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애와 개가 있다."
이윤주 작가님의 이 문장을 좋아한다. '내 안의 개'가 이번 글의 주제다.
개라는 동물이 우리말에 공헌하는 바를 다룬 논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있지 않을까) 우리말 단어나 표현, 속담에는 개가 자주 등장한다. 굉장히 충직한데도 이유 없이 괄시를 받는 안쓰러운 동물. 문헌을 보면 삼국시대부터 욕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개의 후손들은 세계 각국에서 욕의 대명사로 사용된다. 인간들은 수더분한 개보다 까다로운 고양이를 숭상하며, 쓸데없는 것을 개에게 줘버리라고 서로에게 권하는 습성이 있다. 그따위 것 개나 줘버려!
개는 억울하다. 사실 이들은 똥도 마다하지 않는 편견 없는 식성을 가졌으며 (가끔 밥에 도토리를 토핑 하기도 한다) 먹을 때는 고독을 즐기는 낭만을 지녔다. 닭을 스토킹 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지만 서당에서 삼 년만 지내면 풍월을 읊는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태어난 지 하루 되었을 때* 가장 용맹한 것으로 사료되며, 팔자 중에서는 이 분의 팔자를 으뜸으로 친다. 관련된 표현들을 보면 볼수록 재미있고 친근한 녀석들이다.
(* 원래 하룻강아지는 태어난 지 하루가 된 강아지가 아니라 한 살 된 강아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하룻’은 짐승의 한 살을 의미하는 ‘하릅’에서 유래했기 때문이지요. 태어난 지 하루 되었을 때 가장 용맹하다는 부분은 그냥 언어유희 삼아 쓴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 '개-'라는 접두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원래 '개고생'이나 '개잡놈' 같이 '정도가 심한'이라는 의미의 접두어 '개-'가 있기는 했지만 일부 명사에 붙어서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개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비속어의 영역이긴 하지만 이제는 긍정적 의미도 제법 갖게 되었다. 개이득, 개신기, 개좋아, 개예뻐. 현재 우리 사회에서 쓰이는 '개-'는 90년대를 풍미한 속어 '킹왕짱'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강조'의 의미에 가깝다. 원래는 명사에만 붙었지만 이제는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등 품사를 가리지 않고 꽉 물고서 놓지 않는다.
독일어에도 개가 들어가는 표현이 제법 있는데, 우리말에서처럼 '정도가 심한'을 의미하는 개들이 여기에도 있다. 대표적으로 '개피곤'과 '개더워'가 독일어 표현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개의 복수형 훈데(die Hunde)에 피곤하다는 뜻의 형용사 뮈데(müde)가 합쳐져 몹시 피곤하다는 뜻의 형용사 '훈데뮈데(hundemüde)'가 생겼고, '훈데힛제(die Hundehitze)'는 개 같은 더위, 즉 무더위를 뜻한다. 한편 독일에서는 개보다 닭이 웃음을 담당하는데,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라는 말은 독일에서는 "Da lachen ja die Hühner!(그건 닭들도 웃겠다!)"라고 한다. 우리의 멍멍이들이 피식 웃을 것 같다면 독일 닭들은 요란하게 깔깔깔 웃어제낄 것 같은 느낌. 어느 쪽이 더 열받을지는 당해봐야 알 것 같다.
재미있으니까 조금 더 옆길로 새자면, 독일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 그대로의 동물이 들어간 형용사가 많다. '꿀벌처럼 부지런한(bienenfleißig)', '까마귀처럼 검은(rabenschwarz)', '양처럼 순한(lammfromm)', '곰처럼 튼튼한(bärenstark)' 등 한국인에게 익숙한 표현들이 형용사 하나에 쏙 들어가 있다. "돼지처럼 먹지 마!(Iss nicht wie ein Schwein!)", "여기는 꼭 돼지우리 같구나!(Hier sieht's ja aus wie im Schweinestall!)"라는 표현을 똑같이 쓰면서도 돼지가 복을 부르는 행운의 상징인 것도 비슷하다. 돼지는 글뤽스브링어(Glücksbringer)라고 해서 네잎클로버, 말 편자, 굴뚝청소부, 무당벌레*와 함께 독일의 대표적인 행운의 상징이고, 사람들은 "운이 좋았구나!"라고 할 때 "Du hast Schwein gehabt!(You had a pig!)"라고 말한다. 동물과 관련해서 내가 특히 감탄하는 독일어 표현은 목이 쉬거나 잠겼을 때 쓰는 '목에 개구리가 들었다(einen Frosch im Hals haben)'는 표현. 이전에도 그냥 개인적으로 '목에 두꺼비 한 마리가 들은 것 같다'는 말을 자주 썼던 나는, 이 표현을 듣고 반가움에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 네잎클로버 이외에는 생소할 수 있어서 설명을 덧붙입니다. 1) 말 편자: 뚫린 곳을 아래로 걸면 그리로 액운이 빠져나가고, 뚫린 곳을 위로 걸면 그리로 복이 모인다고 믿는다. 2) 굴뚝청소부: 예전에는 굴뚝이 막히면 음식을 준비할 수 없고 집도 추워지곤 했다. 게다가 주로 나무로 집을 지었기에 화재에 취약했으므로 제때 굴뚝을 청소해 화재를 방지하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굴뚝청소부가 다녀가면 이 모든 근심거리가 해결되어 집에 웃음꽃이 피었으므로,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3) 무당벌레: 진딧물을 잡아먹는 대표적인 익충. 농사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선물'이라는 뜻에서 영어로도 'ladybug'이라고 부른다. 독일 사람들은 무당벌레가 몸에 붙거나 손에 앉으면 행운이 올 거라고 믿어 떨쳐내지 않는다.)
이제 오늘의 표현, 우리들 내면의 개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이너레 슈바이네훈트(der innere Schweinehund)'는 우리말로 '내 안의 돼지개', 영어로 옮기자면 'inner pig dog'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개돼지'라고 하는데 독일은 소시지가 유명한 돼지의 나라라 그런지 돼지가 앞에 온다. '돼지개'다. 우리의 개돼지는 슬프게도 일부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단어로서 보통은 입에 담아서는 안될 말이지만, 독일의 돼지개는 '내면의 약한 자아'를 뜻하는 말로 평소에 친근하게 자주 등장하는 녀석이다. 즉, 우리의 개돼지가 그냥 비하하는 말이라면 독일의 돼지개는 자기 합리화에 관련된 일상적 표현이다.
앞서 이윤주 작가님의 "내 안의 개"를 잠시 언급했는데, 같은 "내 안의 개"지만 이 개들은 짖는 방향이 좀 다르다. 이윤주 작가님의 개는 '관계'에 오줌을 갈기고 돌아다니는 녀석이다. 내 안에서 불쑥 솟아나 미친 듯이 짖으며 주변의 소중한 이들을 물고 다니는 작은 괴물. 왜 내 마음을 몰라 주냐며 행패를 부리고, 결국은 상대를 아프게 물어버리는 '개 같은 행태'를 말한다. 반면 내가 안고 온 독일 개는 '삶의 태도'와 관련된 녀석으로, '부지런함, 성실성, 계획, 얼리버드' 같은 단어 위에 똥을 싸놓고 저만치 드러눕는다. 얘는 짖지 않고 속삭이는 편인데, 달콤하게 속삭이는 '내 안의 악마'에 가깝다. 두 마리의 개가 결국 만나는 지점이 있겠지만 일단은 종이 좀 달라 보인다.
이너레 슈바이네훈트는 이런 놈이다. 여섯 시에 일어나 조깅을 하러 가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너레 슈바이네훈트가 속삭이는 거다. "괜찮아, 좀 더 누워 있어. 이렇게 편하고 포근한데 왜 나가? 게다가 이불 밖은 위험해." 그 내면의 소리에 설득되어 열 시까지 푹 자고 일어나서 우리는 핑계를 댄다. "아, 이건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이너레 슈바이네훈트가 한 거야." 이너레 슈바이네훈트는 '극복하다'라는 뜻의 위버빈덴(überwinden)이라는 동사와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름하여 내면의 돼지개 극복법. 이를 다루는 프로그램이나 책도 많다.
사실 슈바이네훈트라는 말은 원래 19세기부터 타인을 모욕하는 말로 쓰였다고 한다. 이때는 우리말의 개돼지와 비슷한 뜻이었던 것 같다. 독일의 정치 무대에도 중요하게 등장한 적이 있는데, 1932년 독일 사민당 소속 정치인 쿠르트 슈마허(Kurt Schumacher)가 국가사회주의자들(흔히 나치로 알려진 National Socialist)을 비판하면서 이 말을 사용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사회주의자들이 바로 이너레 슈바이네훈트에 어필했다는 것인데, 슈마허는 "독일 정치 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완벽하게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라며 나치를 비판했다. 군인들이 가져야 할 미덕과 관련해서 종종 라디오 연설에도 등장했던 이너레 슈바이네훈트는 2차 대전 이후로는 '게으름과 규율 부족' 같은 의미로 인상이 굳어졌고, 헬스 트레이너나 체육 선생님들의 단골 메뉴로 사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아니 회원님, 지금 이 시간에 뭘 드셨다고요?)
그렇게 이너레 슈바이네훈트는 게으름, 핑계, 타락 같은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어느 모로 봐도 그다지 좋은 말들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내 안의 이 돼지개를 쫓아내거나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싶지만은 않다. 내 안의 돼지개뿐 아니라 네 안의 돼지개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그 녀석에게 먹이도 주고, 얘기도 느긋하게 들어주고 싶은 것이다. 왜 그렇게 눕고 싶은지, 왜 자꾸 눈을 감고 싶은지.
애초에 타락이라는 말을 그다지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타락이라는 단어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타락 천사>라는 그림 속 눈빛을 보고 나서다. 타락의 눈빛은 늘 초점을 잃은 채 흐리멍덩한 것이 아니라 저렇게 심장을 꿰뚫을 만큼 강렬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저런 타락이라면 쫓아내기보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제니 시인은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비슷하게, 누워 있는 사람은 지금 축축한 무언가를 널어 말리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무력해 보이지만 오히려 힘을 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 생각의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도. 흥청망청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삶의 쓴맛을 견디는 중인지도 모르고, 줄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한숨의 모양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함부로 이너레 슈바이네훈트의 목줄을 잡아당길 수가 없는 것이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그가 산책하는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시간을 가늠했을 만큼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인간의 주체성과 자기 규율이라는 맥락에서 찾는 칸트는 분명 감탄스러운 인물이다. 사실 우리의 돼지개 논의와 비슷한 맥락에서,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The Metaphysics of Morals, 1797)》에 "스스로 벌레 같이 산다면, 짓밟힐 때 불평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칸트의 벌레 이야기보다는 “인간이란 원래 사방에서 자기를 잡아당기는 듯한 힘에 갈피를 못 잡는 존재이자, 내 행동을 내 힘으로 통제 못해 의아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라는 조너선 하이트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모든 철학자는 서로 "느긋해지세요!"라는 말로 인사를 건네야 한다고 말했다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발치에서 꼬리를 흔들고 싶다.
누가 나에게 어쩜 그렇게 부지런하냐 물으면 나는 어쩜 그렇게 턱도 없는 질문을 하시느냐 묻는다. 나는 게으른 걸 좋아한다. 틈만 나면 누울 자리를 찾으며, 누워서 멍 때리고 있을 때 무척 행복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게으르기 위해 성실한 부류의 사람이랄까. 속도가 나를 잡아먹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언제든 게으름을 피울 수 있도록 평소에 느릿느릿 일을 조금씩 해두는 변태적 인간이다. 분초를 아껴가며 바쁘게 사는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그렇게 살라고 다그치고 등을 떠미는 목소리는 몹시 싫어한다.
딴청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도구다.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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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도움을 주신,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께 감사를 전해요. 내 안의 애와 개에 대해 써주신 이윤주 작가님과, 제게 타락 천사의 눈빛을 크게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신 김선지 작가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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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sjkim138/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