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종이나 핸드폰 알람 없이 살게 된 지 몇 년째인지 잘 모르겠다. 갓난아기가 있는 집에 그런 것을 켜둔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대역죄이므로 아이들이 태어난 후부터 그렇게 살지 않았나 싶다. 꼬물이 때는 수유를 하고 돌보느라 낮과 밤의 구분이 그다지 의미가 없었고, 좀 커서는 글 쓸 시간이 없다 보니 매일 3시쯤 일어나 서너 시간 정도 글을 쓰느라 늦잠이라는 게 없는 삶을 살았다. 이제 두 녀석 모두 학교에 보내놓고 작업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 예전만큼 일찍 일어나지는 않지만, 습관이 되어 그런지 눈이 일찍 떠진다. 예전과는 달리 바로 일어나지 않고 이불속에서 미적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자는 동안 눈처럼 소복하게 쌓인 메시지와 메일을 확인하고(눈 건강을 해치는 일입니다 여러분), 간밤에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고(눈 건강을 해친다고!), 오늘 할 일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아침 메뉴와 아이들 간식 도시락 메뉴를 고민하고. 그러고는 미련을 뚝뚝 떨어뜨리며 이불에서 빠져나와 불을 켠다. 달칵, 오늘도 눈부신 하루. 하루는 언제나 눈부시지 않은 적이 없다.
독일어에는 잠을 자다가 일어나는 것에 관한 동사 중 헛갈리기 쉬운 삼총사가 있다. 아우프슈테엔(aufstehen), 아우프바흐엔(aufwachen), 아우프베켄(aufwecken).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아우프(auf)는 독일어에서 쓰임이 무척 많은 녀석인데, 여기서는 동사에 붙는 접두어로 위쪽을 향한다는(up, upward) 뜻이다. 발딱의 아우프랄까. 아래 예문에서 보듯 실제 문장에서는 분리되어 맨 뒤로 가기도 하는데, 이렇게 문장 안에서 가끔 둘로 쪼개지는 동사를 분리동사(trennbare Verben)라고 한다. 독일어를 신기하게 만드는 특징 중 하나다. 동사가 마치 합체 로봇처럼 1호기 2호기로 나뉘기도 하고, 다시 붙기도 하고, 변신도 무척 많이 한다. 외국인 로봇 조종사 입장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는 일이다. 하지만 언어에 변화가 많다는 건 표현하고 싶은 게 많다는 뜻이려니 하고 한숨을 참아본다. 한국어의 높임말과 광대한 어말어미 변화를 앞에 둔 외국인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미안해, 미안한걸, 미안하죠,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미안하지, 미안하고말고, 미안하구려.
그런데 자다 깨는 데 대체 무슨 동사가 이렇게 많이 필요할까? 각각의 쓰임이 있으니 한 번 살펴보자.
아우프슈테엔(aufstehen)은 일어나서 침대에 더 이상 누워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Ich stehe jeden Morgen um 6 Uhr auf. (나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난다.)
"아침에 보통 몇 시쯤 일어나세요?"라고 묻고 답할 때 쓰는, 그야말로 기상(起牀)의 대표적인 동사다.
아우프바흐엔(aufwachen)은 일어났는데, 아직 침대에 누워 있을 수도 있는 상태다.
Ich wache jeden Morgen um 6 Uhr auf, aber ich bleibe noch 30 Minuten im Bett liegen.
(나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는데, 30분간 침대에 누워 미적거린다.)
정신을 차렸다는 의미, 즉 누워있을지언정 정신은 깨어 있다는 뜻이다. 요즘 내가 이불속에서 눈 건강을 해치며 꼼지락대는 상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아우프베켄(aufwecken)은 내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남을 깨우는 것을 말한다.
Ich wecke meine Kinder auf. (나는 내 아이들을 깨운다.)
Meine Katze weckt mich jeden Morgen auf. (매일 아침 고양이가 나를 깨운다.)
아우프를 뗀 베켄(wecken)과는 거의 동의어인데, 독일어로 자명종이 베커(der Wecker)다. 부드럽게 뺨에 뽀뽀를 하든 멱살을 잡든 아니면 앞발로 꾹꾹이를 하든 누군가 타인을 깨워 이 세상으로 다시 초대하는 일. 엄마가 누나를 깨우라고 하면 말없이 내 전기장판 온도를 최고로 올려 나를 깨우던 남동생 생각이 난다. 나는 조금 타서 일어나곤 했다. (그러고 보니 베켄과 발음이 비슷한 바켄(backen)이 굽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어떻게든 누군가를 깨우는 것, 이 아우프베켄이 오늘의 삼총사 중 이 글의 센터를 담당하는 친구다.
예전에 iOS10이 나왔을 때의 신기능이 "들어 올려 깨우기(Aufwecken durch Anheben)"였다. 이 기능을 활성화시켜 놓으면 아이폰이 자다가 깨어난다는 것이다. 전화기를 쓰다가 두면 화면이 자동으로 꺼지는데, 그 상태에서 전화기를 사람이 누웠다 일어나듯 직각으로 세우면 화면이 밝아졌다. 그 모습을 애플과 통신회사에서는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그렇게 아우프베켄은 뭔가를 깨우고 일어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내가 아우프베켄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어린이집에서 나눠준 안내문에서였다. 파싱 아우프베켄(Fasching aufwecken) 행사가 있으니 아이들이 그날 잠옷을 입고 와도 좋다는 거였다. 파싱이 뭔지는 몰라도 일단 15개월짜리 둘째를 잠옷차림 그대로 달랑 들고 가서 선생님께 안겨 드렸다. 아이를 받아 든 선생님이 그 모습을 너무나 귀여워하셨다. 어깨와 엉덩이 쪽을 똑딱단추로 잠그는 곰돌이 수면조끼를 입은 아이는 옷차림이 바뀌지 않아 약간 비몽사몽 한 상태였는데, 잠이 덜 깬 모습이 내가 봐도 귀여웠다. 색색의 보드라운 잠옷을 입고 곰돌이며 토끼 인형을 질질 끌고 나타난 아이들을 맞이하는 선생님도 잠옷바람이었다. 파자마와 나이트가운, 우주복 스타일의 잠옷을 다양하게 입은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이건 대체 무슨 행사일까. 집에 돌아가자마자 파싱 아우프베켄이 뭔지 찾아보았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그날 하루만 잠옷을 입은 게 아니라 파싱 기간 내내 다양한 코스튬을 입었고, 보는 사람도 무척 즐거웠다.
파싱은 지역마다 명칭도 풍습도 조금씩 다른데, 기본적으로는 금식이 시작되는 사순절 전에 실컷 먹고 마시며 즐기는 카니발을 뜻한다. 카니발(carnival, 독일어로는 der Karneval)은 라틴어의 ‘carne(고기)’와 ‘val(격리)’을 합친 말이다. 이슬람 신자들이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하듯이, 기독교 신자들은 부활절 전 40일간을 사순절이라 부르며 신의 고난을 기억하고 체험하기 위해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 카니발은 그렇게 금식이 시작되기 전에 실컷 먹고 마시며 놀아두는 축제다. 가톨릭의 뿌리가 깊은 독일 남서부 지역에서 주로 기념한다. 개신교가 우세한 지역에서는 너무 무절제하다는 이유로 카니발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 행사를 가장 성대하게 치르는 쾰른에서는 '다섯 번째 계절'의 시작과 함께 파싱을 기념하는데, 11월 11일 11시 11분에 축제를 시작한다고 한다. 11은 종교적으로 '어리석음'*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숫자로, 카니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광대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2월, 기나긴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대체 봄은 언제 오려나 싶을 때 파싱이 온다. 그러니까 바이에른 지방은 부활절 전의 사순절에, 쾰른 지방은 크리스마스 전의 사순절에 맞추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대규모 퍼레이드가 열리고, 사람들은 재미있는 복장으로 광장에 모여 함께 바보가 된다. 아이들은 퍼레이드에서 던지는 초콜릿과 사탕을 바구니에 주워 담느라 신이 나고, 거리는 온통 꽃가루와 종이 폭죽 천지다. 이걸 다 누가 치우나 싶은 아줌마의 마음을 잠시 제쳐두고, 나도 걱정 근심 없는 바보가 되어본다. 뭐, 세상에 바보 아닌 사람이 있기는 할까.
* 기독교에서 11은 질서를 상징하는 10(대표적으로 십계명)에다 뭔가 더하는 것으로, 그 질서의 파괴와 훼손을 의미하고 따라서 무질서와 심판을 부르는 숫자라고 한다. 또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열두 제자, 12지파)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숫자로 불완전, 부족함, 어리석음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나저나 파싱 아우프베켄, 즉 파싱을 깨운다니, 이게 무슨 말이지? 축제를 시작한다는 건가? 전통적으로 파싱 아우프베켄은 새벽에 잠옷이나 광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주민들을 깨우기 위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행진하는 것을 말하는데, 요즘에는 11시 11분에 맞춰 밴드나 퍼레이드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사람들도 "Weck auf!(깨어나세요!)"하고 함께 외치는 걸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린이집에서는 모두가 바닥에 누워 자는 척을 하다가 시계 소리에 맞춰 벌떡 일어난 뒤, 가능한 모든 사물을 동원해서 아주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고 한다. 그러고는 신나는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며 게임과 먹거리를 즐겼다고.
나는 이 파싱 아우프베켄이 참 묘하다고 생각한다. 파싱이라는 축제를 깨운다는 건 이제부터 꿈처럼 비현실적인 축제가 시작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깨어나서 꿈속으로 들어가는 셈이 된다. 어디를 꿈으로, 어디를 현실로 보아야 할지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을 넘나들며 즐기는 바보들의 시간. 그 중간에 아우프베켄이 놓인다. 우리는 흔히 선구자나 선지자라는 뜻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다. 독일에서 'eine aufgeweckte Person'은 나이에 비해 놀랍도록 총명하고 지적 수준이 높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파싱 아우프베켄에서 사람들은 깨어나 바보가 된다. 평소의 우리와 축제를 즐기는 우리, 어느 쪽이 바보인지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인생은 꿈같은 것이고, 우리 삶은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Weck auf!(깨어나세요!)"라는 외침은 대체 어디에서 깨어나라는 주문일까.
바보는 웃음, 그리고 권위와 관련되는 존재다. 우리는 웃음이 어떻게 권위를 무너뜨리는지 잘 알고 있다. 파싱 축제에서 마스크를 쓰고 광대옷을 입은 바보들의 활약은 대단한데, 이들은 술집과 상점, 공공기관 등 동네 여기저기에 출몰하며 바보들의 모임을 개최하기도 한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세속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바보들의 움직임이라니! 그리하여 결국 바보들이 도시를 점거한다. 이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관은 학교와 시청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특히 바보들이 라트하우스(Rathaus), 즉 시청에 난입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시장에게서 도시의 열쇠를 넘겨받는데, 시장들은 열쇠를 넘겨주기 전에 위버레궁스파우제(Überlegungspause)를 짧게 가진다고 한다. 직역하면 '생각이나 반성을 위해 잠시 멈추는 것'이다. 생각과 반성을 통해 바보들의 세상을 선언하는 일. 이쯤 되면 바보와 현자의 구분이 아득해진다.
웃음과 권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면 파싱 기간에 어떤 날이 있고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지 좀 더 살펴보는 게 좋겠다. 본래 파싱은 중세 시대에 '동방박사의 날(Dreikönigstag)'에서 금식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chermittwoch)'까지의 기간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 사이에 신기한 날들이 그야말로 꽃처럼 피어있다. 여인들의 목요일(Weiberdonnerstag), 카네이션의 토요일(Nelkensamstag), 튤립의 일요일(Tulpensonntag), 장미의 월요일(Rosenmontag), 제비꽃의 화요일(Veilchendienstag) 등.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여인들의 목요일과 장미의 월요일. 파싱 행사를 가장 정성스럽게 챙기는 쾰른 시의 경우, 여인들의 목요일에는 그야말로 온 도시가 여인천하가 된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이날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남성들의 상징인 넥타이가 보이면 가위로 자를 수 있었다고 한다. 억눌려 살아야 했던 여성들이 남성의 권위를 싹둑 잘라버리고 자유를 만끽하는 날. 억누르는 자도, 억눌리는 자도 없는 해방의 날이 된다. 18세기 수도원에서는 수녀들이 이날만큼은 와인이나 초콜릿 등 금지된 것들을 즐기며 낮에는 춤을 추고 밤에는 카드놀이를 했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날, 손발이 묶인 시장에게서 여성들이 열쇠를 넘겨받는 의식을 치르는 곳도 있다. 이렇게 가부장적인 권위를 전복하는 일은 과연 바보들이 꿈속에서만 해야 하는 일일까.
장미의 월요일(Rosenmontag)은 사실상 그 어원이 광란의 월요일(Rasenmontag)이라는 설이 독일어 사전에 실릴 정도로, 질서(Ordnung)의 사회인 독일이 무질서와 난장판이 되는 날이다. 축제가 정점을 이루는 날이기도 하다. 쾰른의 카니발 퍼레이드는 브라질의 리오 카니발, 영국의 노팅힐 카니발과 더불어 세계 3대 카니발로 200여 년간 명성을 지켜오는 중인데,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대성당이 있는 성스러운 도시가 이렇게 세속과 무질서의 공간으로 변하는 것이 재미있다. 자그마치 6킬로미터가 넘는 성대한 퍼레이드와 가장행렬이 예닐곱 시간에 걸쳐 이어지는데, 퍼레이드 중에 '예켄(Jecken)'라고 부르는 바보 백성들에게 던져줄 '카멜레(Kamelle)' 즉, 사탕과 캐러멜, 초콜릿과 꽃만 해도 수백 톤에 달한다고 한다.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데 대체로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선호한다. 여기서도 바보들의 활약은 눈여겨볼 요소다. 풍자는 퍼레이드의 핵심 요소 중 하나. 퍼레이드에는 정치인이나 사회 문제, 독일의 정책을 풍자하는 거대한 마분지 인형들이 꼭 등장하고, '나렌슈프룽(Narrensprung)'이라고 하는 바보들의 점프가 특히 유명하다.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그들의 몸짓을 보며 바보들의 점프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 땅에서 가능한 한 높이 날아오르려는 몸짓. 최대한 이 땅의 현실과 떨어져 보려는, 바보 같고 흥겨운 노력. 어쩔 수 없이 땅에 매여 사는 인간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보고 싶은 마음이라면, 저것이 과연 바보들이 하는 몸짓일까.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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