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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Nov 06. 2023

melden: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어느 사회든 그 안에서 특별히 중요성을 가지거나 자주 회자되는 말들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같은 말. 독일을 대표하는 단어라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멜덴(melden)이다. 특히 독일 교육을 대표하는 단어라면 나는 멜덴을 꼽고 싶다.


   이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는 커버 사진에서처럼 팔을 위로 뻗어 검지 손가락을 높이 드는 모습이다. 멜덴은 '알리다, 보고하다, 신청하다'라는 뜻의 동사인데, 수업 중인 학생이 뭔가 말하고 싶을 때 검지 손가락을 높이 드는 행위도 멜덴이라고 한다. 처음에 나는 이 멜덴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에 와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게 되었는데, 독일어라고는 '이히(ich, 나)'도 모르는 세 살짜리를 보내자니 걱정이 컸다. 아이는 이전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녀본 경험도 없었다. 말이 정말 하나도 안 통할텐데 괜찮을까? 다행히도 아이는 너희들의 말이나 규칙 따위는 모르겠다는 태도로, 주눅 들지 않고 유치원 뜰에서 용맹하게 뛰어다녔다. 면담 시간에 만난 선생님도 아이가 제법 잘 적응하는 것을 대견해했는데 단 한 가지, 멜덴을 잘 못한다고 했다. '멜덴이 뭐지?'

이런 얼굴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멜덴이 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위의 저 제스처를 보이셨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손을 들고 말해야 하는데, 허락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한다는 얘기 같았다. 이런 자유로운 영혼 같으니라고. 아마 독일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식의 태도가 나왔겠거니 싶었지만, 그래도 독일 사회의 멜덴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반드시 가르쳐야 했다.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의 규칙. "제가 이걸 해도 되나요?" 다 함께 모여 책을 읽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도 좋은지, 자유 시간에 유치원 뜰에 나가 놀아도 좋은지, 미술도구를 꺼내 그림을 그려도 좋은지, 물어보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말 못 하는 아기 때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둘째는 멜덴이 너무 생활화된 나머지, 집에서 화장실 가고 싶을 때도 손을 들고 엄마한테 화장실 가도 되냐고 묻곤 했다.

 

   첫째가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멜덴은 더욱 중요해졌다. 멜덴을 빼놓고는 독일의 교실을 말할 수 없는데, 내가 멜덴의 참뜻을 알게 된 것도 아이가 학교에 가고 시간이 좀 쌓이면서부터다. 멜덴은 단순히 허락을 구하는 의사표시만은 아니었다. 단어의 의미를 보다 잘 전하기 위해, 아이들이 독일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무엇을 배우는지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학교에 입학하면 아이들은 선을 긋고 숫자와 알파벳 쓰는 법을 배운다. 숫자는 한 학기 안에 끝나지만 알파벳은 1년 내내 배운다. 천천히 하나하나, 1년 동안 스물여섯 개의 알파벳을 모두 배우면 학년말 파티를 겸해 가족들을 초청해 작은 축제를 연다.


   알파벳을 1년 내내 배우다니, 스피드의 나라 한국에서는 복장이 터질 일이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대부분 한글을 떼고 입학한다지만 이곳에서 선행학습은 엄격히 금지된다. 멜덴도 공동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이지만, 선행학습을 하지 않는 것도 공동생활의 기초를 만드는 일이다. 미리 배워 와서 앉아있는 것은 선생님의 할 일을 부모가 하는 것이라 여겨 선생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생각할뿐더러, 아이들이 수업 시간을 지루하게 여기고 친구들을 무시하게 될 우려도 생기기 때문이다. 선행학습은 선생님과 아이들의 수업권을 파괴하는 일이자 수업 환경 그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다. 공동생활의 기초는 '나만 앞세우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아이가 1학년 내내 글을 잘 못 쓰기 때문에 알림장을 대체로 그림으로 그려온다. 덕분에 그림문자를 해석하느라 당황했던 수많은 시간들이여.

아래 맨 왼쪽 숙제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안경을 벗고 춤춰 보아요?

사과 폭탄을 던져 보아요(이봉창 의사님...)?

브라 해방 운동에 관해 알아보아요?

그래서 숙제가 뭐라고? ಠ‸ಠ

   가운데 사진이 일반적으로 약속된 숙제의 모습이다. M이 Mathe(수학), D가 Deutsch(독일어)고, 공책에 색깔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색깔로 그 안에 붙은 숙제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월 21일의 숙제를 보면(날짜가 달보다 먼저 나옵니다) 수학은 파란 공책에 숙제가 붙어 있으니 그걸 하면 되고, 독일어는 노란 공책에 숙제가 붙어 있는데 가위표 친 부분 세 군데만 하면 된다는 말. 안경은 읽기 숙제, 네모는 선생님이 나눠준 낱장 숙제가 있다는 말이다. 폭죽 같기도 하고 로켓 같기도 한 그림은 색연필을 잘 깎아 오라는 숙제. 오른쪽 사진은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예정이므로 집에서 접시(눈알이 아니라 접시입니다), 컵, 쿠키, 그리고 사용한 접시와 컵을 담아갈 가방을 가져오라는 내용이었다. 뒤늦게 풀어낸 11월 17일 숙제는? 읽기 숙제(안경)를 하고 밖에서 신나게 놀라는 거였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저 졸라맨의 비밀을 푸느라 신나지 못했다.


   이렇게 1년이 지나도록 올바른 문장을 쓸 것을 기대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배운다. 일단은 냅다 안전부터 강조한다. 사회·자연에 해당하는 HSU 과목에서 첫 학기 동안 뭘 배우나 봤더니 가장 먼저 안전하게 찻길 건너는 법과 안전하게 버스에 타고 내리는 법을 배웠고, 천둥 번개가 치면 도망가는 법(...이라고 엄마한테 말했다), 다음으로는 중요한 번호(집 전화번호, 신고할 때 필요한 번호 등)들과 주소를 공부했다. 가족이라는 테마를 배우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집안일을 배우고, 마지막으로 몸을 깨끗이 하는 법과 이를 건강하게 관리하는 법을 배웠다.


   (참고로 아래 사진은 버스 안전교육을 하는 모습이다. 독일 아이들은 부모 없이 스스로 통학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거나 롤러·자전거를 이용하고 먼 거리는 일반 버스를 이용한다. 일반 버스들이 아침시간에는 스쿨버스라는 전광판 표시를 달고 운행한다. 학교에 교통안전청에서 담당자가 온다는 것까지는 들었지만 이렇게 진짜 버스와 함께 등장할 줄은! 갓 입학한 아이들에게 학교 앞 어느 장소에서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지부터 버스에 안전하게 타고 내리는 법, 버스를 탔을 때의 공중도덕 등을 차근차근 교육해 주었다.)

사진과 기사 출처: https://www.gs-roehrmoos.de/

   이와 더불어 독일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이 중요하게 배우는 것은 자세다. 손에 힘을 주어 연필을 꼭 잡는 법을 연습하고, 45분 동안 책상에 앉아 선생님 말씀을 듣는 태도를 배우고, 수업시간에 남의 말을 잘 듣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운다. 여기에서 멜덴이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유치원에서 강조했던 멜덴과는 살짝 결이 달라진다. 아직 의사표현이 서툰 아이들에게 멜덴은 허락의 의미가 강하다면, 아이가 커가면서 멜덴은 공동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해진다.


   멜덴은 발표에 관한 규칙이다. 하지만 멜덴을 잘한다는 것은 발표를 똑 부러지게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 교실에서 발표를 잘한다는 것은 아이가 자신감 있고 똘똘하게 수업 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말이지만, 독일 교실에서 멜덴을 잘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남의 배려하고 규칙을 잘 지킨다는 말이다. 답을 안다고 해서 내가 불쑥 말해버리거나 다른 친구의 말에 끼어들지 않고, 손을 들고 조용히 차례를 기다릴 줄 아는 것. 선생님은 손을 든 아이들이 골고루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공평하게 기회를 준다.


   처음에 멜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면 발표를 많이 했는지, 어떤 시간에 어떤 발표를 했는지 궁금해했다. 발표를 하고 왔다고 말하는 날에는 칭찬해 주고, 독일어가 서툴러서 올바른 문장을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자신감을 북돋워주려고 했다. 발표를 개인의 퍼포먼스와 자신감 차원에서만 이해했던 탓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 초등학교 교실에서 발표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규칙이고, 자신감이 아니라 미덕임을 깨달으면서 멜덴이라는 단어 안에 든 독일 교육의 중심가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발표는 한 개인의 의사표현에 관계된 것이기도 하지만, 한 집단이 서로를 배려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아래의 교과서 사진은 ei라는 이중모음을 다루는 부분이다. 이 페이지에서는 miteinander(밋아이난더: 서로, 함께), teilen(타일렌: 나누다), leise(라이제: 조용한, 조용히), einer(아이너: 한 명, 한 사람, 한 개)등의 단어로 학생들이 이중모음 ei를 익히게 하는 동시에 이 단어들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행위, '멜덴'을 설명하고 있다. 한 사람만 말하고, 나머지는 그 사람이 이야기할 수 있게 조용히 기다려주는 것. 그래서 멜덴을 할 때는 두 손의 검지를 모두 사용해서 한 손은 입에 갖다 대고, 다른 손을 높이 들기도 한다. 높이 든 검지는 '할 말이 있어요'라는 표시고, 입에 갖다 댄 검지는 '하지만 내 차례까지 조용히 기다릴게요'라는 표시다.

네 번째 그림에 주목해 주세요

   내가 돋보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의견도 내 의견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모두가 규칙을 지키면 내가 말할 수 있는 차례가 분명히 온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경청, 배려, 존중, 공평 같은 공동생활의 예쁜 씨앗을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심는 것이 멜덴의 핵심이다.


   재미있는 발표에는 웃어도 좋지만, 친구가 틀린 답을 말했다고 웃으면 따끔하게 혼난다. 선생님에 따라서는 옐로카드나 반칙 스티커 같은 것을 주기도 한다. 남이 틀렸다고 (혹은 내 생각과 다르다고) 웃는 것은 반칙이야, 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친구들의 적절치 못한 답에 절대 웃지 않는다. 간단한 단어를 툭 던지든 긴 문장을 야무지게 말하든, 선생님은 모든 의견을 고루 환영한다. 또한 답 자체보다는 그 이유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답을 달랑 맞혔지만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하는 친구, 올바른 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타당한 이유를 생각해 내는 친구, 그들 모두가 차례로 기회를 얻으면서 교실은 차근차근 함께 생각하고 성장해 간다.


   아이가 주말에 다니는 한글학교에서 글쓰기 특강을 해달라고 부탁받은 적이 있다. 한국 교실에서 자란 나의 리듬과 독일 교실에서 자란 아이들의 리듬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그 교실에서 몸소 체험했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아이들은 손을 들고, 내가 기회를 줄 때까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조용함이 나에게는 낯설었다. 아는 게 있으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말해버리는 교실에 익숙했고, 대체로 그렇게 나불거리는 역할을 내가 자주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정하고 공평한 기회’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모두에게 고루 기회를 주는 건 앞에 있는 선생님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먼저 말하지 않고 입에 손을 갖다 대고 기다리는 친구들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공정과 공평은 앞에 나선 정치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와 관계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 작은 교실에서 새삼 깨달았다.


   반려인은 교실이 아닌 농구장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농구를 워낙 좋아하는지라 새로 이사한 동네 스포츠 클럽에 들어가서 농구를 시작했는데, 공을 뺏어서 속공 찬스가 나면 바로 달려가 슛을 하는 게 아니라 잠시 기다려 주는 것이 의아했다고 한다. 냅다 자기 코트로 달려가 점수를 내는 게 아니라, 그래도 상대 수비가 어느 정도 들어오면 그때부터 움직이더란다. "여기 사람들은 이기려고 경기를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려고 경기를 하는 것 같아." 잘하는 사람이 돋보이려고 하거나 능숙한 사람들 위주로 패스해서 꼭 이기기 위한 플레이를 하는 게 아니라, 특히 이런 동네 클럽 팀에서는 각자의 역할을 하며 함께 즐기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첫날의 감상을 내게 전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낯선 농구코트에서 멜덴의 향기가 났다. (이 광고 카피 아시면 옛날 사람... 반갑습니다.)


    같이 사는 일의 기초는 나만 앞세우지 않고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같이 사는 일을 궁리하는 직업을 가진 정치인들이 실은 이걸 제일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청문회나 국정감사를 할 때, 버럭 대며 남의 말에 끼어드는 사람에게는 옐로카드를 주고 옐로카드를 세 장 모으면 '축하합니다! 지금 당장 퇴근하세요!'하고 레드카드와 바꿔주는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상대를 윽박질러 의견을 묵살하는 행위를 '자신 있는 태도'나 '예리한 정치 공세'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정치인들을 많이 본다. 질문을 해놓고 답변은 안 듣고 자기 질문만 늘어놓는 사람도 보기 괴롭다. 답을 안 들을 거면 질문은 왜 하는 건지. 이런 사람들은 독일 교실에서처럼 반칙 스티커를 받으면 좋겠다. (될 수 있으면 이마에 붙이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정치인 탓만 할 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관심 없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사람들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지.      


   내 코가 석자라 직접 타인의 손은 못 잡아 주어도, 뒷사람을 위해 잠시 문은 잡아줄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지 않을까. 멜덴은 그런 사회의 가장 기초가 되는 행위다. 나만 얼른 이 문을 통과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글거리지 않게 해주는.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에 신청하거나 단체에 소속되기 위해 신청서를 내는 것을 안멜덴(anmelden), 그만두는 절차를 밟는 것을 압멜덴(abmelden)이라고 한다. 타인과 같이 무언가를 하기 위한 시작부터 그 안에서 함께 활동하며 의견을 나누는 일, 그리고 활동을 접는 일까지 모두 멜덴이다. 다시 말해서 독일에서는 우리가 함께하기 위한 모든 일에 멜덴이 함께한다.
 

  '할 말 있어요.'라고 들어 올린 손에 '우리 모두 너의 말을 들을 테니 천천히 말해 봐.'라는 태도를 보내고 '어떤 의견이든 소중하니 네 생각을 말해줘.'라는 눈빛을 주는 일. 정치학을 전공한 중년의 박사는 오늘도 초등학교에서 공동체 속 삶의 기초를 배운다.

저 할 말 있어요 (사진출처: https://stadt.muenche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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