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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Feb 13. 2024

Habseligkeiten: 축복일 만큼의 소유란?

   프랑스어가 사랑을 속삭이기 좋은 언어라면 독일어는 고함치기 좋은 언어라고들 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제2외국어로 독일어와 프랑스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딱 저런 이유로 독일어를 골랐다. 사랑은 무슨, 고함을 지르자. 사랑에 무슨 말이 필요해, 말없이 눈빛으로 통하는 거지. 하지만 화는 이유를 들어 똑바로 내야 하잖아? 반항적인 사춘기 소녀는 몽롱한 발음으로 혀를 고문하기보다는 진취적인 느낌으로 침을 튀기고 싶었다. 무엇보다 “여자는 불어고 남자는 독어지.”라는 어른들 말씀에도 살짝 침을 튀기고 싶었다. 이제 중년의 아줌마는 안다. 사랑이 침묵과 동의어인 순간은 예외에 가깝고 대개는 침묵이 아니라 지긋지긋할 정도로 지속되는 대화이며, 기본적으로 소심한 인간은 지리산에서 십 년간 (음?) 독일어를 수련해도 누군가에게 고함을 치기 어렵다는 걸.


   어쨌든 독일어의 그런 이미지는 아직도 유효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독일어는 분노의 언어라고, 늘 화가 난 것 같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엄청나게 보드라운 단어도, 사랑스러운 단어도, 웃긴 단어도 많은 언어다. 독일에서 전하고 싶은 단어를 고르면서 우리말에는 없는 아름다운 단어를 한두 개쯤 소개하고 싶었다. 그렇게 단어의 보석함에 (독일어로 '어휘'를 뜻하는 보어트샤츠(der Wortschatz)는 단어(das Wort)와 보물(der Schatz)을 합친 말이다. 어휘는 곧 보물상자라는 이 단어도 참 예쁘다.) 손을 넣고 이것저것 매만지다 제일 먼저 골라낸 단어가 이 연재의 첫 글인 파이어아벤트였다.


   나머지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인 것은 합질리히카이튼(die Habseligkeiten)과 게보어겐하이트(die Geborgenheit)인데, 공교롭게도 2004년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독일어 단어를 꼽아 달라는 질문에 1,2위를 차지한 단어들이다. 3위는 리벤(lieben, 사랑하다)이었는데 이유가 깜찍하다. "It is only an 'i' away from Leben." 삶(das Leben)이라는 단어에 '나(i)'를 밀어 넣을 때 우리는 사랑을 한다는 말. 영어라는 세계에 독일어를 밀어 넣을 때 가능한 이런 해석은, 외국어라는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작은 선물이다. 외국어를 익히는 일은 만만치 않다. 특히 현지에서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그 나라 언어의 습득이란, 이국적 해변에서의 낭만적인 스노클링이기보다는 대개 고통의 바다에서 짠물을 마시며 헤엄치는 일이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반짝이는 진주를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우리는 그렇게 만난 보석들을 보어트샤츠에 담아둔다.   

       

   원래는 미소 없이 발음할 수 없는 단어, 게보어겐하이트를 고르고 싶었다. 든든함, 아늑함, 사랑, 친밀감, 열린 마음 같은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그야말로 도톰하고 보드라운 극세사 담요 같은 단어다. 완벽하게 안전한 기분이자,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믿음과 사랑을 나누는 느낌이라고 한다. 눈보라 치는 겨울밤, 부엌에서 빵 굽는 냄새가 솔솔 나는 훈훈한 거실을 상상해 보자. 거기에 흔들의자를 놓고, 그 위에는 편안하게 흔들거리며 함께 그림책을 보는 엄마와 아이도 배치해 본다. 엄마 무릎에 앉아 엄마가 읽어주는 책을 바라보는 이 아이가 느끼는 감정이 아마 게보어겐하이트에 가깝지 않을까? 미소 짓지 않고 이 단어를 발음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게보어겐하이트, 하고 입에 담아보니 정말 웃는 것처럼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렇게 괜스레 행복해지는 단어가 있다니. 그런데 이런, 막상 글을 쓰려니 거기까지였다. 너무 충족감을 느낀 나머지 완벽하게 안전한 기분으로, 미소를 지으며 흡족하게, 그만 쓰고 싶어지는 단어랄까. 단어의 품에 안겨 그냥 잠들고 싶어지는 느낌.


   반면에 합질리히카이튼은 이야기의 샘이 깊었고 자꾸 뻗어나가는 단어였다. 합질리히카이튼은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소유를 뜻한다. 소유의 물질성보다는 오히려 무언가를 소유하는 데서 오는 감정에 더 밑줄을 긋는 단어다. 나의 것. 내게 허락된 것. 괴테 인스티튜트가 내놓은 자료 속 예시에 따르면 여섯 살짜리가 호주머니에 든 것을 꺼내 자기가 모은 것들을 살펴보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라든가, 집을 잃고 어딘가로 가야 하는 사람이 챙겨 나온 몇 안 되는 물건과 그걸 가지고 나온 마음, 그런 것들과 연결되는 의미라고 한다.


   센티멘털한 느낌이 배어있는 소유. 우리말에는 적당한 단어가 없는 것 같다. (길 떠난 나그네의 보따리를 생각해 보긴 했는데, 물을 뚝뚝 흘리는 누군가가 나타나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애써 꾸려 넣은 서정성이 강물로 곤두박질친다.)  부(富)나 재산, 즉 자산의 측면이 아니라 영혼과 연결된 측면에서의 소유물. 세상이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와 관계없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소중하게 느끼는 물건들. 객관적으로는 보잘것없고 심지어 쓰레기에 가깝지만 나에게는 보물인 것들. 이를테면 좋아하는 사람이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다 내 책상 위에 두고 간 삼다수 뚜껑이라든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장아찌를 만들 때 즐겨 썼던 누름돌, 혹은 미드 <프렌즈>에서 레이첼이 간직했던, 로스가 처음으로 아침 식사를 만들어 침대로 가져다줬을 때의 계란 껍데기 같은 것. 나에게도 그런 것들이 많다. 누군가 내게 쓴 편지나 쪽지들을 모아 둔 종이 상자, 그 날 그가 만들어 준 풀꽃 반지와 신혼집 앞 겹벚꽃나무에서 떨어진 꽃송이를 눌러 말려둔 것, 아이들이 배시시 웃으며 빨간 볼로 건네주는 귀엽고도 무용한 것들.


   합질리히카이튼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니, 독일 사람들의 선물에 대한 태도와 이를 대하는 한국 사람 사이에 생기는 틈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앞서 선물에 관한 글에도 밝혔듯이 독일 사람들은 직접 만든 작은 것들을 귀하게 여긴다. 최근 한 이웃으로부터 귀여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용돈을 꽤 써서 친구에게 근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했는데, 돌아온 친구의 선물이 직접 만든 장식품이어서 아이가 다소 실망한 것 같았다고. 동그란 예쁜 얼굴에 바람이 빠졌을 것을 생각하니 살짝 웃음이 났다. 아마 선물이라는 단어를 두고 두 문화가 가치를 두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돈을 모으고 아껴서 소중한 사람에게 좋은 물건, 필요한 물건을 골라주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독일 사람들에게 받은 것들을 떠올려 보니 모두 직접 만든 것이거나 아주 작고 부담 없는 것들 뿐이었다. 어느 집 거실에서는 가족들이 한마디씩 쓴 롤링페이퍼 같은 게 든 액자를 본 적이 있는데, 시어머니가 주신 결혼 선물이라고 했다. 비싼 예물보다는 그런 것들이 더 빛난다고 생각하는 마음. 게쉥크(das Geschenk, 선물)와 합질리히카이튼이라는 단어 안에 든 그들의 마음을 느끼고 이해하려다 보니 어쩐지 삶이 은은하게 빛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참고로 내가 환장하는 선물은 밑반찬이다. 세상 제일 눈부신 선물이다.)


   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독일어를 배우러 주말마다 학원에 다닐 때, 같은 반에 시리아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나이 지긋한 부부가 있었다. 늘 동그란 모자를 눌러쓰고 있던 누르한은 누가 봐도 따뜻하고 기품 있는 여성이었다. 폭탄이 터지는 밤길을 걸어 도망치면서 하룻밤만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목이 다 맵도록 눈물을 펑펑 쏟았다. 시리아에 살 때 누르한은 학교의 부교장이었고 남편 오마르는 시장이었다고 했다. 그러니 그간 이루어 놓은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야 했던 그들이 챙겨가지고 나온 것, 그것이 합질리히카이튼에 가까울 것이다. 공부를 굉장히 잘했다는 누르한의 막내아들은 독일어를 하지 못했기에 대학에 갈 아이들이 진학하는 김나지움에 가지 못했다. 결국 가장 성적이 낮은 아이들이 가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눈시울이 붉어진 누르한 앞에서, 나는 한창 민감할 나이의 아이가 겪고 있을 좌절감이 어떻게 그 아이를 할퀴고 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려워 그 어떤 말도 섣불리 얹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챙겨 나온 것이 무엇이었든, 그들은 내면에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문화가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나는 그들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맹자의 문장 가운데 천작(天爵)과 인작(人爵)에 관한 부분을 좋아한다. 작(爵)은 '벼슬 작'으로, 작위(爵位)나 고관대작(高官大爵) 같은 말에 들어가는 글자다. 그러므로 천작(天爵)은 ‘하늘에서 내린 벼슬’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내면을 잘 지키고 닦아 자연적으로 존귀해지는 것을 말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을 구하여 얻은 것이므로 천작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반면 부(富)나 권력 같은 인작(人爵)은 남이 귀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인작을 얻고 잃는 것은 온전히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 의해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는 것을 가지고 그것이 진짜 나라고 생각하고 내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때부터 삶은 고통스럽고 공허해진다. 누군가 빼앗을 수 있는 것에 삶의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비록 모든 것을 등 뒤에 놓고 떠나야 했지만, 누르한과 오마르가 내면에 가진 것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기를 바란다. 막내아들이 가진 총명함도, 그것은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에는 빛을 다시 찾을 것이다. 아마도 눈물에 씻겨 더 반짝이는 모습으로.  


   합질리히카이튼이라는 단어를 두고 하벤(haben, 가지다)과 젤리히카이트(die Seligkeit, 축복이나 구원)가 합쳐진 말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고, 젤리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동사를 명사로 바꿀 때 사용하는 접미사일 뿐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합질리히카이튼을 '축복이 되는 소유,' '축복이 될 만큼의 소유', '축복으로 여겨지는 소유' 등으로 이해하며 감탄한다. 세속적인 소유와 성스러운 하늘의 축복이 합쳐진 모양이라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냐고. 후자로 보는 사람들은 성과 속을 이어붙여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단어에 과한 환상을 가지려는 태도에 정색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후자 쪽의 태도에 더 매력을 느끼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축복으로 여겨지는 소유', '축복이 될 만큼의 소유'라는 이 묘하게 뭉클해지는 개념을 생각해 본다. 언어학적으로 여기에서의 젤리히카이트가 축복이든 아니든, 합질리히카이튼이 말하는 소유의 모양을 보면 그것은 축복이자 구원이 맞다. 엄마의 유품, 아이의 주머니에 든 무용하고 귀여운 보물들, 몇 가지 고를 수 없을 때 내가 꼭 챙기고 싶은 것,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의 축복이자 구원이 아니면 무엇이 그 단어를 대신하겠는가.


   최근에 이사를 했다. 공간을 비우고 다시 공간을 채웠다. 내가 가진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에 머쓱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백제본기에서 온조왕 때 지어진 궁궐의 자태에 대해 남긴 말이라고 한다. 발음이 부드럽고 뜻이 소담해서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인데, 이 말을 거울삼아 내 주변을 비춰보자니 부끄러워서 가출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사를 하면서 합질리히카이튼이라는 단어를 살펴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소한 마음으로 꼭 간직하고 싶은 것, 축복으로 느껴지는 물건들을 곁에 두는 마음. 잡지 <럭셔리>에서 "어떻게 사는 게 럭셔리하게 사는 걸까요?"하고 묻자 고(故) 이어령 선생은 "이야기 속에 살아라"라고 답했다고 한다. 주변에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가가 럭셔리한 삶의 기준이 된다는 말인데, 합질리히카이튼 역시 그 안에 든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맥이 닿는다. 이야기가 풍성한 물건들,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미소를 짓게 되는 것들, 그래서 마음에 위안을 얻고 감사하게 되는 나의 소유물들. 나의 작고 보잘 것 없는 축복들.

   나란 인간은 무소유의 경지는 넘보지 못하는 범인(凡人)이다. 미니멀리즘이니 정갈함 같은 것과도 거리가 멀다. 대신 사랑스런 물건들을 오래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다소 구질구질해도 이야기가 넘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합질리히카이튼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품고 주변의 공간을 매만져야겠다. 그러다보면 결국 게보어겐하이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20년 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독일어로 꼽혔던 두 단어를 곁에 두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독일에서 전하는 단어들>을 읽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많은 분의 생각도 듣고 글의 반응도 살필 수 있어서 제게는 참 좋은 기회였어요. 따뜻하게 전해주신 응원도 잊지 않겠습니다.

   이 연재는 책 초안의 일부입니다. 지금 언어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는데요. 상반기에 먼저 영어와 일본어, 하반기에 뒤따라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출간될 예정이에요.


   영어와 일어 편은 <긴 인생을 위한 짧은 영어 책> <긴 인생을 위한 짧은 일어 책>이라는 제목으로 3월 4일부터 17일까지 yes24 펀딩을 거쳐 3월 마지막 주에 출간된다고 합니다. 이 제목을 프랑스어와 독일어 편에도 적용할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하시네요. 영어 편은 <숲속의 자본주의자>, <오히려 최첨단 가족>, <도시인의 월든>의 박혜윤 작가님, 일어 편은 <언어가 삶이 될 때>, <지금 시작하는 평등한 교실(공저)>, <벨 훅스 같이 읽기(공저)>의 김미소 작가님이 맡으셨어요.


   저는 7월까지 이 독일어 책과 다른 단행본 원고, 둘을 동시에 마감해야 해서 계속 부지런히 쓸 예정입니다. 그 사이에 공저 한 권이 나올 예정이고요. 이 연재를 하면서 뺄 부분과 덧붙일 부분들이 명확해졌고, 여러분께 많이 배우면서 방향에 대한 고민도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잘 다듬고 새로운 챕터들 추가해서 좋은 책으로 내보낼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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