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부> 맹자님 인간이 善합니까?
11. 박 병장에 대한 <판결문>
<피고인은 소속대 탄약병으로서 1969. 5. 1. 05;00경 피고인의 세탁물을 세탁하여 피고인이 근무하는 탄약고에 널어놓고 제57탄약중대로 탄약 수령 차 갔다가 동일 22:00경 소속대로 귀대했을 시 소속대 ‘인사계 상사 ’ 이모 선임’으로부터 세탁물을 탄약고 위에 널어놓고 다닌다는 구실로 몽둥이로 수회 구타를 당한 데 대한 억울함과 평소 피고인의 불우한 가정환경에 대한 불만 등으로 자신의 현재의 위치를 비관하고 자살을 할 결심 하에,
동년 5. 2. 04:40경 피고인이 가지고 근무하던 칼빈 엠완(M1)(총번 459742)과 전시 총에 삽탄 되어 있던 탄창 1개를 가지고 소속대 부근에 있는 세칭 제600 고지에 이르러 자살하려고 하였으나
1) 피고인이 군대 입대하기 전인 1965년경 피고인의 주거지인 경기 강화군 양서면 인화리 거주(북괴에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어부) 한모(당 23세)로부터 북괴 지역이 살기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실,
2) 1969. 2. 중순경 소속대 부관 최모 중위로부터 정훈교육시간에 1970년도에는 북괴 김일성이 남북통일을 하여 청와대에서 환갑잔치를 한다는 허위의 선전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들은 바를 상기하고,
3) 피고인이 월북하여 북한에서 돈을 많이 받고 간첩교육을 받은 후 남파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6. 25. 사변과 같은 전쟁이 발발하면 인민군으로 입대하여 다시 대한민국에 남하하여 가족을 만나 잘 살아보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4) 1969. 5. 2. 10:00경 전시 제600 고지에서 적진인 북괴지역으로 도주할 것을 결의하고,
5) 5. 4. 03:05경 추위와 기근으로 민가를 찾던 중 남방한계선으로부터 약 150미터 남쪽에 위치한 제15사단 수색중대 제1소대 본부를 발견, 밥을 얻어먹기 위하여 접근타가 보초 근무 중인 일병 최모에게 발견, 검거됨으로써 미수에 그쳤다.>
박병장은 ‘적으로의 도주 미수’라는 기소 이유가 사실이 아니라고 어떤 고문이나 폭력 앞에서도 오직 정신력 하나만으로 굽히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었다.
그는 당시 ‘5분 대기조’로 시달리면서도 군 복무에 충실했던 한 국군 장병이었다. 또한 부모님께는 더 없는 효자였다.
박 병장, 그의 판결문에 이름 석 자가 그대로 적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인사계 상사 이모 하사’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고 헌병대로 고발, 15일간이나 영창을 신청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진 단순 ‘탈영(?) 사건’에서 ‘부대 복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수사를 맡은 보안대 수사관들은 추위와 배고픔보다 더 큰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를 향해,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적진 ‘북으로 도주 미수자’, ‘빨갱이’라고 단정짓고 그렇게 몰아갔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에게 주어진 무소불위의 힘으로 옳고 그름, 인정사정 두지 않고 오직 그들이 요구하는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끝도 없는 폭력으로 한 젊은이의 신체, 몸은 물론 그의 인격마저 무참히 짓밟았다.
박병장, 그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죽음까지도 무릅쓰며 끝까지 아니라고 버텼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결국 1969년 6월 30일, 제2군단 보통 군법회의 법정에서 ‘사형(死刑)’이 구형되었다. 그리고 3∼40분 정도 정회하였다가 다시 열린 공판에서 앞의 <판결문>에 따라 그들은 박병장을 ‘적으로 도주자’에서 ‘적으로의 도주 미수(未遂)’죄를 적용 ‘무기징역(無期懲役)’을 선고하였다.
그 후 그는 헌병대 남한산성에 있는 육군교도소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항소심과 대법원 재판을 받게 된다. 그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본인의 그 억울함을 호소하고 두 차례 항소를 했지만, 그들은 끝내 그의 억울함을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고 그의 범죄사실과 한 번 선고된 형량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적으로의 도주 미수죄>로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에서까지 ‘무기징역’을 최종 확정, 선고한 것이다.
박병장으로서는 온몸으로 애써 버텨보았지만 결국 이렇게 되고만 것에 그저 참담할 뿐이었다.
당시 재판을 맡은 군 검찰관들은 오직 폭력과 거짓으로 작성된 기소장에 따라 자기들 눈앞에 있는 ‘무고한 한 젊은이’에게 그들이 주장한 그대로 당시, 군 검사는, ‘북으로의 도주자’, 소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을 구형하였고, 판사는 그에게 베풀 듯, 가볍게 망치를 세 번 두들겨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