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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an 31. 2024

Weltschmerz: 이 통증의 약은 무엇일까

   벨트슈메르츠(der Weltschmerz, 벨슈메어츠에 가깝게 발음한다). 영어로 'world-pain'이라고 직역되는 이 단어를 처음 봤을 때 이 어마어마한 단어는 대체 뭐지 싶었다. 세계적 고통이라니, 이런 단어가 있다고? 세계대전이나 전염병 같은 건가? 호기심이 생겨 찾아보니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은 아니고 문학 용어였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차갑기 그지없는 거대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 밀려드는 고통과 슬픔. 다시 말해서 나의 주체성과 자유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현실이 있고, 그런 현실의 파도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속절없이 휩쓸리는 모래알 같은 내 모습에서 오는 마음의 통증을 말한다. 독일 낭만주의 작가 장 파울(Jean Paul)이 1827년 소설 《셀리나(Selina)》에서 처음 이 단어를 썼고, 단어 자체의 유무와는 별개로 하인리히 하이네, 알렉산드르 푸시킨, 너새니얼 호손, 오스카 와일드, 폴 발레리, 헤르만 헤세, 존 스타인벡 등 수많은 문학가의 작품에 형상화되었다. 유명한 고전의 주인공들은 누구나 이 벨트슈메르츠를 껴안고 있으니, 어마어마한 이름들이 이 단어 아래로 모이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세상.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에게 이것은 진리에 가깝다. 그것도 나의 죽음뿐 아니라 너의 죽음이 내 차선으로 깜빡이도 켜지 않고 끼어드는 우리의 인생이라면 더더욱. 요가에서 가장 편한 자세라고 하는 사바아사나(Savasana)를 우리말로 '송장 자세'라고 한다. 송장처럼, 시체처럼 누워 눈을 감은 자세가 제일 편한 자세라는 것은 그저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을 뜨고, 중력을 거슬러 일어나 앉고 걷는 이 모든 게 실은 '편안하지 않은' 자세란 말이다. 삶은 기본적으로 불편과 통증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런 삶을 우리는 사랑한다.


   갓난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자지러지게 우는 것은 인생이라는 오페라의 서곡(overture) 같은 걸지도 모른다. 폐로 첫 호흡을 하게 된다는 이유도 있지만, 세상에 놓이는 과정에서 느끼는 첫 정서가 불안감과 충격이기 때문에. 호흡만의 문제라면 짧게 울고 멈춰야 하는데, 연약한 어린 생명은 하염없이 운다. 나이가 들고 몸이 커져도 세상 속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다. 그래서 계속 운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다고, 돈과 명예가 있고 친구가 많다고 해서 벨트슈메르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통증은 눈 녹듯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발현 시기를 기다리며 잠복하고 있는, 인류의 유전적 결함 같은 것이다. 아니, 결함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은 것 같고 그보다는 삶의 조건에 가까운, 태생적으로 심장에 박혀있는 못 같은 것이라고 할까. (제길.) 그 아픔에 다소 무딘 사람이 있고, 아주 예민한 사람이 있다.


   세상에 내던져진 자로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통증. 이 통증의 약은 무엇일까? 태생적으로 예약된 아픔이라면, 고통에 대한 서술보다는 약을 찾는 쪽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어 주섬주섬 떠올려 본다.


   세상의 잔인함에 상처받은 영혼들이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일단은 불평불만이 떠오른다. 담아두지 않고 꽥 소리 지르는 것. 제일 쉬운 방법이기도 하고, 독일사람들의 특기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살다오니 더 특별히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미국인들은 주로 칭찬으로 스몰토크(small talk)를 시작하는 반면 독일인들은 누군가 쏘아 올린 불평에 자신의 불평을 한 마디씩 보태며 낯선 이들과 유대감을 나눈다는 점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그 옷 어디서 샀어요?" "귀걸이가 참 예쁘네요." "아기가 너무 사랑스러워요." 같은 보드랍고 긍정적인 말로 하하 호호, 미소의 그물을 엮는 게 미국인이라면 독일인들은 "여기 사람들 길게 줄 선 것 안 보여요?" "맞아요, 남도 좀 생각합시다!" "나 원 참."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불만 가득한 눈빛을 교환하면서 하나가 된다. 반짝 빛났다가 사라지는 칭찬과 미소의 그물보다 "저기에 나쁜 놈이 있다, 모이자!"하며 불평으로 하나 되는 이 연대감의 그물이 왠지 더 질겨 보인다. 미국 사회의 공기가 "왓 어 원더풀 월드, 위 아 더 월드"였다면, 독일 사회의 공기는 "세상이 왜 이 따위야, 낄낄." 이런 느낌이랄까.   


   어릴 때부터 상대의 눈치를 보고 기분 상하지 않게 돌려 말하는 기술을 자연스레 익혀온 조선의 셋째딸인 나는,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고 그걸 드러내기를 꺼리지 않는 독일인들이 신기하다. 에헤헤주의자로서 솔직히 그들의 무뚝뚝한 표정과 태도에 상처도 종종 받는다. 기본적으로 비판과 논쟁을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면 독일에서의 삶이 꽤 힘들 수도 있다. 한 반의 학부모들이 처음으로 담임 선생님을 만나는 자리인 엘턴아벤트(der Elternabend)에서 사람들이 선생님과 학교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어필하는 경우도 종종 봤다. 독일어를 잘 못 알아듣는 귓구멍을 가졌기에 더욱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동공에 닥친 지진을 관리하다가, 마지막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두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내가 못 알아듣는 사이에 모두 초고속 화해를 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독일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지적질과 불만에 그다지 깊이 상처받지 않는 듯하다. 나를 향한 불만이 당연히 달갑지는 않겠지만, 할 말은 하고 잘 싸운다.


   더 중요하게는 논리와 감정을 절연하는 능력이 있달까. 우리는 흔히 내 의견에 대한 반박을 나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불만과 도전으로 여긴다. 그래서 곧바로 "당신 몇 살이야!"가 솟구쳐 나오거나 "어쩜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가 주르륵 쏟아지는 것이다. 너의 논리를 부숴주마, 하나하나 탈탈 털어가며 입씨름을 하고 난 독일사람들이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치 간밤에 화해한 연인처럼 미소를 주고받는 건, 독일사람들이 소시오패스라서가 아니다. 이들은 네 의견에 대한 반박은 너에 대한 내 감정과는 다르다는 태도를 가진 것 같다. 그리고 이건 굉장히 중요한 싸움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소리를 꽥 지르고 맞붙어 싸우기. 논리와 감정 사이에 선 긋기. 누군가의 부정적 평가를 나 자신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 쉽게 치환하지 않기. 이게 세상이 우리를 거칠게 대할 때 가져야 하는 첫 번째 자세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이게 잘 안 된다. 뭐 괜찮다. 이럴 땐 독일의 거친 맥주가 세상을 보드랍게 만들어 주니까. (사실 벨트슈메르츠에는 술만 한 약이 없다 싶지만 너무 주정뱅이 같으니까 좀 참기로 한다.)


   두 번째 자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이라는 세상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태도를 꼽고 싶다.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은 독일 사람들이 유독 너그러운 부분이 있다면 날씨다. 독일 날씨는 우중충하기로 악명이 높다. 여기 살다 보니 독일에 왜 그토록 고뇌하는 철학자가 많았는지, 독일인들이 왜 최초로 아스피린이라는 두통약을 만들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겨울은 끝없이 이어지고, 일주일 내내 행여 햇살 한 줄기라도 샐까봐 촘촘히 비 소식이 이어지는 일기예보도 자주 본다. 그렇게 며칠 내내 강풍을 동반한 진눈깨비가 쏟아지면 세상은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진흙탕이 된다. 한국의 4월은 벚꽃이 흩날리는 보드랍고 환한 달이건만, 독일의 4월은 지옥 훈련 기간이다. 아프릴베터(Aprilwetter), 즉 '4월 날씨'라는 속어가 생길 만큼 변덕이 심한데,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날씨를 경험하다 보면 "세상이 왜 이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침에는 패딩을, 점심 무렵에는 반팔을, 저녁에는 흐르는 코를 닦으며 목도리를 찾게 되는 롤러코스터 같은 날씨. 옷은 껴입었다가 벗기라도 하지, 아침에 신었던 털신발을 점심에 보면 이 신발을 찾아 신었던 아침의 내가 미친놈처럼 느껴진다. 우박은 또 어찌나 자주 내리는지. 우박이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와, 저걸 제대로 맞으면 머리에 구멍이 나고 피가 솟구칠 것 같다.


   그런데 앞서 밝혔듯이 독일 사람들은 유독 날씨에 만큼은 별로 불평불만이 없다. 비가 와도 웬만해서는 우산을 쓰는 법이 없고 비가 와야 농사가 잘 된다고, 생명들이 잘 자란다고 무척 관대한 얼굴을 한다. 비가 오는 날에도 우비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엉덩이에까지 진흙이 무지하게 튄다) 워낙 이 나라에 별로 재미있는 게 없어서 저렇게라도 수중 스포츠를 즐기는 건가 싶기도 하다. "날씨란 건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거기에까지 불평할 수는 없어." 나는 불평불만 1급 자격증 소지자인 독일인들이 날씨에 만큼은 꽤 관대한 것이 마음에 든다. 불평할 수 있는 부분, 고칠 수 있는 부분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자연의 힘 앞에서는 미소를 띠는 것.


   "당연하지(Natürlich, 나튀얼리히)!"라는 말은 자연에서 왔다. 자연스러운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이 거지 같은 날씨도 당연한 것이다. 멀지 않은 이웃 동네에 가끔 술친구로 만나는 한국인 물리학자가 산다. "제가 물리학자로서 내세울 것이 있다면 외모뿐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이 유쾌한 물리학자에게, 독일에 살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단어가 있었는지 묻자 바로 이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튀얼리히(Natürlich)! 저는 이 단어가 가장 재미있고 신기해요.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데, 당연은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에서 오는 거죠." 그러고 보니 우리의 당연(當然)이라는 말속에도 자연(自然)의 연(然) 자가 들어간다. '그러할 연(然)'을 숨겨놓은 '당연'보다는 자연(die Natur)을 전면에 내세운 '나튀얼리히'가 우리에게 불평불만의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하는지 더 잘 알려주는 것 같다.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과 종심(從心), 그 모두가 실은 '당연은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다른 말들이다.


   누가 나에게 벨트슈메르츠라는 통증의 약을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불평불만도 좋고 당연도 좋은데, 무엇보다 행복과 불행이 이어져있음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리학자가 자연법칙에서 당연스러움을 보듯이, 철학자들은 행복과 불행이 실은 이어져있음을 끊임없이 밝혀왔다. 한 천체물리학자는 진짜 돌아버릴 것 같을 때 지구도 그렇게 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될 거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하는 방식으로 벨트슈메르츠를 껴안는 법을 자연스럽게 모색하고 있나 보다. 우리는 불행을 다른 불행으로 덮으며 힘겹게 나아가기도 하고, 하얗고 빨간 거짓말을 약처럼 먹고 먹이며 살기도 한다. 거짓말이 절대악은 아니다. 악이 아니라 오히려 약이 될 때가 있다. 순한 자기기만, 긍정적 착각, 작은 꽃봉오리 같은 거짓말은 삶을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해 주니까.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치료법은 '이어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치철학자로서 내가 벨트슈메르츠를 껴안는 방법이다. 행복과 불행은 물과 기름처럼 정확히 나뉘는 것이 아니라 구분이 불가능한 하나의 덩어리에 가깝다. 무엇보다 나의 행복은 너의 불행을 먹고 피어날 수도 있다는 아찔한 사실을 우리는 가끔 잊기도 한다. 행복은 혼자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을.


   정유정 작가의 소설 《완전한 행복(2021)》은 행복에 이르고자 불행의 요소를 모두 제거하려고 했던 한 여자의 이야기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소설 읽으실 분은 이 단락 건너뛰세요!)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단단하고도 완전한 행복의 이미지가 있었고, 거기에 반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것이 애인이든 남편이든 아버지든 제거해버려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에게 살인은 '행복을 향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왜?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잖아." 흔히 할 수 있는 이 말을 책 속 등장인물 신유나의 입에 넣어보면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친다. 나에게 행복이었던 네가 어느새 내게 불행이 되는 일, 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이 가끔은 양립할 수 없는 형태로 구성되는 일은 종종 발생한다. 이 소설은 그렇게 행복과 불행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 특히나 우리 개개인의 행복과 불행은 무척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기괴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깨우쳐 준다. 작가의 말에서 정유정은 "한 인간이 타인의 행복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타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썼다. 세상은 너만의 행복을 찾으라고 소리 높여 말하지만 사실 나의 행복이란 얼마나 타인과 직결되는 문제인가. 나의 행복이 나만의 행복일리 없다. 개인은 모두 고유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나 나만 특별하고 나만 행복할 수는 없다. 실은 이것이 우리가 벨트슈메르츠를 마음 깊이 느끼게 되는 이유다.


   고통과 불안은 인간 삶의 조건이기 때문에 완전히 제거할 수가 없듯이, 행복을 위해서 불행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쩌겠는가, 그냥 살아야지. 앞서 등장했던 발레리와 푸시킨의 시구처럼,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런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 결론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독일인들처럼 입을 내밀고 불평을 하고 싶다면, 그야말로 행복해지기 위한 약인 '소마'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1932)》의 배경은 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고민이 있을 때 소마라는 약을 먹는다. 열 가지 우울증을 치료하고, 호르몬과 젊은 피를 수혈해 주는 약이다. 사람들은 이 약을 찬양한다. 주말에는 반 그램, 휴일에는 일 그램, 호사스러운 동방으로 여행하고 싶으면 이 그램, 달나라의 영원한 암흑 속에서 잠자고 싶으면 삼 그램. 그곳에서 돌아오면 혼란의 터널은 사라져 있는 것이다. 한편 옛 방식대로 아기를 낳고 자연 그대로 늙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살던 존 세비지는 그런 문명 세계를 동경했다가, 소마를 20그램이나 먹고 환각 상태에 빠졌던 어머니 린다의 죽음을 마주하고 충격에 빠진다. 그는 소마를 배급받기 위해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소마는 행복을 주는 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외친다. 그러다 체포되어 총통 앞으로 끌려간 존이 "인간으로서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장면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다. 늙고 추악해지고 병에 걸릴 권리를, 배고플 권리를, 내일이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며 살아갈 권리와 온갖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를, 존은 요구한다.


   행복하기만 한 세상은 과연 행복할까? 이 소설은 걱정을 거세하고 불행을 잘라낸 결과로 얻은 행복이 진짜 행복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행복은 그렇게 과학과 통제에 의해 알약처럼 생산되는 게 아니라는 진실을.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정말 불행할 권리가 필요할까? 실은 불행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는 몹쓸 진실이, 벨트슈메르츠라는 통증의 숨겨진 발병 이유다. 사랑이 없다면 수많은 불면의 밤과, 지우고 싶은 흑역사와, 이별에 수반되는 눈물 콧물도 없을 텐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과연 사랑을 폐기처분 할 수 있을까? 불행이라는 늪을 통과한 인간이 행복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과연 소마를 선택할 수 있을까?  


   "아인말 이스트 카인말(Einmal ist keinmal)." 한 번 일어난 일은 전혀 없었던 일과 마찬가지라는 독일 격언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에서 남자 주인공 토마시가 곱씹는 말이기도 하다. 이 독일 격언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 뿐이므로 우리의 삶도 없었던 일이 된다. 인간 삶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우리의 인생이 단 한 번 뿐이라는 사실은 양쪽으로 튈 수 있다. 인생을 단 한 번 산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인생을 단 한 번 산다면 결코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면서 등장하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대비는 이런 의미다. 인생이 한 번 뿐이므로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이 무겁게 다가온다.


   가벼움과 무거움도, 행복과 불행도, 모두 이어져있다. 이 고약하고도 묘한 진실 앞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참고로 나의 선택은 '맥주 나라의 특별한 주문'이라는 앞글에 등장했던 말, "나, 단 프로스트(Na, dann Prost)!"다.



   다음 회차에 <독일에서 전하는 단어들> 마지막 연재글이 발행됩니다. 여름부터 시작해서 꽤 오래 끌었네요.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꾸역꾸역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힘내서 마지막 글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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