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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Oct 02. 2023

Gift: 선물은 독이 될 수 있다

   독일어를 배울 때 나를 혼란에 빠뜨린 두 가지는 관사와 영어였다. 가장 헛갈렸던 것은 홍길동이 변신술 쓰듯 오만가지로 변하는 관사들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헛갈렸던 것은 영어랑 비슷한데 의미가 전혀 다른 단어들이었다. 예를 들면 파스트(fast)는 빠르다는 뜻이 아니라 ‘거의’라는 뜻인데, 거의 죽었다는 걸 급하게 빨리 죽었다는 줄 알았다. 셰프(Chef)는 요리사가 아니라 보스, 즉 상사인데 누군가 자신의 상사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고(故) 이선균 씨를 떠올리게 된다.

봉골레 파스타 하나! 예, 쉪! 화면 속의 그가 그립습니다. © MBC (드라마 <파스타>)

   이히 빌(Ich will)은 I will이 아니라 I want고, 인과관계에 붙는 접속사 덴(denn)은 꼭 영어의 then처럼 들려서 인과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망치곤 한다. 그러니까 “Ich esse, denn ich habe Hunger.”라는 문장은 ‘나는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는다.’라는 말인데, ‘나는 먹는다. 그러면 배가 고프다.’ 같은 진정 나다운 문장으로 들리곤 하는 것. 봐페(Waffe)는 무기라는 뜻인데 자꾸 와플이 생각나서 마음이 관대해지고, 바트 잘쯔(Bad Salz)는 나쁜 소금이 아니라 목욕용 소금이며, LG는 삼성 친구 엘지가 아니라 리베 그뤼쎄(Liebe Grüße: '애정을 담은 인사를 전하며'라는 뜻), 즉 메시지나 이메일 끝에 붙이는 인사말의 축약형이다. 텍스트를 읽다가 “LG, Lena”를 보고 레나가 엘지 다니는 줄 알았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들을 오가면서 반대말 혹은 곤란한 말처럼 발음되는 단어들이다. 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운전 중에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나올 때마다 옆에서 반려인이 실실 웃는 거다. 이유를 물으니 라디오에서 자꾸 '존내, 존내(die Sonne, 해)' 한다고. 그 말을 듣고서 "Die Sonne scheint(디 존내 샤인트: 해가 빛난다)."라는 문장을 들으니 과연 해가 존내 비치는 느낌이 들었다. 존넨쉬름(der Sonnenschirm)은 파라솔이나 양산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같은 이름의 꽃도 있다. 한국에서 싫어하는 사람에게 건네주는 꽃으로 유명세를 탔다고 들었다.

사실 발음은 존넨쉬음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무척 쉬울 거라는 뜻으로 시험 보는 친구들에게 건네는 것이 어떨까요.

   '오예'는 영어에선 “앗싸(Oh yeah)!"인데 독일어로는 “저런...(Oje!)”하고 실망할 때 쓴다. 오예와 코미쉬(komisch, 코믹하고 웃기다는 뜻도 있지만 이상하다는(odd, strange)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의 조합을 자주 듣던 나는 독일인들이 진정 풍자와 해학의 민족인 줄 알았다. “Oje, das ist komisch.”라고 하면 “저런, 그거 이상하네…”인데 나에게는 “와, 웃기다!”로 들렸던 거다. '네(Ne)'도 영어의 'No'인 독일어의 나인(Nein)을 줄인 말이라 (이 때는 주로 눼, 니예, 처럼 한 대 때리고 싶은 발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포인트) 아이들이 ‘네’라고 대답하면 이놈들이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남성들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한다는 ‘오빠’는 여기서 잘못 발음하면 할아버지(Opa, 오파)가 되고, 할머니를 뜻하는 오마(Oma)는 발음해 보면 엄마라는 말과 꽤 비슷하게 들려서 애들이 길에서 “엄마!” 하고 큰 소리로 불러 사람들이 돌아볼 때마다 이 늙은 엄마는 가끔 제 발이 무척 저린다. 또 하나 멈칫하게 되는 단어는 그로스(groß). 크다는 뜻인데 아이들이 해맑게 “Mama, du bist groß!(엄마, 엄마는 크잖아!)” 할 때마다 영어단어 gross(역겨운)로 들려서 엄마가 그렇게 토 나오게 싫은가, 난데없이 슬퍼진다. 유아어로 카카(Kaka)가 똥이고 포포(Popo)가 엉덩이인 곳에서 “까까 먹을래? 그럼 엄마한테 뽀뽀.”라는 문장은 뭐랄까, 상당히 애정도가 급감하는 느낌이다.


   이런 대혼란의 와중에서도 화룡점정이 있었으니 기프트(das Gift)는 독일어로 독(毒)이었던 것.* 선물은 게쉥크(das Geschenk)라는 단어를 쓰는데, 기프트에는 선물이라는 뜻이 전혀 없다. 그걸 몰랐던 나는 글을 읽으면서 화학물질과 플라스틱이 왜 지구에게 크나큰 선물이 된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Giftpilz(기프트필츠: 독버섯)라는 단어를 보면서는 독일사람들이 워낙 버섯을 좋아하니 버섯 선물이라는 단어가 있나 하고 그야말로 버섯돌이 같은 생각을 했다. 기프트가 독이었다니. 그림 형제가 독일인이었음을 감안할 때, 노파로 변한 왕비가 백설공주에게 선물로 주고 간 게 독사과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나 보다.

플라스크가 휜 모습이 꼭 닭다리 같은 것을 보니 제가 지금 배가 고픈가 봅니다 © Disney

   독일어와 영어는 같은 게르만 어족인데 어떻게 양쪽에서 뜻이 이렇게나 달라졌는지 궁금해서 어원을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기프트의 어원은 ‘주다’라는 뜻의 동사 게벤(geben)에서 파생되었고, 독일의 대문호 괴테 때까지만 해도 기프트가 영어처럼 선물이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의미가 싹 사라지고 독이라는 뜻만 남았다고. ‘결혼 지참금’이라는 뜻의 밋기프트(die Mitgift: 독일어 mit은 영어의 with에 해당하므로 말 그대로 ‘가져가는 선물’이라는 뜻이 된다)에 기프트의 본래 의미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정도다.


(* 스웨덴에 사는 지인이 이 글을 읽고, 스웨덴어로 Gift는 결혼이라고 알려줬다. 이쯤 되면 유럽인들이 단체로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느낌이다. 결혼은 선물일까 독일까. 개인적으로는 선물도 독도 아닌 그저 무수한 삶의 옵션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글쎄.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지만 운전은 당사자들의 몫이 아닐까.)


   독일인들은 왜 기프트라는 단어에서 선물이라는 의미를 거두고 독이라는 의미만 남겼을까? 어떻게 이렇게 정반대에 가까운 말로 바뀐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생각했다. 꼭 반대되는 말은 아니구나, 지나친 선물은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 독 자체가 본래 양면성을 지닌 존재다. 뱀독이 약으로 쓰이기도 하고 마약성분이 진통제로 쓰이기도 하듯이, 원래 독과 약이 되는 것의 경계가 그렇게 물과 기름처럼 명확히 나뉘는 것은 아니다. 약을 과다 복용하면 독이 되듯이, 선물도 과하면 독이 될 수 있다. 영어 표현으로 재능 있는 아이를 'gifted child'라고 하는데, 우리는 재능이 독이 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본다. 아이의 재능에 목을 매는 어른들, 재능으로 삶을 일그러뜨리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는 세상에서, 그리고 지나친 선물로 구설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서, 세상에는 기프트를 독이라는 뜻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낯선 언어가 우리에게 건네는 삶의 지혜가 아닐까.*


(* 비슷하게,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에서 ‘옥’이라는 단어를 “보석이자 감옥이자 집”이라고 정의해 놓은 문장을 보고 그 중의적 의미에 새삼 감탄했다. 보석은 감옥이 될 수 있고, 집도 감옥이 될 수 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고 믿는 나에게도 '이런 부분은 참 다르구나' 하고 느낀 게 바로 독일의 선물 문화다. 내 경험의 한계인지 모르겠지만 독일에 살면서 휘황찬란한 선물을 본 적이 없다. 결혼이든 취업이든 출산이든 뭐가 됐든 간에 명품을 선물한다는 개념 자체가 희박하다. 직접 만든 조그만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크게 기뻐한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선생님 한 분이 이사를 가게 되어 이별 선물을 마련하기로 했는데, 아이들이 각자 그림을 한 장씩 그리고 예쁘게 꾸민 다음 메시지를 담아서 그걸 파일에 끼워 책처럼 만들었다. 선생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했다. 학기를 마치고 연말에 작은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학부모들이 돈을 걷는 경우에도 주로 동전 단위로, 원하는 만큼 낸다. 학부모 대표(반마다 매년 직접 선출한다)가 "이자벨 자리에 작은 주머니가 걸려있으니 그 안에 마음을 모아주세요"하고 알리면 거기에 짤랑짤랑 익명의 동전들이 모인다. 처음에 멋도 모르고 나 혼자 지폐를 들고 갔다가 분위기가 이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는 주로 꽃다발이나 작은 화분, 서점 쿠폰 같은 것을 선물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 바로 독일의 이런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 문화다. 아이들이 비싸고 휘황찬란한 것에 노출되는 일이 적으니 부모  마음도 넉넉해진다. 생일을 맞은 아이들은 반 친구들끼리 아이스크림이나 작은 머핀 같은 것을 하나씩 나눠 먹고, 모두가 작은 젤리 봉지를 하나씩 나눠 가지고는 좋아라 손에 들고 집에 온다. 추수감사나 파싱(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신나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기독교의 전통 축제) 같은 이유로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파티를 할 때면 교실 앞 작은 게시판에 리스트가 붙는다. 필요한 것들을 부모들에게 지원받기 위한 리스트인데, 정말 귀엽기 그지없다. 오이 하나, 바나나 두 개, 사과 세 개, 작은 소시지 네 개, 브레첼 한 개, 주스 한 통, 버터 하나, 치즈 약간, 꿀 약간. 독일은 식재료 값이 싼 편이라, 비싸 봤자 모두 2유로를 넘기지 않는 것들이다. 내가 가져오겠다고 바나나 두 개 옆에 이름을 적으면서 왠지 웃음이 나왔다. 오백 원쯤 되려나.  

바나나 두 개, 오이 하나, 파프리카 한 개...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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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연재 당시에 남긴 글인데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독일에서 전하는 단어들> 연재를 읽어주시는 여러분, 고맙습니다. 프롤로그까지 총 16화 연재 예정인데 딱 절반 왔네요. 즐거움 반, 고통 반으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제 브런치의 다른 매거진에 올려야 하는 글들이 너무 밀려 있어서, 다음 독일어 단어 연재는 한 주 쉬어갑니다. <고교 독서평설>에 연재했던 8월호 원고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어서 다음 주에는 그걸 올리고, 그다음 주에 이 매거진으로 다시 돌아올게요.


   실은 몇 달째 성실한 슬럼프를 겪고 있어요. 슬럼프지만 모든 마감은 여유를 두고 꼬박꼬박 지키는, 약간 변태 같은 슬럼프랄까요. 글 쓰는 것이 여전히 재미있고 즐겁기는 한데, 예전만큼 신나고 즐겁지는 않네요. 자꾸 제 글이 작아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가진 것은 성실뿐이니, 성실이 결국 흙탕물 같은 마음의 불순물들을 가라앉혀 주리라 믿어봅니다. 열심히 크고 작은 열매를 맺는 가을 풍경도 저를 도와주겠죠.


   모두들 맑은 가을하늘 즐기면서 평안하시기를요.

   선물로 저희 동네 무밭 풍경과 호수 사진을 보내드립니다. 달콤한 꽃향기까지 보내드릴 수 없어서 아쉽네요. 기쁘게 받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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