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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Sep 04. 2023

gefallen: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방식

   독일어 문형 중에 특이한 구조를 취하는 동사가 몇 있다. 그중 자주 쓰이는 동사가 '무엇이 마음에 든다'는 뜻의 gefallen(게팔렌)이다. 나는 마음에 든다는 뜻의 이 동사가 마음에 든다.

   Maria gefällt Ludwig.

잠깐,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마리아가 루드비히를? 루드비히가 마리아를? 이 동사는 가끔 주어와 목적어를 달콤하게 헛갈리게 만든다. "저요," 루드비히가 발그레한 볼로 손을 든다. "제가 마리아를 좋아해요." 보통은 주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동사는 목적어가 될 단어를 주어로 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앞발로 한 번 그려보았습니다

 

  gefallen은 자기 앞에 놓이는 단어에 빛을 주면서 그게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다고 표현하는 구조를 만든다. 내가 주어가 아니라 그것은 거기에 있고, 그게 내 마음에 들어오는 구조. 당신의 자리를 먼저 만들고 그 옆에 내 자리를 조금 작게 만들어 둔 듯한 문장. 


   "나는 그걸 좋아해"라는 문장은 내가 주어로서 권위를 가지고 대상을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는 느낌이라면, 이 문장은 내가 그 곁으로 다가가 다정하게 바라보는 모양새다. 마리아가 루드비히의 마음속으로 반짝 빛나며 들어온 것이다. 루드비히는 마리아를 손에 쥐려고 하기보다 그저 눈에 담고 기뻐한다.


   빛에 관련된 단어로 조도와 휘도라는 것이 있다. 조도는 단위 면적이 단위 시간에 받는 빛의 양, 휘도는 광원의 단위 면적당 밝기의 정도를 뜻하는 단어다. 그러니까 조도가 특정한 면적에 물리적으로 직접 도달한 빛의 양을 일컫는다면, 휘도는 그렇게 도달한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에 얼마나 들어오는지를 측정하는 개념이다. 나는 이 단어를 물리학자가 아니라 시인에게서 배웠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저 유명한 <카사블랑카>의 대사가 세기의 고백일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본다. 이 문장은 조도가 아니라 휘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여기 있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먼저 거기 있기에 나도 당신 눈 속에 담길 수 있습니다.
- 안희연, 《단어의 집》에서   


The Magpie (Claude Monet, 1868–1869)

   클로드 모네의 <까치>라는 작품이다.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동그랗게 뭉친 눈덩이로 툭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 내린 풍경으로 이토록 빛의 감각을 충만하게 전할 수 있다니. 그동안 빛이라는 건 다분히 여름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작열하는 태양의 강한 에너지라든가 꿀처럼 노랗고 끈끈하게 흐르는 빛의 감각 같은 것. 여름이 아니더라도 봄의 촉촉한 햇살, 가을의 바삭거리는 햇빛 같은 걸 떠올리곤 했지 겨울을 떠올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겨울의 장면은 온통 빛이었다. 선입견을 너무나 환하고 따뜻하게 부숴 주었기에 모네 그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여름의 직사광선이 조도라는 단어를 감각하게 한다면, 쌓인 눈에 반사된 이 환하고 부드러운 빛은 휘도라는 단어의 광채다. 여름의 그림자는 검지만 겨울의 그림자는 눈 위에 푸르게 내려앉았다. 눈 위에서 한 번 반사되었기에, 너의 위에 내려앉았기에 특별한 색을 얻은 것이다.


   gefallen이라는 동사도 휘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휘도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빛의 굴절 속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나라는 존재와 우리 인생 자체가 이렇게 무수한 굴절을 통해 닿아오는 관계 속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gefallen은 우리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관한 아름다운 동사다. 인간이란 나 혼자 빛날 수 없고, 애초에 빛이란 건 내 안에 있지 않다. 내가 당신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것. 주체와 객체라는 조금은 차가운 관계를 이렇게 한 번 빛처럼 꺾어보는 일. 세상의 모든 문장이 '나는'으로 시작하지는 않는다는 깨달음.


Das Bild gefällt mir.

그림이 나를 기쁘게 하네요.

Gefällt dir das Buch?

책이 당신 마음에 드나요?
Die Farben gefallen ihnen.

색상이 그들 마음에 들었어요.


   사실 gefallen이라는 동사는 이렇게 사람보다는 사물에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다. 사람이 아닌 것들이 주목받으며 주어로 나설 수 있는 문장들, 누군가의 마음에 든 것들을 제일 앞자리에 놓아두고 기쁘게 바라보는 문장들. 그래서 나는 이 동사가 더욱 좋다. 구조적으로 다원성에 초점이 주어지는 문형. 이 세상이 나(라는 폭군)의 왕국이 아니라는 증거.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나에게 조명을 비춰 달라는 느낌이지만, 이런 문장들은 한 발 비껴 서서 따뜻하고 은은한 빛을 반사한다. 당신이 빛나도록 내가 여기 서 있을게요.  


   gefallen이 사람에 쓰일 때는 "나는 저 사람이 좋아"보다는 "나 저 사람이 마음에 들어, 저 사람 괜찮은 것 같아" 정도의 느낌이다. 눈이나 귀로 감각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상태. 그러고 나서 좀 더 알게 되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비로소 mögen(뫼겐, 좋아하다)이라는 동사를 쓰면서 그 감정을 느끼는 주체를, 즉 나를 주어로 세운다. 그리고 마음이 더 깊어진다면 결국 알쏭달쏭한 그 단어, lieben(리벤, 사랑하다)을 꺼내게 되겠지. 이 단어를 꺼내도 되는지, 내가 주어이고 그대가 목적어인 것이 맞는지 계속 고민하면서. 누군가가 내 마음에서 무수한 반사와 굴절을 거쳐 자리 잡는 모양새란 그런 것이다. 사랑이란 원래 '내가'로 단단하게 시작하는 게 아닌 거니까. 그리고 사랑이란 내가 꺾여서 당신에게 도달하고, 당신 역시 꺾여서 나에게 도달하는 거니까.


   당신이라는 빛이 내 눈에 담기기까지의 많은 반사와 굴절들을 생각하면 오늘도 눈부시다.








   안녕하세요.
벌써 연재 3회차가 되었네요. 이번에는 웃음기를 좀 걷고 써봤는데 어떠셨나요? 다음 회차에는 다시 망나니 같은 본모습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신간 북토크 소식이 있어 알려드려요. 필로와 소피 팀 총출동합니다.

참고로 저는 저렇게 예쁘지 않습니다. 오셨다 당황하실까 봐... ©김새별

   제가 독일에 있기 때문에 줌(ZOOM)을 이용한 온라인 북토크로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인원 제한 없이 누구나 오실 수 있고, 어둠 속에 숨어 계셔도 좋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아래는 북토크를 소개하는 카드뉴스입니다. 편히 놀러 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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