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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an 16. 2024

Stolperstein: 걸려 넘어진다는 것

   우리는 대체로 걸림돌을 싫어한다. 넘어지고 자빠지는 걸 반기는 사람은 희귀하므로. 넘어지면 아프고 창피하다. 균형을 잃는 순간의 그 서늘하고 쭈뼛한 감각, 손바닥이 까지고 무릎이 긁히고 엉덩이가 얼얼해지는 아픔, 사람 많은 곳에서 대차게 자빠졌을 때 그냥 그대로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고 싶은 마음까지, 어느 하나 좋은 게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란다. 실제로 내 발에 차이는 걸림돌이든 인생의 걸림돌이든, 내 앞의 걸림돌이 모두 사라져 주길.


   하지만 독일에는 사라지면 안 되는 걸림돌이 있다. 보다 많은 사람의 발끝에 차이기를 바라는 걸림돌이. 그래서 아픔과 부끄러움의 감각을 부단히 일깨우기를 바라는 걸림돌이. 슈톨퍼슈타인(der Stolperstein)이라는 이름의 이 네모난 돌은 독일 전역에 깔려 조용히 빛나고 있다.


   슈톨펀(stolpern)이라는 동사는 '발이 걸리다, 비틀거리다, 휘청거리다'라는 뜻이고, 슈타인(der Stein)은 돌이라는 뜻의 명사다. ('돌멩이 하나'라는 뜻의 아인슈타인이란 이름이 늘 농담 같다고 생각한다.) 합치면 걸림돌이라는 의미가 된다. 비유적으로는 장애물이나 문제점을 뜻하기도 한다. 슈톨퍼슈타인이라고 했을 때, 삐죽 튀어나온 돌부리보다는 아래 사진처럼 글자를 새긴 황동판이 붙은 가로세로 10센티미터 정도의 콘크리트 큐브를 떠올리는 독일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저 네모난 동판을 볼 때면 나는 윤동주 시인이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으려고 했던 구리 거울 생각이 난다. 구리는 부끄러움과 참회의 결합구조를 가지는 금속인가 싶다.

    슈톨퍼슈타인은 독일 예술가 군터 뎀니히(Gunter Demnig)가 나치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서 1992년부터 시작해 지금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다. 대체로 "히어 본테...(Hier wohnte... [Here lived...])"로 시작하는 이 작은 기념관은 희생자들이 추방당하거나 학살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앞 도로에 놓인다. 가끔은 다녔던 일터 앞에 놓이기도 한다. 쉽게 피하거나 우회할 수 있는 장소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거나 우러러보는 장소도 아닌 우리가 매일 걸어 다니는 길. 그 위에 놓여 사람들의 발끝에 차이길 기다린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이것 때문에 발을 헛디디길 바랍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기억해 보길 바랍니다." 뎀니히의 말이다. 그는 "사람은 이름이 잊혀야만 잊힌다."라는 <탈무드> 속 말을 마음에 담고 돌 하나에 이름 하나를 새겼다. 유대인들의 지혜와 정신을 담았다는 책 속의 말이, 야만과 광기에 스러져간 유대인들의 이름을 단단히 붙들었다. 이 반짝이는 걸림돌은 무심히 길을 걷던 내 발끝에도 걸린 적이 있다. 몸이 비틀거리기보다는 마음이 철렁했다. 발끝에 차여 마음까지 휘청거리게 만드는 이 걸림돌이 불편하기도 할 텐데, 사람들은 불만이나 항의 대신 거기에 꽃을 놓았다.


   독일 뿐 아니라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등 유럽 여러 나라에 설치된 슈톨퍼슈타인은 23년 5월에 십만 개째를 맞았고, 지금도 꾸준히 어딘가에 새로 박히고 있다. 십만 개라니, 그러고도 아직 많은 이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니. 나는 가끔 이 네모난 돌들이 모여 만드는 탑이라든가 건물 같은 것을 상상해 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왠지 죄를 짓는 느낌이다. 상상 속 건물은 제대로 세워지는 법이 없이 언제나 무너져 내린다. 사실 쌓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그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라고 말하는 돌들이 가리키는 화살표가 한 곳으로 모여서는 안 될 테니까.  

네 살짜리가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군요. 절멸 수용소, 혹은 학살 수용소라고 불리는 extermination camp는 읽을 때마다 헉하고 숨을 들이쉬게 됩니다.

   동판에는 이름과 출생 연도, 체포된 날, 강제 추방된 곳과 그들이 맞은 운명 등을 짤막하게 담아 두었다. 돌이 놓일 정확한 위치를 잡기 위해 일차적으로는 피해자의 생존 가족이나 친척의 증언을 듣지만, 해당 지역 시민들이 모임을 만들기도 하고 인근 학교 어린이들과 선생님이 함께 조사하기도 한다. 우리 동네, 내 이웃집에 살다가 갑자기 사라져서 결국 돌아오지 않았던 사람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그렇게 씨앗을 심듯 걸림돌을 심고 있다. 독일을 여행하다 보면 길거리에 박혀 반짝거리는 이 슈톨퍼슈타인을 심심치 않게 만날 것이다. 보도블록과 거의 비슷한 높이로 설치되기 때문에 실제로 걸려 넘어지는 일은 드물다. 크게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앞에서 걸음을 늦추거나 멈춰 서는 이들을 종종 본다. 마음이 걸려 넘어지는 돌이다.


    안희연 시인은 산문집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에서 메리 루플의 글을 빌려 '사람마다 어김없이 넘어지곤 하는 그들만의 나무뿌리'에 관해 말한다. 이 나무뿌리는 '나의 가장 무른 부분'으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어떤 말이나 표정 혹은 상황에 취약한지, 무엇 때문에 번번이 주저앉는지," 내가 어김없이 걸려 넘어지는 그 나무뿌리의 규칙성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곱 번 넘어졌으면 여덟 번 넘어졌을 때 정확히 바로 그 부분이 또 깨질 확률이 높기에, 거기에 있는 진짜 내 마음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나의 가장 무른 부분'에 관해 생각하기보다는 '걸려 넘어지는 일' 그 자체가 꼭 얽혀있는 나무뿌리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살다가 자꾸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 일.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발을 멈추게 되고, 결국은 그곳에 쪼그려 앉거나 주저앉는 것. 그건 아마 어떤 형태의 사랑일 것이다. 내 마음의 실핏줄이 그곳에 덩굴처럼 얽혀있으니 자꾸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어딘가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 나가는 사람보다는 자꾸 어딘가에 마음이 걸려 넘어지는 사람, 그래서 멋쩍은 얼굴로 종종 멈추는 사람이 더 사랑스럽다. 결국은 자꾸 넘어지는 그곳에 꽃이 피는 게 아닐까. 시인도 "어쨌든 무릎이 깨졌다는 건 사랑했다는 뜻이다."라고 덧붙인다.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걸려 넘어지는 문장들이 있다.

노이반슈타인 성으로 하이킹 갔을 때 만났던 나무뿌리들. 울룩불룩한 핏줄처럼 땅을 꽉 움켜쥔 모습에 감탄했었다.

   비슷하게 내가 책 속에서 걸려 넘어졌던 장소가 있다. "잃어버린 묘지를 위한 묘지"라는, 꼭 시 같은 이름이 붙은 곳이다. 건축가 고건수의 <이를테면, 그단스크>라는 책에서 이 묘지를 만났다. 폴란드 그단스크에는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기존의 묘지들을 잃은 뒤에, 그렇게 잃어버린 묘지를 위해 새로 만든 묘지가 있다고 했다. 잃어버린 묘지들을 위한 묘지라니. 부서진 비석들을 상징하는 박석이 깔린 길을 보며 나는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들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죽음이 다시 한번 흩어져 죽어 있었다. 걸려 넘어질 발을 잃어버린 육신들과, 그 육신이 잠든 곳을 표시하는 비석들을 잃어버린 묘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장면을 애처롭게 볼 필요는 없겠으나, 어느 하나라도 쉬이 사라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쉬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렇게 잃어버린 묘지를 위한 묘지를 만들고, 슈톨퍼슈타인을 심는다.


   우리는 전쟁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시대를 살고 있다. 애초에 우리 마음속이 전쟁이다. 살다 보면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들어 미워할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어떤 집단을 하나의 라벨을 붙인 상자에 넣어두고, 그 라벨만 확인한 뒤 죽인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유대인이라서 죽이고, 팔레스타인 사람이라서 죽이고, 북한 사람이라서 죽이고, 남한 사람이라서 죽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모두 테러범이니까, 북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니까. 세상에 뭐 이렇게 단순무식한 도식이 있을까 싶어 인간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나는 가끔 우리가 지적 능력이 아니라 그냥 남을 지적하는 능력이 뛰어난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하느님은 총을 쏘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게 아니야. 서로 사랑하라고 만드셨지(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중에서)." 발렌티나 파블로브나 추다예바는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나이에,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목에 무거운 자동소총을 메고 전장을 누볐던 소녀병사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랐던 그는 전선에서 총을 쏘게 해 달라고 애원했고, 결국은 고사포 지휘관이 되어 전쟁에 임했다. 그렇게 간절하게 총을 쏘고 싶어 했던 소녀는 할머니가 되어 말한다. 하느님은 총을 쏘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고. 그리고는 덧붙인다.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미움을 드러내고 혐오의 선을 긋다 보면 그 선은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나치가 원래 유대인 주변으로 선을 그었다가 장애인과 동성애자, 소수 인종과 흑인, 공산당원, 양심적 병역 거부자, 상습 범죄자, 체제에 저항하는 종교인들과 반나치주의자들까지 야금야금 범위를 넓혀 야만적 행위를 감행했듯이. 그래서 슈톨퍼슈타인 프로젝트도 본래는 유대인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시작했지만 나치 정권에 의해 반사회적 인물로 분류되어 희생되었던 수많은 이들로 범위가 확대되었다. 미움의 선을 긋고 늘이다 보면 나도 언젠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코로나 시대에 우한을 손가락질하고 중국에 선을 그었던 우리는 뉴욕의 지하철에서, 런던의 길거리에서, 리스본의 여행지에서 혐오 범죄를 맞닥뜨려야 했다. 한국인이라고 외쳐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더 넓게 아시아인들 주변으로 선을 그어버렸기 때문이다. 선을 긋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대체로 나 아니면 남이다. 비난과 혐오는 원래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 놔두면 손쉽게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오늘도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나무뿌리, 발끝에 차여 몸이라도 휘청거리게 만들 슈톨퍼슈타인이 필요하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그 오만한 말에 대항하듯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많이 다잡고 고쳤다.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바르샤바 게토의 전몰자 묘역에서 빗물이 축축한 바닥에 무릎을 꿇은 모습은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브란트 한 사람이 무릎 꿇어 독일 민족 전체가 일어섰다'는 평까지 나왔다.

© Sven Simon

   가뜩이나 조심스러운 독일인들은 이 문제에 관해 정말로 조심스러워한다. 곁에서 보기에는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일단은 국기를 흔드는 행위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깃발을 흔들며 열광했던 나치 시절 이미지가 떠오르는 듯, 나이 든 어른들은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손사래를 친다. 월드컵 경기가 있으면 거리에 태극기의 물결이 넘실대는 우리와는 달리, 그렇게 축구에 환장하는 독일인들은 오히려 손에 국기를 잘 들지 않는다. 국기에 들어가는 삼색으로 만든 꽃을 장식하거나, 모자나 손목 밴드 같은 작은 소품에 국기색을 넣는 정도에 그친다. 대체로는 허옇게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앉아 있는 편. 월드컵 같은 행사에 조금씩 국기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젊은 세대들이다.


   독일에는 나치에 관련된 금기어도 많다. 히틀러의 저술에 관한 무비판적 출간은 전면 불허하고 있으며,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은 70년간이나 금서(禁書)였다. 역사 시간에 독일 학생들은 전 세대의 야만과 광기에 관해 진지하게 배우고 토론한다. 자국민뿐 아니라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 교재에도,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려는 사람들이 통과해야 하는 테스트에도, 이 슬프고 부끄러운 역사는 높은 비중으로 수차례 다루어진다. 이를테면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에, 귀화 시험에, 친일파나 빨갱이에 관한 내용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셈이랄까.


   가장 놀라운 것은 난민에 관한 정책이다. 독일은 시리아 내전 등으로 난민이 몰려든 2015년에 국경을 열어 이듬해까지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20년 9월, 독일의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난민과 관련한 시위가 일어났다. 베를린에서만 5천 명가량이 연대 시위를 벌였다. 이제는 그만 받으라는, 혹은 그간 받았던 난민들을 내보내라는 반대 시위였을까? 아니었다. 놀랍게도 난민을 더 많이 받으라는 항의의 의미였다. "우리가 어디서 왔든 사람은 사람"이라고 외치는 목소리, "나치를 위한 자리는 없다(Kein Platz für Nazis)"라고 쓰인 팻말이 인상적이었다. 인종이며 종교라는 단어도 몰랐을 이웃집 네 살짜리를 그 이름도 끔찍한 절멸 수용소(extermination camp)에 보내 '청소'하고자 했던 이들이 이제 다른 나라에서 같은 이유로 국경을 넘어온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환대한다. 과거에 대한 죄책감, 독일인의 마음에 박혀있는 슈톨퍼슈타인이 이런 포용적인 제스처를 더 강하게 하는 게 아닐까.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물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기에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하고, 독일 사람 모두가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은 아니다. 난민을 환영하는 시위에 맞붙어 격렬하게 항의하고 강한 구호를 외치는 반대 시위도 만만치 않다. (난민 반대 시위에는 독일 국기가 휘날리는 것이 늘 신기하다.) <나의 투쟁(Mein Kampf)>은 금서에서 풀리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정치 영역에서는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주목할 만한 도약을 해왔다.

난민 환영 시위 (사진 출처: 유럽연합뉴스)
난민 반대 시위 (환영 시위와는 대조적으로 독일 국기가 휘날리는 것을 늘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독일에는 ‘발하이마트(die Wahlheimat)’라는 단어가 있다. ‘내가 선택한 고향’이란 뜻이다. "함부르크 출생이지만 뮌헨은 내 제2의 고향이다, 시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은 내 두 번째 조국이다"라고 할 때 쓰는 말. '선택, 투표'라는 뜻의 '발(die Wahl)'과 '고향, 조국'이라는 뜻의 '하이마트(die Heimat, 전자제품 살 때 가는 그곳은 Hi-mart입니다)'가 합쳐진 단어다. 크라운제과 초코하임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초코로 만든 집'이라는 광고 문구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하임(die Heim)'은 하우스(das Haus)보다는 조금 더 정서적인 의미에서 '집, 가정'이라는 뜻이다. 안전과 평안을 느낄 수 있는 곳. 반대의 접두어 un이 붙은 형용사/부사형인 '운하임리히(unheimlich)'가 무시무시하고 섬뜩하다는 뜻임을 감안하면 독일어 '하임'이 담고 있는 정서가 느껴질 것이다. 그런 집이 있는 곳이 하이마트, 즉 고향이다. '


   발하이마트는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섬뜩할 수도 있는 곳을 벗어나 선택한 제2의 고향이 안전과 평안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아름다운 단어다. 외국인으로서 발하이마트라는 단어를 사전에 등재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은 왠지 든든한 일이다. 태어난 곳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살아갈 곳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 선택을 따뜻한 마음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예전에 했던 선택을 반성하는 마음이 담겼다 믿으며 슈톨퍼슈타인 옆에 나란히 놓아두고 싶은 단어이기도 하다.  


   최근까지 살았던 동네 하임하우젠(하임에 하우젠이라니, 왠지 단어 자체가 1 가구 2 주택의 느낌이랄까)에는 난민 수용시설이 있었다. 널따란 유채밭과 밀밭 한편에 컨테이너를 개조한 공동 주거시설을 여러 채 배치한 그곳은 내 산책길의 일부라 나는 사시사철 그곳을 지나다녔다. 그곳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고 안심이 되었다. 동네에서 나오는 모든 중고 장난감과 쓸만한 아기용품들이 그리로 갔고, 결국 컨테이너 주거촌 안에 작은 놀이터가 생기는 것을 보고는 얼마나 기쁘던지. 그곳에서는 전쟁이라든가 박해라는 단어를 몰라도 되는 아기들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세발자전거를 탔고 미끄럼틀에 올랐다. 그 앞을 지나다니며 그 아기들의 발하이마트가 다정하고 평화로운 곳이기를, 내 아이들의 발하이마트도 차별 없이 정의로운 곳이기를 바랐다. 내 아이들의 발하이마트가 인종차별이 없는 곳이기를 바라면서 난민 아기들이 들어오지 말기를 바라는 것은 고향이라는 단어를 내 입맛대로 독점하고 싶다는 가시 돋친 마음일 것이다. 난민과 이민자들 사이에 애써 선을 긋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모두 이방인일 뿐이니까.  


   <사람, 장소, 환대>를 쓴 김현경 선생은 사람이 된다는 건 "자리 혹은 장소를 갖는 것"이며,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 세상을 저들과 공유할 수는 없다는 믿음을 가졌던 이들은 모두가 공유하는 길 위에 그렇게 몰아낸 이름들에게 조그맣게 빛나는 네모난 자리를 주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한때 총구를 겨눠 이웃을 몰아냈던 사람들은 이제 총구를 피해 도망쳐 온 이들에게 이웃집을 내주고 있다. 환영하는 마음으로. 그런 의미에서 슈톨퍼슈타인이라는 이 걸림돌은 사실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디딤돌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을 저들과 공유할 수는 없다는 믿음, 저들만 없다면 이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신념은 아직도 세상 여기저기에 유효하게 박혀있다. 그런 믿음과 신념들이 어딘가에서 무엇을 만나 한번쯤은 걸려 넘어지기를 바란다. 나무뿌리든 걸림돌이든 타인의 발이든, 우리의 신념을 걸어 넘어뜨리는 존재는 사실 축복에 가깝다. 나는 꽃길만 걸으라는 말이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꽃길만 걷다 보면 소위 '머리가 꽃밭'인 사람이 되기 쉽다. 무엇보다 사람이 인생을 그렇게 반듯하고 아름답게, 깔끔하게만 살 수는 없다. 자꾸 걸려 넘어지는 게 진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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