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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Sep 18. 2023

Arbeit: 아르바이트, 이렇게 슬픈 단어였어?

   온 국민이 다 아는 독일어 단어가 있다. 아르바이트(die Arbeit, r을 묵음처럼 '아-바이트'라고 발음한다). 줄여서 알바라고도 한다.


   독일에서는 '노동, 일, 작업, 과제' 등의 뜻으로, 일반적인 근무를 의미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 독일어 단어를 가져다 본래의 일이 아니라 임시로 하는 부업, 시간제 근무나 단기로 돈을 버는 일 등에 붙였고, 우리나라도 그대로 가져와 쓰고 있다. 독일에서는 이 경우 미니잡(Minijob)이나 타일차이트아르바이트(Teilzeitarbeit, 직역하면 '조각 시간 근무' 정도가 되겠다)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나라에서 '알바, 알바생'이라는 단어는 이제 축약어나 은어 수준에서 벗어나 주요 일간지에도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 '독일에서 전하는 단어들'이라는 이름의 원고를 기획하면서 이 단어는 꼭 데려와 만져보고 싶었다.


   독일에서는 당당한 단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왠지 주눅 들어있는 단어가 아르바이트다.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버는 어린 학생들을 볼 때의 대견함도 있지만, 제대로 된 일이 아니라는 생각과 거기에서 오는 멸시의 마음이 얇게 스며있는 단어다.


   이 부끄럽고 못난 마음을 당당히 부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원래 존중이 어렵지 무시는 쉬운 법이라, 알바생을 대할 때 갑질을 해도 되는 만만한 대상, 정해진 일이 따로 없으니 그야말로 뭐든 시켜도 되는 대상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런 취급을 받으면 알바생 스스로도 가볍게 대체될 수 있는 인력으로 생각하고 책임을 쉽게 거두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알바'라는 단어에는 '부당 해고,' '갑질 신고' 같은 측은한 단어들도, '잠수,' '대타 핑계' 같은 난감한 단어들도 연관 검색어로 따라붙는다. 알바는 이제 돈을 받고 여론조작을 위해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속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직업의식 같은 것 없이, 돈만 받으면 가리지 않고 해주는 일이라는 씁쓸한 뉘앙스도 배고 있다.

인형탈 쓰고 있는데 기타를 쳐달라는 요청을 받음. jpg

   단어를 유심히 보다 보니 알바생이라는 말도 독특하다. 알바인(人), 알바자(者)가 아니라 알바생(生)이라는 것. '—생(生)'은 수습생, 실습생, 초년생 같은 말에서처럼 명사 뒤에 붙어 '학생'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기 때문에, 단어에 '배우는 어린 사람'이라는 뜻이 섞인다. 그 결과 어쩐지 상대를 내려다보기 쉬워지는 말이 된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은 학생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한데, 알바생이라는 단어로 굳혀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70대 알바생? 꼭 ‘유치원생 가장'처럼 어색하다.


   40대에서 6,70대의 임시직 노동자는 날로 늘고 있고, 이들에게 '알바'는 단순한 용돈벌이가 아니라 생계수단이 될 확률이 오히려 높다. 그런데 용돈을 벌기 위해 잠시 시간을 쪼개 일하는 학생들이라는 의미가 짙은 '알바생'이 일반화되다 보니, 그냥 용돈벌이로 하는 일에 깐깐하게 계약서를 쓴다거나 관련된 법을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는 그릇된 생각이 들러붙기 좋지 않았을까. 그들은 엄연히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들이다.


   사실 '—생(生)'이 붙은 말 중에 내려다봐도 되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어린 학생이나 배우는 초심자일수록 더욱 존중하며 정중히 대해 주어야 하는 것이 어른의 일이 아닐까. 대접을 받고 큰 사람들이 자라나 다른 이들도 자연스럽게 배려하고 대접하게 된다. 대중들은 이미 ‘알바’라는 축약어를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확대해서 쓰고는 있지만, 설령 진짜 어린 학생들일지라도 ‘알바생’이라는 말을 삼가고 ‘아르바이트 노동자’ 같은 표현을 뉴스나 일간지에서부터 써주면 좋을 것 같다. 그들도 떳떳하고 정당한 노동자라는 개념이 은폐되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일상에서도 함부로 얕보이지 않도록.

아프면 환자고 알바와 청춘은 좋기만 한 관계는 아니니까 아무 데나 귀한 청춘을 갖다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춘이 대체 무슨 죕니까.

   독일에서 아르바이트는 그야말로 '일'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다. 동사형 어미 -en이 붙어 arbeiten, 즉 '일하다'라는 동사로도 쓰이고, 영어의 -less에 해당하는 -los가 붙어서 일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형용사 arbeitslos가 되기도 한다.


Morgen muss ich arbeiten.

(나 내일 일해야 돼.)

Benedikt ist arbeitslos.

(베네딕트는 일/직업이 없는(unemployed/jobless) 상태야.)


   굳이 구별을 하자면 아르바이트는 노동 쪽에 가깝다. 예술가의 작업처럼 사람들이 좀 더 고상한 것으로 여기는 일에는 아르바이트 대신 베르크(Werk, 실제 발음은 베앜에 가깝다)를 쓴다. 지금은 화이트칼라 근무도 모두 아르바이트라는 단어에 포함되지만, 수백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가면 아르바이트는 몸을 써서 하는 힘들고 수고로운 일을 의미했다고 한다. 광산이나 농지, 공사장 같은 곳에서 빈민층이나 농노들이 주로 담당하는 일이 아르바이트였다고.


   아르바이트는 슬픈 어원을 가지고 있다. 인류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가난한 하인이 되거나 운명적으로 고된 노동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고아들이었다. 부모를 잃거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 당시에 흔한 일이었고 복지라는 개념은 희박했으므로, 돌봐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은 힘든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아르바이트의 어원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옛 인도유럽어의 orbh-라는 말은 '아비가 없는'이라는 뜻이고 여기에서 고아라는 뜻의 영어 단어 orphan과 노동이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 Arbeit가 각각 유래했다고 한다. orphan과 Arbeit가 친척 관계라는 사실에 마음이 살짝 시리다.


   이런 어원을 귀신같이 알아챈 걸까. 우리나라 매장 계산대에 "남의 집 귀한 자식입니다."라고 써붙이는 가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아예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는 문구를 등판에 떡 박아놓은 소위 '진상 손님 퇴치 티셔츠'를 입고 일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렬로 늘어선 귀한 자식들의 뒤태를 보면서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아르바이트의 어원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진상 손님 퇴치 티셔츠 ©KBS

   몇 년 전에는 모 회사에서 고객센터 상담사와 통화가 연결되기 전에 음성 안내를 해주는 시스템에 다음과 같은 말들을 넣었고, 효과가 무척 좋았다고 한다.


"착하고 성실한 우리 딸이 상담해 드립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상담해 드릴 예정입니다."

"연결해 드릴 상담사는 소중한 제 딸입니다. 고객님, 잘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내가 상담드릴 예정입니다."

 

   전화를 받는 상담사도 누군가의 귀한 가족이라는 것을 들려주자 험악한 욕설이 훨씬 줄었고, 먼저 친절한 인사를 건네는 고객도 많았다고 한다. 따뜻한 아이디어의 힘을 본다. 그런데 여전히 조금 슬프다. 감정노동의 극한이라는 수화기 너머에 앉은 이들이 딸, 엄마, 아내, 즉 여성뿐이라는 것도 왠지 슬프고(여성의 목소리를 사람들이 더 만만하게 느끼는 건 아닐까 싶어 괜히 서러워진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이 아닌 젊은이들이 혹시라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마음이 쓰인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니까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족관계와 상관없이, 부모라는 언덕이 있든 없든, 우리는 서로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거기도 그럽니까."

드라마 <시그널(2016)>의 명대사 앞에 우리는 아직 부끄럽다. 아르바이트라는 단어의 어원이 생성될 무렵의 사회에서는 고아들이 힘든 노동에 시달리며 '부모 없는 자식'이라는 서러움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우리의 시공간은 뭐라도 달라졌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오히려 뒤로 가버린 것만 같다.   

거긴 아직도 그럽니까 ©tvN


Arbeit macht frei

   아르바이트라는 말이 슬퍼지는 지점이 독일과 관련해서 하나 더 있다. "Arbeit macht frei(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바로 나치가 만들었던 유대인 강제수용소 정문에 박아두었던 글귀다. 원래 평범한 격언이었던 이 말은 1873년에 소설 제목으로 널리 유행된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공사업 슬로건으로 내걸 정도로 대중화된 말이었다. 그런데 나치 친위대 중령이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소장으로 악명이 높았던 루돌프 회스의 제안으로,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유대인 수용소 정문에 이 문구가 붙여진 것이다. 노동으로 자유를 얻기는커녕 대다수가 죽어나가야 했던 그곳에서의 끔찍한 역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곳에 수용된 이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착취당한 뒤, 생명마저 착취당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정문
제가 살고 있는 동네 Dachau에 있는 강제 수용소 정문입니다

   독일에서는 이 문구가 금기시된다. 실제로 2008년 'Night-Loft'라는 쇼에서 율리아네 지글러라는 진행자가, 일 때문에 조금 피곤하다고 말하는 시청자에게 이 말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방송 도중 곧바로 퇴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담당자의 즉각적인 조치로 스튜디오에서 쫓겨나 공동 진행자였던 다른 아나운서 혼자서 진행해야 했고, 지글러는 15분쯤 뒤 카메라 앞에서 대국민 사과를 한 후 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서비스는 느려 터졌지만(저는 독일에서 처음 인터넷 신청해서 연결하는데 자그마치 6개월이 걸렸습니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우 이렇게까지 신속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놀라울 뿐이다.  


   노동은 과연 우리를 자유케 하는가.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착취당한 뒤, 생명마저 착취당하는 일이 과연 유대인 강제 수용소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화장실 청소도구 보관함에서 사람이 식사를 하고, 스크린 도어나 택배 물류 센터, 용광로와 기계 틈에서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나는 '염전 노예'라는, 21세기 현대 사회에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법한 단어 때문에 신안에서 나오는 굵은소금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짰다.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소금을 싸잡아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되겠지만, 어쨌든 인간을 쥐어짜 만든 소금으로 밥을 해 먹으며 나를 살찌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자니 맘에 걸리는 물건들이 너무 많아서 마음이 더욱 짰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군가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내 주변에 놓인 물건들은 하나같이 그 안에 한숨과 눈물과 누군가의 질병이 배어있을 것 같아서.


   김애란의 소설 <하루의 축>에 등장하는 공항 청소 노동자 기옥 씨는 "많은 이들이 재떨이와 재떨이 청소부를, 승강기와 승강기 청소부를 동격으로 대하듯" 한다고 했고, 정주리 감독의 2022년작 <다음 소희>에서는 "나 이제 사무직 여직원이다?" 하며 졸업을 앞두고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게 되었던 씩씩한 열여덟 고등학생 소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우리는 왜 사람들이 변기를 닦는 기옥 씨를 변기와 동격으로 대하는지, 춤을 좋아하고 할 말은 하는 밝은 고등학생이었던 소희는 왜 일을 시작하면서 점차 말수가 줄고 빛과 색을 잃다 결국에는 목숨까지 잃었는지, 다시 말해서 일이 사람을 피어나게 하는 게 아니라 왜 짓누르고 목을 조르는지 궁금해해야 한다. 우리가 기옥 씨나 다음 소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독일에서든 한국에서든 아르바이트, 즉 노동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슬퍼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한국에서의 아르바이트의 의미건, 독일에서의 아르바이트의 의미건 말이다. 그 단어의 의미와 범위가 어떠하든, 17세기 영국 철학자 존 로크의 말처럼 '생명, 자유, 행복'을 담는 말이기를, 19세기 독일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인간다움'과 '연결'이 아르바이트의 키워드가 되기를. 그리하여 "Arbeit macht frei", 끔찍한 역사와는 다른 결에서 아르바이트가 우리를 진정 자유케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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