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음이는 세 밤 자면 던져져."
최근에 들은 귀여운 문장이다. 세 밤 자면 유치원을 졸업한다는 뜻이다. 독일 유치원에는 재미있는 풍습이 있다. 라우스부어프(der Rauswurf), 혹은 라우스슈미스(der Rausschmiss)라고 하는데, 선생님이 졸업하는 아이들을 유치원 밖으로 던져주는 것이다. 물론 바닥에 폭신하고 두터운 매트리스를 겹겹이 깔아 두고. 이것이 독일 유치원 졸업식 하이라이트다.
https://www.youtube.com/watch?v=-LCjNvKyBtw
라우스부어프(der Rauswurf)는 '던짐'이라는 명사 부어프(der Wurf)에 '바깥쪽으로'라는 의미의 접두어 라우스(raus)가 붙은 말이다. 원래는 자의에 반해 쫓겨나거나 그만두게 되는 일, 즉 퇴출이나 제명이라는 뜻의 명사다. 하지만 유치원에서는 말 그대로 졸업하는 아이를 밖으로 던져주는 세리머니를 지칭한다. 베어펜(werfen)과 슈마이센(schmeißen)은 모두 '던지다'라는 뜻의 동사고, 여기에서 '밖으로 내던짐'이라는 의미의 라우스부어프(der Rauswurf)와 라우스슈미스(der Rausschmiss)가 파생되었다.
아이들을 던지면서 모두가 함께 외치는 문장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대체로 이렇다.
"Eins, zwei, drei, die Kindergartenzeit ist jetzt vorbei!" (하나, 둘, 셋, 유치원 시절은 이제 지나갑니다!)
"Fenster, Türen aufgerissen!! Die/Der OOO wird jetzt rausgeschmissen!" (창문도, 문도 활짝! OOO가 이제 밖으로 던져집니다!)
모두의 환호 속에서 콩, 하고 던져진 아이들은 다소는 수줍고 다소는 자랑스러운 감정을 후라이드 반 양념 반 버무린 듯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슥슥 문지르며 일어나 씩씩하게 밖으로 나간다. 다시는 포근하고 알록달록한 유치원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글자를 몰라도 좋았고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지 않아도 되었던, 그저 세상의 품에 안겨 있는 것으로 충분했던 시절은 이제 지나간 것이다. 그렇게 내던져지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에도 대견함 반 안쓰러움 반이 짬짜면처럼 한 그릇에 배달되어 온다. 이제는 더 이상 품 속 아기가 아닌 의젓한 학생으로 세상에 나가야 하는 작은 인간들. 그저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박수로 축복할 뿐이다.
아이들이 유치원 문 밖으로 던져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하이데거의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을 떠올렸다. 피투성이가 아니고 피투성인데, 왠지 그리로 갈 수도 있는 말 같기도 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geworfenes Sein)’들이다. 볼프강 슈텍뮐러라는 오스트리아 철학자는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그린 인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아무런 청탁 없이 이 세계로 내던져진, 유한한,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어두운 극 사이에 처박힌, 해명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불안으로 가득 채워진, (...)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nichtigen Kreatur).’"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내 의지로 이 세상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눈을 떠보니 이 세상에 뚝 떨어져 있었다. 그것도 전적으로 무력하게. 키르케고르도 "누구도 울지 않고 이 세상에 올 수는 없다. 아무도 너에게 이 세상에 들어오기를 원하냐고 물어보지 않았고, 언제 떠나고 싶냐고 묻지도 않았다."라고 했다. 사르트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탄생을 자유에 관한 일종의 '스캔들'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올 생각 따위 없었는데 처음부터 남에 의해 시작하게 된 인생이라니. 인간의 자유의지를 생각할 때 이건 시작부터 엄청난 스캔들이라는 말이다. 이 철학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우리는 멋도 모르고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영어로 신생아를 '이 세상에 막 도착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new arrival'이라고 하지만, 이들의 표현으로 하자면 'newly thrown'인 것이다. 도착은 자의에 의한 것이지만 던져지는 행위는 타의에 의한 것이므로.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세상에 내던져진 채 생을 시작한다. 'The New Arrival'이라는 영문 제목이 붙은 월터 랭글리의 그림 안에도 새로 내던져진 작은 생명이 보인다. 이미 오래전에 세상에 던져져 한참을 굴렀을 할머니가 찻잔을 들고 식탁에 등을 기댄 채 인자한 느낌으로 멀찍이 앉아있다. 아기를 막 세상에 던져준 엄마인 듯한 이가 아기를 소중히 감싸 안아 아이에게 보여준다. 조금 일찍 던져진, 아기의 오빠나 형으로 보이는 아이가 양손을 허리에 짚은 채 갓 태어난 아기를 내려다본다. 왔어? 잘 굴러 보자.
낡고 허름한 집 분위기로 보아 아이가 던져진 곳이 그렇게 꽃밭은 아닌 것 같다. 월터 랭글리는 19세기 영국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대에 비인간적 환경에서 허덕이던 노동자들을 화폭에 담았던 사실주의 화가다. 특히 뉴린(Newlyn)이라는 바닷가 마을에 정착해서 변덕스러운 바다와 싸우는 어민들의 고단한 삶을 캔버스에 담았다. 작품마다 어민들의 근심이 안개처럼 끼어 있고 눈물이 축축하지만, 그 안에는 은은한 삶의 의지가 비릿하게 빛난다.
이 그림은 랭글리의 작품 중에서는 비교적 평온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풍긴다. 비록 꽃밭에서 뒹굴지는 못할 것 같지만, 갓 세상에 온 아기는 아마도 이 집에서 가장 따뜻할 것으로 추정되는 요리용 화덕 앞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엄마 품에 안겨 있다. 세간살이는 얼마 없지만 깔끔히 정돈되어 있고, 아이도 비록 흙바닥에 맨발이지만 사랑받고 큰 듯한 모습이다. 무엇보다 미소를 띠며 다정하게 몸을 기울인 엄마의 각도, 그 각도 자체가 사랑이다. 예각이란 이토록 다정한 각도임을 깨닫는다. 그림 속 인물 모두 그리 평탄한 삶이 아니더라도, 내던져진 곳이 추운 자갈밭이더라도, 서로 의지하며 따뜻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축복의 마음이 번진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내던져지게 되나, 그림 속 아기처럼 천에 싸여 화덕 가까이 놓일 수 있다. 무력하게 내던져지는 삶이지만, 던져지는 누군가를 받아 품어주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마찬가지로 유치원 밖으로 내던져지는 아이들 밑에는 두툼한 매트리스가 깔린다는 점에 안심이 된다. 그것을 최대한 포근하게 깔아주는 것은 우리들이다.
우리는 내던져지는 존재지만, 타인을 어딘가로 던져줄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중요하게는 나 자신도 어디론가 던질 수 있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피투성과 더불어 등장하는 '기투성(企投性, Entwurf)'이다. 어떤 방향으로 스스로를 던지고 데굴데굴 굴러감으로써 새롭게 변화된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자갈밭에서 구르는 타인을 그보다는 조금 나은 모래밭으로 던져줄 수도 있다. 피투성은 필연이고 수동이지만, 기투성은 가능성이고 능동이다. 비록 이 세상으로 오는 일에는 아무도 나의 자유의지를 신경 써주지 않았지만, 일단 던져져서 어느 정도 크고 나면 그때부터 구르는 방향이며 속도는 내 몫이다. 옆에서 구르는 다른 이들과 어떻게 부딪힐지 판단하는 일도.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이 더 큰 곳으로 나가는 길목마다 매트리스를 두툼히 깔아 두었다. 크리페에서 킨더가르텐으로, 즉 유아반에서 유치반으로 올라갈 때는 아이들이 상급반에서 놀며 익숙해질 시간을 따로 시간표에 포함시켜 두었다. 즉, 다음 학기에 빨강반에서 파랑반으로 올라가는 친구들은 한 달 정도 여유를 두고 하루에 한 시간씩 파랑반에서 놀면서 미리 친구도 사귀고 교실 분위기에도 적응했다. 초등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포어슐레(Vorschule)라는 학교 예비반 제도가 있었다. 다음 학년도 입학 예정인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실제로 자기가 다닐 학교에서 한 시간 정도 수업을 하면서, 한 학기 동안 학교에서 미리 조그맣게 데굴데굴 굴러 보았다. 내 아이들은 그렇게 미리 친구도 사귀고 선생님들도 만나고, 학교 건물 구조를 충분히 파악하고 나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독일에는 고등학생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관심 분야에서 직접 일해보는 인턴십 프로그램도 제도화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남성들의 일로 여겨지는 분야에 여성 청소년들이 당당하게 들어가 보는 날도 따로 있다고 한다. 그렇게 아이들이 이리저리 굴러볼 수 있는 포근한 버퍼 존(Buffer zone, 완충 지대)을 주고 미리 경험의 기회를 준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고심해서 그런 매트리스를 깔아주는 것은 우리들이다. 엄마 아빠나 그에 준하는 가까운 어른의 품이 제일 따뜻하고 푹신하겠지만, 사회의 품도 그만큼 든든하고 단단하게 아이들을 안아주어야 한다.
"대학만 가면 다 돼."
청소년기의 나에게 대학이라는 곳은 요술램프 같은 것이었다. 대학만 가면 연인도 생기고, 살도 빠지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치 듀오와 피트니스와 사이비 종교가 삼위일체로 합쳐진 신령한 공간 같았다. 막상 가 보니 딱히 그렇진 않았다. 나의 부모님 세대에서는 대학 졸업장이 사실 그런 능력을 가졌을지 모른다고, 지금에서야 어른들의 말 뒤에 놓인 것들을 헤아려 본다. 하지만 우리가 구를 세상은 부모님이 구르시던 세상과는 많이 달랐다.
(... 중략)
내던져진 존재들은 오늘도 열심히 구른다.
사실은 당신이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당신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만하다. 영문도 모르고 내던져진 채, 여기까지 굴러온 그 힘에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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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연재 당시에 남긴 글인데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독서평설 연재글도 좀 더 보강되어 내년에 책으로 새롭게 나올 예정입니다.
<독일에서 전하는 단어들> 연재는 다음 주에 한 주 쉬어갑니다. <고교 독서평설> 9월호 연재분이 순서를 기다리며 밀려 있어서요. 저는 매주 한 편씩 이곳에 글을 올리는데요. 독일어 단어 연재는 앞으로 6회가 남았는데, 2회씩 연재하고 독서평설 연재분을 사이에 한 회씩 끼워 넣는 식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아래는 남은 단어들 목록이에요.
하나하나 정성껏 써서 마무리하겠습니다 :)
10. melden: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11. der innere Schweinehund: 우리 안의 개돼지들
12. aufwecken: 꿈과 현실 사이
13. Stolperstein: 슬프고도 아름다운 걸림돌
14. Weltschmerz: 이 통증의 약은 무엇일까
15. Geborgenheit: 미소 없이는 발음할 수 없는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