도 하고 설레이기도 합니다.

제가 살아온길을 잠시 돌아보고 반성할수 있는 계기로 생각하겠습니다.

제 생각과 아집이 담겨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 다른 의견이 있을수도 있으므로 양해를 구합니다. 이 글은 사장님께만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1. 출생과 어린시절     


  충북 괴산의 농촌에서 1958년 6남1녀중 4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독자이신 아버지가 여러자식을 얻게 되므로써 대식구가 되었으며 생존경쟁이 치열했습니다. 7남매의 나이차이가 14년에 불과해 어머님은 2년에 한번씩 출산하신편이며 여러형제가 경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고 이러한 경쟁속에 자라면서 사회를 배우게 되었으며 긍정적인 사고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형제이지만 부모님이 현명하신 관계로 남보다 어렵지 않게 성장했다고 볼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을만큼 어려운 농촌에서 때가 되면 저희 집에 밥을 얻어먹으려고 줄을 섰을만큼 동네에서는 잘사는편에 속했습니다. 놀이 기구라고는 돌맹이와 아름다운 산천이 전부였으며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만 알았고, 승용차 한번 구경하지 못하고 자란 촌놈으로 그러한 자연의 법칙이 자연적으로 순수하고 긍정적인 사고의 원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성장과정     


  여러형제가 한집에서 살면서 우애좋고 공부잘하는 아이들로 칭찬받으며 자랐습니다. 저희 형제들은 시골의 국민학교에서는 당연히 우등생이었으며 부모님에게 공부하라는 말씀은 들어보지를 못하고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으로 알았으며 특별히 공부를 안해도 우등생이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면에서는 평균학력이 가장 높을만큼 우수한 두뇌와 가정환경이좋은편이었

습니다.  

점심 저녁은 형제들끼리 해결하는 경우가 다수 있었으며 서로 우애있게 자랄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들이 자립심을 키웠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지금도 고향에서는 저희 형제들이 인정을 받으며 생활 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배경은 지금 저의 긍정적이고 약간의 보수적인 사고의 원천이었으며 자부심입니다.                


3.학창시절     


국민학교는 충북 괴산군 소수면 소수 국민학교였습니다.

그곳은 추운겨울 검정고무신에 떨어진 양말을 신고 10여리를 걸어서 다닐 정도로 낙후된 환경이었습니다.

버스한번 타보지 못하고 트럭한번 구경하지 못한 촌놈이었습니다.

중학교는 동네에서 20여리 떨어진 음성중학교를 입학하게 되었으며 대부분 자전거 통학을 했으며 가끔은 걸어서 학교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음성읍내에서 교감선생님을 하시는 이모부 덕으로 이모집에서 3학년때부터 집을 나와 객지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 육성 대책으로 기계공고를 많이 육성했으며 촌에서 공부를 좀 한다는 학생은 대부분 기계공고를 많이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고 여러 형제들이 있다보니 당연히 기계공고를 선호하게 되었으며 이결과 청주기계공고 기계과를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기계공고에서 주물을 전공하게 되었으며 졸업할때는 주물조형 2급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은 제가 지금까지 생활해온 세월중 가장 엉터리였습니다.

대학교를 가지 못한다는 생각아래 공부는 하지 않고 학생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많이했고 지금은 후회도 되는 부분입니다.     


5.사회생활     


1977년 대전의 작은 주물공장(남선기공)에 실습을 1년여 동안 했으며 주물을 직종으로 대우중공업 산기사업본부 주물공장에 1978년 입사를 하게되었으며 이후 어려운 작업여건과 생활속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인천에서 종로2가까지 학원을 다니며 각종 자격증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여러 가지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격증은 저의 생활에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던차에 1990년 아주대 산업교육원을 지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아주대 산업교육원 기계과 4년재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91년 아주대산업교육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복귀하여 그동안 습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방음형 발전기 6기종을 Sierise화 하여 국립환경 연구원으로 부터 저소음형 기계로 인증 획득 하였고 대우발전기의 기술력을 입증하고, 매출 및 수출 향상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약 1달간 기숙하며 개발에 참여한 결과로 위장병이 생겨 3개월간의 병원 치료를 한적도 있습니다. 이후 대우중공업에서 10여년간을 생산해오던 구모델의 발전기를 NEW MODEL 발전기 로(현재의 당사 수출용 모델) 전환하였으며 ‘96년에는 수입엔진 적용발전기의 국산화등에 일조를 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대우중공업에서 우수 연구원에 주워지는 인센티브를 연속 2년을 수여 받을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1999년 k2파워에 선도 주자로 분사에 참여하여 연구개발에 전념했으며 k2파워가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며 저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k2파워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우리 구성원 스스로가 잘 알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떠한 조직이던 여러 가지의 부류가 있지만 우선 구성원들의 생각이 긍정적이고 책임이 있어야 하는데 말만 앞세우고 비판만 할줄아는 기회주의자는  우리를 발전 시킬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것은 우파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지 죄파적이고 비판만 앞세우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빵을 나누는 방법에는 열을 올리지만 빵을 만드는 방법에는 귀를 귀울이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우리를 발전시킬수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김우중 회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김 회장님이 이룩하신 우리나라 산업전반의 시설이나 산업의 발달 그리고 도전과 창조의 개척자적인 정신을 평가하지 않고 오직 과거는 생각지 않고 단편적인 비판의 눈으로 그분을 평가하려는 의도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김회장님을 존경합니다.     

k2파워 구성원 특히, 대우에서 근무했던 사람은 상하를 불문하고 대기업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며 스스로의 경쟁력을 키워야 합니다. 이는 하부 직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자만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50이 되었어도 20살 먹은 고객에게 굽할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모험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너무 완벽을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전 사원이 영업사원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영업을 담당하면서 상기에 언급한 사항들로 인하여 많은 고민을 할때도 있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우리 회사는 저 때문에 망한다는 말도 듣고 있습니다. 제가 2004년에 100억 매출을 목표로 한다니까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스 발전기를 개발하여야 한다고 제안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회사의 비젼이며 전직원이 단합된 힘을 발휘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고 능력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비젼이 없는 회사는 죽은 회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여야 합니다.

전 사원이 영업사원화 되어야 하고 영업하는 사람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우선 필요합니다. 지금은 외부 영업보다 내부 영업이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영업을 이해하려는 관련부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영업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며 발전기를 1대씩 팔어 보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영업을 편하게 하여 이를 계기로 수금문제, 매출확대를 추구하여야 할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얘기를 좀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제스스로 빽도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 생활을 해 오면서 거꾸로 가는 경우가 몇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그 내용을 말씀 드리면.     

1978년 대우에 입사해서 기능사원으로 있으면서 단기간에 5직급까지 진급하는 실력을 인정 받았고 산업교육원에 입학해서 사원 4을 38을 받았지만 보수는 다소 줄어드는 경우였습니다. 이때에 대우중공업에는 4을 38이라는 호봉이 없어 저를 위한 특별한 호봉체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1991년 산업교육원을 졸업하고 나니까 4을 38을 4갑사원으로 하여야 하는데 직급이 너무 높아 일정액의 조정수당을 주어 4갑3으로 발령을 받은적이 있는데 이때에도 개인적인 보수 차원에서 손해를 보았으나 회사의 방침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거의 매년 3호봉씩 고가를 받으면서 산교원 동기생들중 가장 먼저 과장까지 진급을 하게되었습니다.  1999년 k2파워에 입사를 하면서 또 한번의 기이한 호봉체계로 인하여 상대적인 불이익을 감수 해야하는 일을 격고 있습니다.

차장이라는 명함을 6년째 달고 있으면서 조직표상에는 차장 3년차라는 다수의 횡포에 이상한 직급체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와 같이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시정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6. 가정생활 및 가족소개  

   

저는 6남 1녀중 4째로 태어났습니다.

다복한 집안이었으며 지금도 타의 모범이되는 가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는 2003년 아버지가 작고하셨을때 충북 괴산의 작은 시골마을인데도 불구하고 조문객이 3000여명이 몰렸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저희 형제들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없습니다. 그러나 6남 1녀중 모두가 32평 이상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볼때 그 성실함과 근면성은 인정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등학교때부터 결혼하기전까지 혼자서 12년을 자취를 했습니다.

그러다 1987년 충남 공주가 고향인 제 처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987년에 결혼하여 300만원을 신협으로부터 대출받아 가정을 꾸렸고 3년만에 20평의 아파트에 살수 있는 행운도 있었으며 지금까지 경제적인 면에서는 어려움을 격어보지 않고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 처의 현명하고 알뜰한 살림이 뒷받침 되었겠지만 대우에서 근무하면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했다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지금은 46살의 처와 고3의 딸과 고1의 아들이 있습니다.

비교적 단란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희망은 우리가족 모두가 건강한 몸과 건전한 사고로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7.희망사항 및 향후 계획

    

우선 k2파워가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회사가 잘 되어야 저도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직판영업 매출을 100억으로 목표를 달성해야 하겠고 그 내용으로도

경상이익 10억은 확보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아울러 회사에 요구하고 싶은것도 있습니다.

직영팀원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회사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주어야 합니다.  몇가지를 나열해 보면

첫번째로 직영팀은 자차를 이용하면서 월3000여 kM를 주행합니다. 그러면 년간 4만여 km를 주행하게 되는데 유류비는 지원이 되지만 감가상각이나, 차량 정비비는 지원이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휴대폰 비용으로 팀원께 다른 부서와 동일하게 월 3만원으로 부족합니다.

근태에서도 다소 불리합니다.

저녁에 술자석이 자주 있을수 있고, 일일 출장도 자주 다니므로써 아침에 출근에 있어서 어려울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 한 문제들이 큰 문제는 아닐수 있지만 영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다소 불평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모처럼 저를 뒤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지금까지의 저의 삶은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합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열심히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50세


2007. 2. 2 (금요일)

꿈 이야기     

오늘은 평소에 자주 마시던 술도 안마시고 집에 일찍 귀가하여 집에서 해주는 저녁 식사를 하고 평상시보다 좀 일찍 잠에 들었다.     

회사 부도로 인한 어수선한 일 가운데 새로운 투자자가 나와서 내일 2007.2.2일 1:1 면접을 보고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여 면접에 합격한 사람을 입사시켜 운영한다고 한다. 인원은 현재 65명에서 45명 수준으로 간다고 한다.

이러한 어수선한 저녁에 복잡한 회사일 때문인지 시한한 꿈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 이 꿈 이야기를 정리하여 나의 진로에 참고하고자 한다.     

종운.종준.나 3형제가 술을 마셨다.

동생들이 어쩐일인지 술이 많이 취해서 비뜰거려 내가 부축하여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데 길가에서 놀고 있던 5~6세 어린이가 계속 시비를 걸어온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신체적인 위해를 가하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들어 내가 그 아이들을 몇 대 쥐어박아 아이들을 울게했다.

그때 그 아이들의 보호자인 듯한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겁주고 폭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도망을 갔는데 동생들은 무사히 도망갔고 나만 미쳐 도망가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있는 민가로 피신을 했다. 그들은 거기까지 쫒아와서 다짜고짜 아이를 때린것에 대한 보복과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

주인집 아저씨가 내편을 들어 폭력을 막을 수는 있었으나 심한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자 그 놈들이 경찰을 부른다고 했다. 내심으로는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경찰이 오면 잘못한것도 없는데 나한테 불할것은 없을것으로 생각했다.     

잠시후에 경찰들이 도착했다. 경찰복을 입고 들어선 그들은 서로 자기들이 잘했다고 주장을 듣고 여기서는 판단 할 수 없으니 일단 경찰서로 가서 해결하자고 헸다. 그래서 경찰서로 향하게 되었다.     

경찰서로 가던중 이상한 일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어갔을 때 경찰의 품행이 아닌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 그들은 나를 위협하며 죽여버리겠다고 하며 강도로 돌변하였다. 그순간 내 생각에는 이들이 경찰이 아니라 경찰을 사칭하여 나를 민가에서 니오게 만들었고 폭력을 행사하여 돈을 빼앗고 죽이려 한 것으로 순간 판단하였다. 나는 거기서 잡히면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심한 공포로 잠을 설치게 되었다.     

나는 머리를 쓰기로 했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할 수 있는 현명한 행동이 필요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순간 도망갔는데 그 놈들이 뒤를 쫒아와서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20M 전방에 적들이 쫒아 오는데 갈길은 없고 눈앞이 깜깜했다.     

후방을 제외한 3면에는 약3M되는 높은 시멘트 담벽이 잇고 그곳을 틸출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탈출하지 못하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부분에서 심한 공포감으로 잠을 설치게 되었다. 그곳을 뛰어넘어야 살 수 있을것 같은데 ..... 고민하다가 잠을 깨게 되었다.     

이 꿈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

최근에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되는 꿈은 없었다.                                      





이전 10화 28~35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