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 nudge 이넛지 Jul 29. 2022

일하면서 느끼는 희노애락 속에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열망한다

하지만 어쨌든 내겐 에너지가 있었다. 이 에너지를 세상을 구하는 데 쓰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방향에 쓰기로 했다. 귀한 에너지를 그저 증발시키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염지원, <IT회사에 간 문과 여자>, 2022


최근 몇 개월 사이 다양한 스타트업을 만날 일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들과 함께 협업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일은 꽤나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다. 마치 내가 VC(벤처캐피탈) 직원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투자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협업을 고민한다는 것은 어쨌든 새로운 비즈니스를 파악하고 그들과 동행할지 결정하는 일이니까.



신뢰, 처음 시작의 느낌

우선 첫만남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느냐, 이것은 대부분 첫만남에서 결정되었다. 왜 이러한 비즈니스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로드맵이 무엇인지 듣다보면, 비즈니스보다 이 사업을 하고 있는 대표가 눈에 들어왔다. 대표가 쌓아온 이력은 어떤 스토리를 추측하게 하는데, 그 스토리가 타당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비즈니스에 빠져든다.

 

내가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판단을 할 때에는 굉장히 감성적인 사람이 된다. 내가 투자 심사역이 아닌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떠한 협업을 할 수 있을지 그들의 제안을 검토하고 내부적으로 가능한지 타진한다. 그들은 단순히 내가 그 제안에 응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로서는 내부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추진해야하기에, 내 에너지 또한 굉장히 많이 소요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추진할 때 쾌감을 느낀다. 그렇게 또 새로운 일을 사부작거리며 시작한다.



열정의 온도를 맞추는 순간

어느날 협업하는 회사의 실무자가 내게 물었다. '혹시 이 일이 KPI에 포함되나요?' 당연히 그렇지 않다. KPI항목에 내가 얼마나 많은 회사와 협업하는지 포함되지 않는다.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하냐고 묻는 물음에 순간 당황했다. 오히려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이 일에 나만큼 임하고 있지 않은 거냐고 하마터면 따져 물을 뻔 했다.


대표의 비전이 아무리 좋아도, 실행하는 사람은 실무자다. 스케치만으로 일을 진행할 수는 없다. 대표의 제안에 넘어간다 하더라도 실무자가 제 역할을 다 해내지 못하면, 신뢰가 이내 실망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한 순간을 여러 번 맞이했다. 그리고 나 또한 실무자이기에 입장을 바꿔 생각했다.


회사 브랜드를 보고 처음에 찾아와도 결국은 나를 얼마나 믿고 진행하느냐로 귀결될텐데, 그래서 나 때문에 실망하게 되는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은연 중에 그들이 언급하는 해외 사례나 내가 몰랐던 것들은 반드시 메모해서 찾아보고 공부를 해둔다. 그들이 알고 있는 수준의 눈높이에 내가 맞춰야 그들 눈에 내가 프로페셔널하게 보일테니까.


그렇게 몇 차례 만나다보면 그들도 나를 신뢰하게 된다. 내가 어떻게든 이 일을 되게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느낄 때, 그들이 처음 기대했던 바에 최대한 부합하기 위해서는 내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될 때.


그렇게 열정의 온도를 서로 맞춰가는 순간,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구나 싶다.   

 


열심히가 아니라, 잘 하는게 중요해

내가 존경하는 회사의 누군가는 늘 말했다.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잘' 하는게 중요한거야." 열심히는 기본이라는 그는 가끔 내게 잘 살고 있냐고 묻는다. 그럴 때면 내 대답은 '열심히'부터 튀어나왔지만, 3초 뒤에 '잘' 해야죠, 라는 대답이 이었다.

 

그런데 잘 하려면, 나 혼자만의 에너지로는 되지 않는다. 회사 간의 협업은 특히나 서로 신뢰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연소되기 마련이다. 상대방이 어떻게 임하느냐에 따라 내 의지가 불타오르기도 하고 사그라들기도 한다. 또한 리더의 추진력과 결정이 필요할 때도 있다.


작년에 열심히 협업했던 회사는 실무자와 나, 둘 사이의 으쌰으쌰 해보겠다는 에너지가 강했지만 결국은 실무자가 변경되면서 매듭을 짓지 못했다. 실무자간의 상당한 전우애만 쌓였을 뿐, 이룬 것은 없었다. 열심히는 했지만 '잘' 하지 못했던 케이스, 이러한 기억이 모이고 쌓이면 나는 '잘'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에너지가 업력으로 전환된다면

어쩌면 나는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과몰입했는지 모른다. 열심히와 잘 하는 것이 동시에 성립하면 참 좋으련만, 내 에너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의 귀한 에너지까지 몽땅 쏟게 하고서는 일이 매듭지어지지 않을 때에는 내 탓인가 싶다.


내 에너지와 남의 귀한 에너지까지 썼던 모든 일들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다음 업무를 추진할 때 참고해야 한다. 그래서 기록과 학습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레이 달리오가 <원칙>에서 말한 것처럼.


학습은 우리가 결정을 내리고 결과를 얻은 후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실시간으로 지속되는 피드백 순환 고리의 산물이다. - 레이 달리오, <원칙>, 2018


물리학에서는 물체의 에너지가 다른 종류의 에너지로 변환되어도, 항상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게 보존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있다. 일하면서 쓰이는 내 에너지도 증발하지 않고, 업력으로 변환될까? 한 우물을 파는 전문직 역량만 업력이라는 꽉 막힌 생각에서 벗어나니, 내 에너지가 다양한 변수와 조화를 이루며 업력으로 전환되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일에서 맥락을 찾고 보편타당한 일의 함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나의 업력으로 쌓아올리는 것, 직장인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닌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일하면서 쓰이는 내 에너지가 업력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온갖 희노애락을 겪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뢰, 열정, 분통과 같이 열감을 가지고 있는 이러한 단어들이 실상은 내가 일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의 언어라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우리의 에너지는 전환되고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열심히'라는 과정 없이 '잘' 되는 결과론은 나오지 않는다. 열심히는 기본이고, 라고 말하는 선배가 한없이 냉정하게 느껴졌는데, 지나고보니 그 역시 너무 최선을 다해서 오히려 나에게 그렇게 담담하게 말했나싶다.


나는 언제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잘 하고 있어요, 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질척거리는 직원이 된 것 같은 기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