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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Sep 11. 2023

11.01 vs. 1.11: 우리가 세상에 놓이는 순서

   미국에서 독일로 삶의 터전을 옮길 때, 십 년을 살아도 당최 적응이 되지 않는 도량형과 홀가분하게 이별할 수 있어 기뻤다. 파운드(lb), 피트(ft), 갤런(Gal), 화씨(℉) 같은 몹쓸 것들. 그 앞에 숫자가 있다 한들 내게는 정보가 되지 않았다. 내 몸무게가 늘었는지 줄었는지 알 수가 없어 십 년 동안 몹시 평온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키가 몇 피트(feet)냐 하면....

   그러나 독일에도 그에 못지않은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숫자 읽는 법과 날짜 쓰는 법이었다.


5와 20

   먼저 숫자 읽는 법.

25를 읽을 때 우리는 '이십오'라고 읽지만 독일에서는 '5와 20'(fünfundzwanzig, 영어로 표현하면 five and twenty)이라고 읽는다. 우리말이나 영어와는 달리 21부터 99까지의 숫자는 뒤에서부터, 즉 일의 자리부터 읽는 것이다. 따라서 123,456(십이만 삼천사백오십육)이라는 숫자를 읽을 때 우리는 1-2-3-4-5-6의 순서대로 읽어나가지만 독일은 1-3-2-4-6-5의 순서로 읽게 된다. 서울-대전-대구-부산 순으로 찍지 않고 서울-대구-대전-제주-부산 순으로 찍는 정신 사나운 행로에 그야말로 가사처럼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 그래서 123,456은 ’einhundertdreiundzwanzigtausendvierhundertsechsundfünfzig‘라고 읽는다. 참고로 한 단어다. 우리는 만 단위로 띄어 쓰지만 독일에는 숫자에 띄어쓰기 따위 없다. 보고 있으면 호흡곤란이 온다.


그렇다. 순서대로 찍어야 '아하'가 나오는 것이다. ©mbc

   처음에는 어찌 이리 요망한 시스템이 있나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요망한 것은 오히려 영어 쪽이었다. 따지고 보면 영어에서는 13(thirteen)부터 19(nineteen)까지는 뒤쪽 숫자를 먼저 읽다가 21(twentyone)부터 다시 태도를 바꿔 앞쪽부터 읽는 셈이다. 서양에서 숫자를 I, V, X 등 로마자로 표기하던 시절에 원래부터 숫자를 읽는 두 가지 방법이 공존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마다 그중 하나를 선택했을 뿐이라고 한다. 영어는 두 시스템이 혼재된 상태로 남았고, 독일어는 영어보다 일관성 있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 낯선 시스템 안에서 나의 영혼은 종종 안드로메다 급행열차를 타곤 했다. 물건값을 물을 때 뒷자리만 듣고서 ‘이렇게 비싸다고?’ 하며 기겁하기 일쑤였고, 순서를 거꾸로 알아듣고는 턱도 없는 금액을 주거나 너무 많은 돈을 내서 그들을 당황시키곤 했다. 그런데 독일인들도 나름대로 분투하는 모양이다. 숫자를 일의 자리부터 읽다 보니 독일 사람들은 비밀번호나 핀 넘버를 입력할 때 실수가 잦다는 연구가 있다. 7년째 독일에 살면서 독일 사람들이 귀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 연구결과는 좀 귀여웠다.  


2023. 1. 11 vs. 11. 01. 2023

   독일인들의 이 일관성은 날짜 쓰는 법에도 이어진다. 우리는 큰 덩어리부터 앞에 둔다. 2023. 1. 11. 즉, 연도-월-일 순으로 쓴다. 독일에서는 정반대로 일-월-연도 순이다. 11. 01. 2023. 처음에 굉장히 헛갈렸다. 이게 대체 1월 11일이라는 거야, 11월 1일이라는 거야? (영어는 여기에서도 요망하게 한 번 커브를 틀어서 월-일-연도 순으로 쓴다. 1. 11. 2023.)


   이곳에서 숫자와 관련해서 헛갈릴 일은 그 밖에도 많다. 영어에서는 the million, the billion, the trillion의 순으로 가지만 독일어는 die Million, die Milliarde, die Billion, 즉 빌리언이 트릴리언이다. (만 단위만 넘어가도 어버버 하는 나에게는 빌리언이고 나발이고 그냥 모두 빌런들이다.) 독일에서는 우리가 건물 2층이라고 부르는 층부터 1층으로 셈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지금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얼마나 유산소운동을 해야 했는지. 오후 시간을 말할 때도 두 시가 아니라 14시, 즉 13시부터 24시까지 두 자릿수를 쓰기 때문에 약속 시간을 정하려면 이 나이에 손가락을 일일이 꼽아가며 계산을 해야 했다. 어 그러니까 열두 시에다가 다섯 시간 반을 더하면… 우리는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아가야 어떻게 그렇게 새끼손가락만 예쁘게 접을 수 있는 거니

   불편하지만 신기했다. 이곳의 세상은 다른 틀 위에 놓여 있다는 신선함. 세상은 단순하게 한 가지 방식으로만 파악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독일어 숫자 시스템에서 느낀다.


무엇을 먼저 두는가

   앞서 말했듯 우리는 큰 것을 먼저 둔다. 날짜도 연도부터, 사람 이름도 가족을 나타내는 단위인 성(姓)부터 먼저 쓴다. 전체적인 것부터 펼쳐놓고 그 안에서 나의 위치를 잡는다. 세상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내가 끼워지는 느낌이다. 전통적인 산수화를 보더라도 커다랗게 펼쳐진 자연 속에 인간은 개미만 한 귀여운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기본적으로 세상에 놓인 자아의 사이즈가 작다.

사람을 찾아봅시다 (겸재 정선, 박연폭포)
작고 귀여운 조상님 (겸재 정선, 인곡유거도)

   게다가 큰 범주에서 작은 범주로 가는 사고방식에다 장유유서(長幼有序, 오륜의 하나인 장유유서는 원래 나이를 따지는 사회적 윤리라기보다는 항렬과 적서를 따지는 친족 간의 윤리라고 한다)라는 윤리도 결합해 두었다. 큰 것부터, 어른 먼저. 그래서인지 나를 뒤로 물리고 공동체를 위해야 한다는 생각, 나이라는 큰 숫자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사고 같은 것들이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다.


   반면에 이곳 독일에서는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배치한다. 내가 중심이고 주변부는 모두 뒤로 간다. 나와 가장 가까운 것부터 셈하고 작은 단위부터 신경 쓴다. 나이 차이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지만 노약자를, 특히 어린 사람을 중요하게 챙긴다. "Der jüngste Spieler fängt an(가장 어린 사람부터 시작합니다)." "Der jüngste Spieler würfelt zuerst(가장 어린 사람이 제일 먼저 주사위를 던지세요)." 보드 게임을 하더라도 이런 문구가 거의 모든 게임 설명서에 들어있는 것을 보면서, 나이 든 아줌마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그렇게 약자를 배려하는 태도를 세상의 당연한 규칙처럼 익혀 습관으로 만든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Richard E, Nisbett)은 《생각의 지도(2003)》라는 책에서 '전체'를 보는 동양과 '부분'을 보는 서양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동양인들은 '종합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이 있어 부분보다는 전체에 주의를 더 기울이고, 사물을 독립적으로 파악하기보다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를 통하여 파악한다고 한다. 반면 서양의 '분석적'인 사고방식은 주인공인 사물과 사람 자체에 주의를 돌리고, 관계보다는 '논리'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동서양을 가르는 명확한 선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고 문화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대략적인 성향이라고 생각하면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언어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면, 같은 상황에서 개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서양인은 명사를 사용하고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동양인은 동사를 사용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상대방에게 차를 더 권할 때 영어로는 “More tea?”라고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너) 더 마실래? (내가) 더 줄까?”라고 하는 점. "오이 안 좋아해요?"라는 물음에 한국인 오이 해이터들은 "네"라고 상대의 물음을 중심에 둔 관계적인 답을 하지만, 독일인들은 "Nein(아니요)"라고 나를 중심에 둔 1인칭 관점으로 대답한다.  

아니 이런 노래가 존재하다니 세상의 오이들이여

   하지만 딱히 어떤 쪽이 좋다거나, 한쪽이 다른 쪽을 배워야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에는 나름의 장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장단점이라는 것은 딱 잘라 나누기 어려운, 같은 이름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무던한 사람이라는 칭찬은 흐리멍덩한 사람이라는 비판과 손을 잡고 다니니까. 그러므로 세상의 무수한 장단점들은 사실 그저 어떤 특성의 두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누구의 기준이고 편의인지는 모르겠으나) 편의상 우열의 가치를 붙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와는 다른 쪽을 바라보며 우리가 할 일은, 서열을 매기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일이 결코 아니다. 건물 자체의 압도적인 높이와 웅장함으로 신의 권위를 느끼게 하는 독일의 성당도 좋지만, 겹겹이 펼쳐지는 능선 속에 포옥 들어가 인간 존재가 놓인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한국의 전통 사찰도 아름답다. 나는 한 아이의 엄마지만 이 우주의 아이이기도 하다. 엄마로서는 한 아이의 우주가 되어 한없이 커져야 할 때가 있지만, 나 역시 우주의 아이로서 나의 자아가 작아질 때 그 관계 안에서 받는 아름다운 위로가 있다. 커다란 자화상도 흥미롭고, 자연과 군중 속의 조그만 누군가를 그린 그림도 재미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것을 깨닫고 기쁜 마음으로 누리며, 아쉬운 것이 있다면 한 번 고민해 보고 생각의 경계를 넓혀 본다면 좋지 않을까.


   사물의 속성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라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독립적인 주체로 상정하고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자아의 무게감이 있어 쉽게 팔랑거리지 않고, 나의 생각과 욕구를 더 잘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며 자라난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더 잘 보고 더 잘 듣는, 예민한 사회적 촉수를 가지게 될 것이다. 타인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보드라운 사람으로 자랄 수 있지 않을까. 분석과 논리도 중요하지만, 관계와 맥락을 보지 못하는 논리는 종종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니까.


   우리는 큰 방향으로의 성장도 할 수 있지만, 작아지는 방향으로의 성장도 할 수 있다. 성장에는 주체성과 독립성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관계성을 배우고 '아득함, 겸허함' 같은 말들을 배우는 것도 무척 중요한 성장이다. 내가 만들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내가 작아지는 경험을 통해 나는 더 편안해지고 유연해진다. 또 그렇게 만든 세상의 여백 위에는 나와 어울려 살아갈 네가 설 자리가 생긴다.


어느 쪽을 향해 있는가

   다만 다른 사회와의 비교를 통해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어느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으며, 무엇 앞에서 뒤돌아 앉아있는지. 어린 시절, 어른들은 ‘큰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내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곤 했다. 나는 세상엔 큰 일과 작은 일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자랐고 큰 일을 우선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일보다 월을, 월보다 연도를 당연하게 앞에 두듯이. 그런데 살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큰 일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큰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더 중요하게는, 큰 일과 중요한 일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의심이 들었다.


   첫 연재글에서 '퇴근'과 '파이어아벤트'라는 단어의 차이를 언급한 적이 있다. "전자파 충만한 얼굴로 '물러나는[退]' 얼굴과 작은 축제를 선포하며 일어나는 얼굴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 우리가 일과 가정 사이에서 무엇을 더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지, 퇴근이라는 단어에 이미 답이 들어있다. 우리는 일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가 물러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근무시간 외의 업무 전화가 그렇게 자연스러웠던 것이고, 밥을 먹다가도 업무상 중요한 전화가 오면(애초에 거는 사람이 문제다) 뛰쳐나가 받았던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이 무척 의아해하는 부분이 바로 친구 사이에 약속을 자주 취소한다는 점이다. 작은 나의 일상이 큰 힘에 의해 통제받는 위계적인 사회에서는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들이 늘 벌어지기 때문에, 사적인 약속은 자주 뒤로 밀려나게 된다. 참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보다 중요한‘ 이유를 들어 약속을 취소한다. 자신을 중심에 두는, 특히 주체적인 자아를 중시하는 사고방식의 독일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맺은 약속을 저렇게 쉽게 철회하다니.

집순이로서 무척 공감되는 부분이 있지만 (껄껄) 부디 약속을 귀하게 여깁시다

   한편으로는 이 외국어 시리즈의 일본어 편을 맡고 있는 김미소 작가의 눈에는 '격리'와 '요양'의 차이가 보였다고 한다. 코로나 시기의 한국에서는 공공기관에서 '격리'라는 단어를 주로 썼는데, 일본에서 확진되어 안내문을 받았더니 '요양'이라는 단어가 보였다고. 우리가 세상에 스스로를 어떤 순서로 놓고, 우리 사회가 어느 쪽을 바라보며 사는지 와닿게 하는 단어들이다. 동양이라는 한 단어로 게으르게 뭉쳐놓기에는, 동양 사회 안에도 무척이나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대체로 큰 그림 안에 작은 나를 놓으며 산다. 전체 안에 놓인 우리는 그만큼 작아지기도 쉽고, 숨기도 쉽다. 외부의 압력에 짓눌려 작아지는 건 괴로운 일이고, 숨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법정에서 숱한 판결을 내리면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품어왔다는 윤재윤 작가는 저서 《잊을 수 없는 증인(2021)》 초반에 유대인 랍비 부남(Bunam)의 말을 인용한다.

   "모든 사람은 두 개의 돌을 갖고 있어야 한다. 때에 따라 필요한 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오른쪽 돌에는 '세상은 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왼쪽 돌에는 '나는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새겨져 있다."

   나는 우주이기도 하고 먼지이기도 한 존재다. 그때그때 주머니에서 적절한 돌을 만지작거리며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왼쪽 주머니의 돌이 지나치게 무거워져 있는 우리들에게, 숫자를 뒤에서부터 읽고 날짜부터 쓰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가끔 오른쪽 돌을 만지작거리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 글에 등장하는 독일 성당과 한국 사찰의 예시는 월하랑 작가님의 다음 글에서 영감을 얻었고, 작가님의 허락을 구해 썼습니다.

https://brunch.co.kr/@wolharang/29


- 이번 글에 '격리'와 '요양'의 차이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언급해도 좋겠냐는 말에 "너무 당연하죠. 우리 같이 쓰는 거 아닌가요?"라는 말로 허락과 감동을 동시에 전해주신 김미소 작가님께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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