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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Oct 16. 2023

Kindergarten: 아이들을 위한 정원

   나는 예원유치원 토끼반 어린이였다. 우리 유치원에는 토끼반과 기린반, 딱 두 반이 있었는데 어쩌다 딱히 연관성 없어 보이는 토끼와 기린이 동물 대표로 반이름이 되었는지,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이제야 새삼 궁금하다. 토끼반이 위층, 기린반이 아래층을 썼는데 두 반 사이에 교류는 딱히 없었다. 제일 친했던 소꿉친구가 기린반에 배정되었지만 당최 만날 일이 없어서 서운했다.


   기린반 선생님은 토끼를 닮은 인상이었고, 토끼반 선생님은 오히려 사자 느낌이었다. 화려한 이목구비의 미인이셨는데, 머리를 당시 미스코리아들이 흔히 하는 사자갈기 스타일로 커다랗게 부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자머리의 우리 선생님은 토끼처럼 포근하셨고, 유치원은 내가 다닌 교육기관 중에서 제일 재미있고 신나는 곳이었다. 나는 춤추고 노래하고 만들고 그리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여러 가지 즐거운 기억이 있지만 딱히 기억나지 않는 것은 뛰어놀았던 기억이다. 우리 유치원에 앞뜰이나 작은 운동장이 있었던가? 어린 시절의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그 기억만큼은 가물가물하다. 미술시간에 옷이 더러워지지 않게 끼우는 팔토시 같은 건 있었지만 밖에서 놀기 위한 옷은 따로 없었다. 나는 엄마가 아침에 예쁜 원피스를 입히고 쫑쫑 땋아준 디스코머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헝클어지지 않은 단정한 모습으로 다시 집으로 배달되었다.


  독일에서 유치원을 다닌 내 아이들 모습은 무척 달랐다.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 일단 이 녀석들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부터 힘들었다. 아이들은 넓은 정원 곳곳에 숨어있었다. 언덕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거나, 뒤에 친구를 태우고 세발자전거를 질주하거나, 물놀이를 하다 수건을 깔고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는 그래도 찾기 쉬웠다. 하지만 잎사귀가 우거진 나무에 올라가 있기도, 정원 구석의 오두막집에 들어가 있기도, 자기가 파 놓은 모래 구덩이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한눈에 보이는 평평한 지형이 아니라서 언덕을 올랐다가 숲 뒤로 갔다가 하면서 자식 놈을 찾아 헤매고 있으면, 친구들이 귀여운 소리로 위치 정보를 알려주곤 했다.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거대한 지옥의 불구덩이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아이들은 한숨이 절로 나오는 꼬라지를 하고 있었다. 새벽 세 시에 감자탕 집에서 갓 나온 아저씨의 행색이거나, 머드 축제에 다소 수줍게 참가한 관광객의 모습이거나. 게다가 유치원 모래는 왜 그렇게 옷에 담아 오는지, 현관에서 겉옷과 신발을 벗으면 모래가 은혜처럼 쏟아졌다. 일주일만 모으면 해운대 백사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릎에 뿔이라도 나는가 싶게 바지에는 늘 통풍(?)을 위한 구멍이 생겼고, 모래는 그리로 더욱 신나게 출입했다. 신발은 빨아도 빨아도 '거지발싸개'란 이런 것이구나 깨닫게 만드는 모양새였고, 새로 산 장갑은 한 달이 못 되어 유치원 정원 한쪽 구석에서 장갑으로 보이는 사체로 발견되었다. 아무리 선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썼어도 아이들은 빵처럼 익어서 왔다.


   그런 거지꼴 아이들은 토마토처럼 빨간 얼굴로 뛰어나와서 열매와 깃털과 돌, 따모은 풀꽃들을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그리고는 조잘거렸다. 오늘은 하젤누스(die Hazelnuss, 헤이즐넛) 주워서 까먹었어. 오늘은 떨어진 사과를 주워서 바구니에 담았어, 한 삼십 개도 더! 엄청 큰 포크랑 빗자루로 선생님이랑 나뭇잎을 산처럼 모았어. 엄마, 유치원에 브롬베어(die Brombeeren, 블랙베리)랑 힘베어(die Himbeeren, 라즈베리) 있는 거 알아? 예쁜데 맛은 없어. 엄마, 깨끗한 눈은 먹어도 된대. 근데 아주 조금만. 그렇게 함께 집에 가는 길에 나에게 이런저런 걸 알려주었다. 엄마, 저 열매는 새가 먹는 거야. 우리가 먹으면 배가 아프대. 엄마, 이렇게 생긴 풀은 만지면 안 돼. 엄청 따가워. 엄마, 이렇게 생긴 나뭇잎이 달린 나무에는 카스타니에(밤처럼 생긴 열매)가 열려.  


아이들을 위한 정원

   유치원을 킨더가르텐(der Kindergarten, 실제 발음은 킨더가튼에 가깝다)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나는 독일에 와서 새삼 깨달았다. 킨더가르텐은 아이들(die Kinder)을 위한 정원(der Garten)이다. 수업을 위한 건물이기보다는 친구들과 뛰어놀 수 있는 정원. 책상에 앉아 학교 가기 전에 떼어야 할 것들을 열심히 배우는 곳이기보다는, 흙과 물과 풀이 어우러진 곳에서 온몸으로 구르고 만져보며 중요한 것들을 배우는 곳이었던 거다.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닫힌 공간으로 내몰리게 되는 아이들이 어릴 때만큼은 햇빛을 담뿍 받으며 바깥공기를 호흡할 수 있도록, 가르텐이라는 단어를 붙여둔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이들을 위한 정원, 아이들이 자라는 정원. 독일은 세계 최초로 유치원을 만든 나라다.


   독일에 와서 아이들을 유치원에 새로 등록하고 준비물 리스트를 받았는데 처음 보는 단어가 있었다. 마취호제(die Matschhose). 번역기를 돌려보니 Mudpants라고 나오는데, 대체 무슨 물건인고 싶었다. 알아보니 방수 재질의 놀이 바지였다. 여름에는 더우니까 안 입지만 봄가을에는 얇은 걸로, 겨울에는 두꺼운 걸로 장만해서 애들이 마치 교복처럼 입고 다닌다. 유치원에선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이걸 입혀서 사시사철 밖으로 내보내고, 아이들은 이걸 입고 파워가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운하를 건설하기도, 눈밭에서 뒹굴기도 한다.


   놀이 바지는 유치원에  늘 있어야 하는 아이템이고, 여름과 겨울엔 각각 물놀이와 눈놀이를  위한 준비물이 더해진다. 겨울에는 아이들이 사물함에 개인 썰매를 갖다 놓고 타기도 하고, 여름에는 수영복과 타월 세트가 필수. 꼬꼬마들이 잔디밭에서 각자 자기 타월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귀여움의 이데아랄까. 참고로 독일 놀이터에는 대체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어 아이들이 여름에 수영복 차림으로 동네 놀이터에 가곤 한다. 큰 모래사장에 물을 흘려 넣을 수 있게 수도시설이나 펌프가 있는 편. 그만큼 흙놀이와 물놀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이 다닌 유치원에서는 그날그날 기분 따라 하고 싶은 사람만, 하고 싶은 만큼 참여할 수 있게 정원 한쪽에 다양한 물놀이 시설을 만들어 두었다. 수영복은 입기 싫지만 손 넣고 물놀이는 하고 싶은 아이들을 위해서 찰랑찰랑 물을 담아 둔 거대한 고깔, 수영복을 입고 풍덩 빠질 수 있는 작은 풀, 그리고 축구를 하다가도 물을 맞을 수 있게 정원을 가로지르는 스프링 쿨러와 물놀이용 호스 등이 다양하게 아이들의 물놀이를 반겼다. 겨울에 유치원에 있는 작은 언덕에 눈이 쌓이면 꼬꼬마 눈썰매장도 개장했다. 유치원 교실 풍경만 기억나는 나와는 달리, 우리 아이들에게는 교실보다는 유치원 뜰의 기억이 더 크고 생생하다.

여름이면 개장하는 꼬마 수영장. 저희 첫째가 정말 미친 듯이 좋아했어요. 전생에 최소 미역이었나 봄.
유치원의 작은 언덕과 오두막집. 유치원에도 썰매가 있지만, 많지 않아서 차례를 기다려야 하므로 개인 썰매를 많이들 갖다 둡니다.

   바깥 놀이의 중요성이야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인데 문제는 어른들이 이걸 정말로 기쁘게 권하는지, 아니면 아이들이 더러워져서 내키진 않지만 좋다니까 시키는 건지, 이곳에 살다 보니 결정적으로 그 부분이 다르게 느껴진다. 며칠 강풍을 동반한 비가 오다가 해가 났더니 유치원 선생님이 정말 세상 행복한 얼굴로 "우와, 해다! 오늘은 밖에서 놀 수 있겠어!!!"하고 아이에게 진짜로 기쁜 듯 말을 걸어주실 때 느꼈다. 아, 진짜 해가 나서 밖에 나갈 수 있어서 되게 좋으신가 보다.  


아이들은 꽃과 같은 존재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

OO 유치원 OO 유치원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꽃동산


   어린 시절에 아무것도 모르고 얼굴에 꽃받침을 해 가며 불렀던 노래가, 최초의 유치원 설립자 프리드리히 프뢰벨(Friedrich Froebel, 1782-1852)의 마음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널리 알려진 교육학자인 프뢰벨은 1840년 독일 바드 블랑켄부르크에서 세계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었는데, "Kinder sind wie Blumen(Children are like flowers)," 즉 "아이들은 꽃과 같은 존재들"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그렇기에 잘 보려면 어른들이 허리를 굽혀야 한다는 뜻. 즉, 어른들의 눈높이와 아이들의 눈높이는 다르며,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교육법도 따로 존재한다는 함의가 있다.

   둘째, 아이들은 작은 꽃과 같아서 활짝 피어날 수 있게 잘 보살펴야 한다는 뜻. 정원사가 식물의 특성에 따라 물과 빛의 양, 적당한 비료 등을 고려해서 정성껏 키우고 가지치기도 해 주듯이, 교육자도 아이의 특성에 따라 잘 성장하고 피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모든 꽃은 그 자체로도 예쁘지만 다양한 꽃이 무리 지어 있을 때 황홀해진다는 것. 그러므로 또래 그룹 안에서 더 활짝 피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취학연령 전 단계의 아이들 교육에 헌신한 프뢰벨이, 유치원을 설립해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을 모아 함께 놀며 상호작용을 하게 했던 이유다.

   넷째, 화분에 심은 꽃보다 자연에 피어난 꽃이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가지를 활짝 펴듯, 아이들도 가두지 말고 맘껏 뛰놀게 해줘야 한다는 뜻. 유치원이 아이들의 정원, 즉 '킨더가르텐'이 된 이유다.

곱게 5:5 가르마를 하신 프뢰벨 선생님

   프뢰벨이 꿈꾸는 유치원은 '아이들을 위한 정원(a garden for children)'이자 '아이들로 이루어진 정원(a garden of children)'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정원'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뛰놀 수 있는 환경을 말하는 것이고, '아이들로 이루어진 정원'이라는 말은 함께 뛰놀고 어울릴 수 있는 또래 그룹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동네 유치원은 '정원'이라는 부분과 '또래 그룹'이라는 측면 모두에 밑줄이 그어진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전자는 이미 충분히 강조한 것 같으니 또래 그룹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독일 유치원의 중요한 테마는 '섞임'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동갑인 친구들로만 반을 구성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아직 대부분의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나이로 반을 가른다. 사실 나는 토끼띠인데, 예원유치원 토끼반 친구들이 모두 토끼띠인 것을 알고 눈이 동그래져서 놀라던 토끼 같은 친구가 있었다. 그땐 "우리는 운명이야!" 하면서 떠들었지만 운명은 무슨, 우리는 예전부터 "동년도 출생아(동년도 1.1~동년도 12.31 출생아)를 함께 반편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연령별 반편성을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독일에는 유치반인 킨더가르텐(Kindergarten: 3-6,7세)과 유아반인 크리페(Krippe: 0-3세)가 있는데, 터울이 있는 아이들을 섞어서 반을 구성한다. 아이들끼리 서로 자연스럽게 배려하는 법도 익히고, 도움을 청하는 법도 배우고,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도 해서 좋아 보였다. 작고 귀여운 애들이 더 작은 애들을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인류애가 콸콸 솟아난다. 동네 놀이터에서도 어린이들이 자기보다 어린아이들을 잘 배려하고 도와주는 태도가 몸에 익어 참 고마웠는데, 이런 시스템 안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이에 따라 획일적으로 반을 구성하게 되면 그 안에서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가 구별되기 마련이라 서열이 생기고, 모두가 낙오 없이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도 슬그머니 자리 잡는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섞어 두면 아이들은 늘 나보다 어린 누군가를 도와주고 가르쳐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얻고, 기본적으로 나이에 유연한 마인드를 갖게 된다. 반 친구들의 학교 예비반 활동이나 책가방의 날(Schulranzentag)*, 졸업식 같은 행사를 가까이 지켜보면서 내가 다음에 겪을 과정에 관해 미리 마음의 준비도 하고, 학교에 가더라도 같은 반 친구들이 상급반에 있어 반갑게 만날 수 있다.


* Schulranzentag: 곧 졸업해서 학교에 갈 친구들이 유치원에 책가방을 메고 와서 반 친구들에게 가방도 자랑하고 안에 든 학용품도 보여주는 날. 곧 졸업하는 친구들은  의젓함을 선보이고 자신감을 얻을 기회를, 어린 친구들은 책가방 안에 들어가면 좋은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들을 배우고, 학교생활에 대한 밑그림도 그려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유치원에서는 그 해에 학교 가는 친구를 모두 모아서 행사를 진행한 것 같네요 (사진 출처: https://evangelisch-in-hennef.de)

   지금은 종교와 인종, 계급을 초월해서 아이들이 함께 놀며 생활하는 유치원의 모습이 당연하고 익숙하지만, 당시에만 해도 프뢰벨의 생각은 상당히 새롭고 급진적인 것이었다. 한때는 사회주의적 교육으로 받아들여져 1851년 독일에서는 유치원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금지령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8년 만인 1860년에 풀렸다.


   프뢰벨은 아이들의 성장에 놀이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역할을 하는지 깨달았던 인물이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가베, 혹은 슈필가베(Die Spielgaben)라는 이름의 놀잇감 시리즈가 낯설지 않을 텐데, 아이들이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베를 고안한 사람도 바로 프뢰벨이다. 이미 재창조의 여지가 없는 완성된 형태의 장난감보다는, 털실공과 나무 블록, 각종 도형과 선, 원과 곡선, 점 등 다양한 모양으로 자유롭게 평면과 입체의 세상을 구성해 가며 놀 수 있는 가베가 더 좋은 놀잇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베의 원뜻은 '신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가베를 'Gift'라고 지칭한다고. (독 아닙니다... 지난 회 연재글 Gift: 선물은 독이 될 수 있다 참고)

저희 집에도 사촌에게 물려받은 가베가 있습니다. 장난감 부엌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지요.


   섞임의 중요성은 놀이와 관련해서 반을 운영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반마다 구비된 장난감이나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반에 놀러 가는 게 무척 즐거운 일이 된다. 보라반 앞 복도에는 커다란 특수 모래통이 있어서 아이들이 틀로 모양을 찍느라 바빴고, 파랑반 앞에는 레고 테이블과 바닥 놀이용 매트가 있었다. 초록반 앞에는 작은 슈퍼마켓이, 빨강반 앞에는 거대한 목조 놀이기구, 하양반 앞에는 인디언 텐트와 벽 놀이 세트가 있었다. 토끼반이었던 나는 기린반에 놀러 갈 수 없었는데, 빨강반인 내 아이는 하루 일과 중에 '초록반에 놀러 가기'가 쓰여있는 것이 고마웠다.  


   반마다 규율이나 시간표도 조금씩 다른데, 큰 테마에 부합한다면 반별로 활동이나 수업 내용 역시 자율적으로 진행한다. 아이들이 다닌 유치원에는 해마다 '소리와 음악'이라든지 '우리가 사는 세계' 같은 테마를 정해 그 해의 활동을 진행했는데, '마법 가득한 동화 나라,' Zauberhafte Märchenwelt(Magical fairytale world: 독일은 그림형제의 나라이기도하다)가 테마였던 해에는 반마다 읽고 싶은 동화를 자유롭게 선택했다. 첫째네 반에서는 1월엔 빨간 모자, 2월엔 개구리 왕자를, 둘째네 반에서는 1월엔 룸펠스틸츠헨, 2월엔 매직 팟 등 서로 다른 동화를 읽으면서 내용에 맞춰 함께 요리도 하고(둘째네 반에서는 좁쌀죽을 끓였고 첫째네 반에서는 백설공주 컵케이크를 구웠다고 한다), 신체의 기능에 대해서 배우기도 하고, 또 어른을 보살피는 일이나 약속·비밀에 관해서도 생각하는 등 이 동화를 통해 이런 테마들을 배울 수 있구나 싶은 다양한 내용으로 한 해를 꾸렸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실천하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반마다 다른 것을 배우면 다른 반 친구들이 서로에게 설명해 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모두가 같은 규율, 같은 내용으로 획일적인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다른 집단의 규율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내면에 자리 잡을 것 같아 꽤 긍정적으로 보였다.  

나도 갖고 싶다 매직 팟, 이왕이면 쇠고기 전복죽 나오는 걸로

   섞임의 미학은 아이들 뿐 아니라 선생님들에게도 있다. 기본적으로 담임 선생님(die Erzieherin) 한 분에 보육교사(die Kinderpflegerin) 1-2분이 한 팀을 이루어 한 반을 맡는데, 담임 선생님은 주도적으로 아이들의 일과와 커리큘럼 같은 것을 담당하고, 보육교사는 담임을 보조하며 아이들을 돌본다. 둘은 자격요건이 다르고 공부하는 기간도 다르며, Kinderpflegerin들은 Erzieherin 없이 단독으로는 아이들을 지도할 수 없다.


   언어 발달, 아동심리, 연극 및 음악 등 선생님들 전공도 다양하게 섞여 있다. 선생님들 연령대가 다양하다는 점도 무척 좋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다닌 유치원에는 인턴십을 하는 십 대 청소년 선생님이 학기마다 바뀌어가며 들어오고,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출근하는 할머니 선생님도 계셨다. 둘째가 처음 들어갔던 빨강반(0-3세의 크리페라서 선생님 수가 더 많았다)의 경우 유치원 부원장인 젊은 선생님 한 분(30대), 오랜 경험이 있는 보육교사 한 분(50대), 화·목에만 오시는 할머니 선생님 한 분(60대), 그리고 약간 장애가 있는 젊은 보조교사가 또 한 분(20대), 이렇게 네 분이서 아이들을 돌봤다. 다양한 어른들을 만나는 경험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도 어르신 보육 선생님들이 계시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보조해 주는 역할로, 자격시험과 요건을 일반 유치원 선생님보다는 간단히 해서. 한 사람에게 과중한 업무를 부과하기보다는 근무시간을 좀 유연하게 나누고 시간과 에너지가 많은 여러 사람이 조화롭게 참여하면 좋지 않을까. 인생 경험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새싹 같은 꼬맹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직업을 가지시는 일은 분명 국가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서로에게도 무척 좋은 일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장애를 가진 선생님을 두는 것 역시 너무 좋은 제도이자 고마운 교육일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좀 불편하신 분을 선생님으로 둔다는 것, 그 선생님과 함께 신나게 어울려 논다는 것이 아이들의 일생에 미칠 영향은 자명하지 않을까. 나는 유치원 하나로 사회 전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애들 유치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보통 유치원에서 다 배우게 되니까. 이렇게 섞임의 미학이 두드러진 시스템이지만 지금껏 독일에서 만난 유치원 선생님들이 인턴십을 하는 청소년 빼고는 모두 여성이었던 점은 많이 아쉽다.



아이로서의 삶을 사는 곳

   프뢰벨이 세계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 때의 캐치 프레이즈는 "“Kommt, last uns unsern Kindern leben!”이었는데, 나는 여기에서 레벤(leben, 삶을 살다)이라는 동사를 쓴 것에 눈길이 갔다. "공부하게 하자"도, "놀게 하자"도 아닌 "삶을 살게 하자(leben)"는 것.


  내가 한국에서 경험한 바로는, 유치원은 학습이 주가 되는 곳이었다. 학교 가기 전에 떼어야 할 것들을 열심히 배우는 곳, 혹은 영어 유치원처럼 뭔가 특별한 배움을 기대하는 곳. 놀이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유치원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놀이 학교 역시, 놀이에다 '학교'를 붙여둔 그 이름에는 놀이를 통해 아이들이 뭔가 배워야 한다는 의지가 은은히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독일에서 아이들을 보내며 느낀 유치원은 그냥 시간을 잘 보내는 곳이다. 물론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놀고 먹는 곳,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곳.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과일을 씻어 자르고, 같이 반죽을 해서 쿠키와 빵을 구워 먹고, 먹은 그릇을 치우고, 같이 장난감 배터리를 갈아 끼우고, 낙엽을 쓸고, 사과나 열매를 주워 담고, 그렇게 담은 바구니 주위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껍질을 까먹고, 동네를 산책하고, 그렇게 사는데 기본이 되는 것들을 조금씩 함께 한다. 또 짜인 프로그램이 없는 자유시간의 비중이 크다. 느슨하게,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누워서 하늘을 보기도 하고, 손수레 안에 쏙 들어가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며 어떤 성과를 내지 않더라도 삶은 충분히 즐겁고 의미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아이로서의 삶을 산다.  


   자연을, 특히 나무를 사랑했던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는 나무들 하나하나가 고유한 형태와 특별한 상처를 가진 모습으로 자신만의 삶을 사는 모습을 가만히 목격하며 감탄하곤 했다. 프뢰벨이 그와 만났다면 아마 '고유하게 예쁜 꽃들이 모여 삶을 사는 공간'으로서의 유치원에 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최근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이라는 책을 읽고 내 삶은 자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새삼 깨달았다. 우리보다 오랜 삶을 지녔기에 긴 호흡으로 평온하게 긴 생각을 하는 나무들, 우리가 귀담아듣지 않아도 항상 우리보다 더 지혜로운 대지와 자연. 우리는 뜰로, 정원으로, 자연으로 나가는 법을 왜 잊었을까.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책이었습니다

   "나무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한 움큼씩 가득 얻어 힘든 시절에 쓸 수 있게 보관할 수만 있다면!"

헤세의 말을 그대로 가져다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아름다운 그들의 정원인 유치원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한 움큼씩 얻어, 이후의 힘든 시절에 쓸 수 있게 보관할 수 있다면. 유치원(幼稚園)이라는 우리말은 '동산 원, 뜰 원(園)'자를 써서 본래의 킨더가르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조금 더 본연의 의미에 가까운 정원이 되어,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것들을 한 움큼씩 주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을 때, "한국에 친정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게."라는 말로 큰 위로를 주셨던 분이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되새겨도 다시금 뭉클함이 따뜻하게 밀려오는 말이다. 친정(親庭)이라는 말도 '친한 뜰'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우리는 뜰에서 컸고, 뜰에서 힘을 얻는 존재들이다.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조그만 존재들이 오래도록 든든하게 기억할 친한 뜰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어른들도 자주 뜰에 나가 아름다운 것들을 마주하기를. 그렇게 뜰에서 크는 것을 보며 우리도 함께 클 수 있기를. 마침 그러기에 좋은 계절이다.




   소개하고 싶은 것이 많다보니 이번 글도 엿가락처럼 늘어났네요. 다음 글은 짧을 예정입니다.

꽃모양 유치원 명찰 달고 유치원에서 소풍간 날
유치원 생일 잔치, 저의 리즈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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