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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an 02. 2024

시계

쉰 번째 시

2023. 1. 19.

김남조, ‘시계'

시집 <충만한 사랑(2017)> 중에서


[시계]


그대의 나이 구십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시계는

즐겁게 한 판 웃었다


그럴 테지 그럴 테지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그쯤이 정답일 테지……

시계는 쉬지 않고

저만치 가 있다.



   구십이 되면 (될 거라고 생각하나 자네) 어떤 소망을 품게 될지 궁금합니다. 이십의 소망과 사십의 소망은 많이 달랐거든요. 많이 편안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살면서 더 편안해질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또 튀어나올지 흥미진진합니다.


   ‘속(俗)’에도 ‘성(聖)’ 못지않은 아름다움이 있고, 성(聖)이 쉽게 갖지 못하는 편안함이 있지요.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을 강조하는 시였으면 아이고 그러시군요, 하면서 코를 쓰윽 훔쳤을 텐데 부귀영화 쪽으로 가니 덩달아 시계처럼 즐겁게 웃게 됩니다. 그래도 사랑을 제일 앞에 두는 마음이 찡하고 아름다웠어요.


   누구나 공평히 심장에 차고 있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듣게 해주는 시였습니다. 참고로 이 시는 노(老) 시인께서 만 구십 세가 되어 열여덟 번째 시집을 펴내면서 담은 시였지요. 시인의 시계는 6년을 더 반듯하게 움직이다 2023년 10월에 멈추었고요.  


   아끼는 사람들의 심장 소리 듣는 걸 좋아해요. 새해 첫날 일어나자마자 엄마를 찾아와서 꼭 안기는 아이의 작고 귀여운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마치 제 안에서 새해의 첫 해가 동그랗게 떠오르는 것 같은 충만감을 느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집 이름이 <충만한 사랑>이군요.) 아이를 꼭 안고 콩닥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올 한 해도 열심히 뛰어줄 내 주변의 심장들에게 다정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제 심장도 포함해서요. 그 기특한 녀석들이 놀라지 않게, 기쁨으로 세차게 뛸 수 있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듯 심장도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올해 쓸 글들이 그렇게 누군가의 심장에 가만히 손을 대주는 그런 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
다시 하나씩 보고 있자니 웃음이 또 납니다. 누군가의 소망을 듣는 것은 참 간질간질 기분 좋은 일인 것 같아요.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정명희 님의 책 <멈춰서서 가만히> 안에는 약사불 안에 봉안되었던 발원문이 적힌 붉은 비단을 마주하던 순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여 명의 고려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글씨체로 빼곡하게 적었다는 소망들. 거기에서도 제 마음을 더 움직였던 것은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 아니라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등불이 되어 비추고, 질병의 고통이 있는 곳에서는 의왕(醫王)이 되시고, 고통의 바다에서는 배가 되어 건너게 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보다는 "두 살배기 어을진이 장수하기를 발원합니다." "내은금의 딸이 오래 살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소망 말이죠. 그렇게 수천 년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소원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도 먹먹했는지요.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시계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실 건가요? 이 시를 읽는 분들 마음에 좋은 소망의 씨앗이 심기고, 그것이 한 해 동안 무럭무럭 자라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가끔은 시계의 말소리에 귀 기울이며 걸음걸이를 차분히 정돈하시기를요.


   어릴 적에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익혔듯이, 중년이 되면 이제 내 안에서 재깍거리는 시계를 제대로 보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겠죠. 내가 몇 시쯤 되었는지 시간을 확인하는 일. 그에 맞춘 소망을 품어보는 일. 시계를 제대로 보고 놀라지 않는 일. 무엇보다 변함없이 재깍거리는 시계에 고마워하는 일. 마침 새해 첫날 하기 좋은 일들이네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고마운 분들께 새해 인사 전합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 저의 소망은 여유와 정돈, 그리고 부드러운 관절입니다. 


저희 집 떡국에는 늘 계란꽃을 세 송이씩 넣습니다. 올해는 특별히 꽃잎이 풍성한 꽃으로 골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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