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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Aug 21. 2023

Feierabend: 축제가 있는 매일 저녁

   

   파이어아벤트(Der Feierabend).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단어. 귀엽거나 신기하다고, 혹은 웃기다고 생각했던 단어는 많았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단어는 이게 처음이었다. 이 단어 안에는 독일 사회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일상을 감사히 즐기고 휴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 서로를 쥐어짜고 내몰지 않는,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상쾌한 바람이 솔솔 부는 사회.   


   파이어아벤트는 하루 일을 마감할 때 쓰는 명사다. 축제나 파티의 의미를 담는 파이어(die Feier)와 저녁이라는 뜻의 아벤트(der Abend)가 합쳐진 말이다. 일을 마칠 때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혹은 손을 털면서 기쁜 마음으로 "Feierabend!"라고 외치고, 동료들은 서로에게 "수고했어, 잘 쉬어!"라는 의미로 "Schönen Feierabend!(쇠넨 파이어아벤트!)"라는 인사를 건넨다. 하루 종일 공부한 학생들에게는 '충분하다'는 뉘앙스도 있는 '끝'이라는 단어 슐루스(Schluss)를 쓰지, 파이어아벤트를 쓰진 않는다. 평일이 아닌 금요일 저녁에는 주말 잘 보내라는 의미의 "Schönes Wochenende!(쇠네스 보헨엔데!)"를 주로 쓴다. 그러므로 파이어아벤트는 열심히 생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주로 평일 근무의 끝자락에 외치는 단어다.

퇴근이다!

   이 단어를 처음 듣고서 독일 사람들은 '저녁이 있는 삶'의 차원을 넘어 '축제가 있는 매일 저녁'을 보내는구나 생각했다. 물론 사는 모습이야 어디나 비슷하기에 평일 저녁이 매일 그렇게 축제 같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런 단어를 만들고 매일마다 쓰는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 특별하지 않을까. feiern(영어로 celebrate에 가깝다)이라는 동사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게 조금 어렵다는 지점에서 이미 삶을 즐기고 누리는 면에서 양쪽 사회가 쌓아온 문화의 밀도가 조금 다르구나 싶었다.

   파이어아벤트의 좋은 번역어가 있는 언어를 찾기도 꽤 힘든 것 같다. 영어로 "이제 마감하죠"라는 의미의 "Let's call it a day!"는 좀 담백하다. 무엇보다 영어에는 해당 명사를 번역할만한 대체재가 없다. 한국어로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퇴근'이 되겠지만 두 단어의 표정이 많이 다르다. 전자파 충만한 얼굴로 '물러나는(退)' 얼굴과 작은 축제를 선포하며 일어나는 얼굴 사이의 간극.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는 '칼퇴근'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당연한 권리라기보다는 각종 희로애락과 세대 차이 같은 단어들을 만수산 드렁칡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다. 파이어아벤트와 가장 비슷한 단어는 호주 시드니 쪽에서 마감 시간에 사용한다는 'beer o'clock'이라는 슬랭이 아닐까 싶다. 이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때, 독일인과 호주인이 맥주잔을 챙-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참으로 영롱한 시간이로다

   독일에 살면 뭐가 좋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사랑스러운 독일 맥주를 제치고 내가 최고로 꼽는 점은 바로 삶의 여유다. 불교 신자로서 부처님이 종종 누워 계신다는 점을 특별히 좋아하는 나는 (예수님도 가끔 편하게 누워 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독일에 살면서 격렬히 누워 지낼 수 있어 몹시 기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시몬스침대 모지사바하

   한국에서는 앉아서 졸고 서서 자는 특기를 발휘했고 미국에서는 탈진해서 누웠다면, 독일에서는 정말로 편안히 누울 수 있는 기회가 부쩍 늘었다. 단순히 아이들이 조금 컸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부가 공히 자기 시간이 많고 충분히 쉴 수 있다 보니 삶이 전체적으로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독일 사회에서도 자본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일한다지만, 대다수가 노동의 무게를 소중히 인식하는 만큼 쉼의 미덕 또한 아는 것 같다. 사람들은 매일마다의 파이어아벤트를 즐기고 주말을 소중하게 여기며 축제를 사랑한다.


    독일로 오기 전에는 미국에서 십 년간 살았는데, 그곳에서 휴가는 대체로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다. 휴가를 쓰려면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눈치를 봐야 했고 뭔가를 구걸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독일에서도 휴가를 쓸 때 동료 간에 합의와 조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가진 휴가 일수가 명시되어 있고 거기에서 하나씩 그어나가면 되는 시스템이므로 마음이 한결 가볍다. 권리가 권리 대접을 잘 받는 느낌이다.


   독일에서는 평일에도 팀원이 자꾸 초과 근무를 하면 팀장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팀원의 초과근무를 팀장의 업무 배분 능력과 리더십 부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휴식은 권리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그리고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독일의 한 맥주회사 광고. 독일에는 아예 Feierabendbier(파이어아벤트 맥주)라는 단어가 존재합니다. © Hacker-Pschorr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던 시기에도 이곳에서는 주말이면 병원이 대체로 쉬었다. DNA에 스피드가 배어있고 국가번호마저 +82인 나라에서 온 대한의 딸로서는 마음이 급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24시간 돌려서 빠르게 파악하고 빠르게 차단할 텐데 왜 이렇게 느려 터졌을까.


   그런데 나만 마음이 급하고 독일 사람들은 그런대로 참을만한 모양이었다. 코로나 시기의 보건 인력들이 우리의 영웅인 것은 맞지만 영웅의 칭호를 쓰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오자 더욱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들도 영웅이기 이전에 어린아이의 엄마이고, 노모의 아들이고, 한 집안의 가장일 수 있으니까. 영웅이라는 찬사로 책임감을 계속 보태버리면 영웅들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인류를 구해야 할 테니까. 치명률이 높지 않은 바이러스로 장기전을 벌여야 하는 거라면, 영웅들을 자꾸 양산하지 않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때 비로소 들었다.


   그들이 영웅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의료진 역시 자신의 삶을 보호받고 자유와 휴식을 누릴 권리가 있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영웅이라 칭하면 자신을 돌볼 새도 없이 그 이름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날로 다크서클이 늘어간 질병관리본부장님을 비롯해서 주말을 헌납해 가며 불철주야 애쓴 분들이 계셨기에 차근차근 커브의 기울기를 줄여갈 수 있었고 모범적인 방역국으로서의 명성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사람들에게는 위기의 순간에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정신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정신이고, 감사가 절로 우러나는 마음이다. 나는 마스크 자국이 깊게 파인 우리나라 의료진의 사진을 볼 때마다 우리 엄마 얼굴 보듯 눈물이 났다. 하지만 이것을 계속 우리의 미덕으로 안고 가는 것이 좋을지, 이제는 한 번 새롭게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밤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드시고 애쓰시는 엄마를 생각할 때 고마운 마음에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지만, 내가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이제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안녕을 챙기고 타인의 안녕도 존중할 수 있도록, 그렇게 자라났으면 좋겠다.


부디 새로운 연구를 시작해서 자신을 다그치려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상황이 도통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모두가 지쳐가던 어느 날, 반려인이 다니는 연구소에서 대표직을 맡고 있는 교수가(돌아가면서 리더를 맡는다고 한다) 전체 연구소 식구들에게 전했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아서 한두 달 내로 다시 락다운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므로 당장은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지 말고, 그 기간을 가장 건강하게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하기 바랍니다. 휴가를 쓰고 싶으면 쓰세요. 아직은 하이킹을 하거나 산책을 할 수 있을 때, 좀 더 자연에서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면 좋을 거예요. 또 다른 힘든 시기가 우리 앞에 놓여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을 돌보고 건강에 신경 써서 그 시기를 대비해야 합니다. 부디 새로운 연구를 시작해서 자신을 다그치려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윤을 내야 하는 회사가 아니라 연구소라는 점이 이런 조치나 말들을 가능하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말을 듣는데 내 귓속으로 박카스가 부어지는 느낌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힘을 주는 말들. 어떤 상황에서도 근본적으로 사람의 가치와 안녕을 생각한다는 점은 위기로 쪼그라든 마음을 어느 정도 펴주는 힘이 있었다.


   나는 이런 경험들 위에 파이어아벤트라는 단어를 올려놓는다. 사람과 휴식과 축제를 소중하게 여기는 독일 사회를 잘 담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근로시간 제도를 두고 날 선 대립을 보이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낭창한 손가락이 왠지 열받지만 사실 학생 때 매일 하루에 네 시간만 빡세게 공부했어도... 읍읍

   말과 기린은 도망가는 것 말고는 자신을 지킬 재주가 없어서, 자다가 습격을 받았을 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망가기 위해 서서 잔다고 한다. 정진규 시인은 시 ‘서서 자는 말’에서 “애비는 서서 자는 말”이라고 썼다. “잠들어도 눕지 못했다”는 표현이 쓰렸다. 가족을 지킬 재주가 달리 없어서, 잠들어도 눕지 못하고 서서 자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 세상이 꼭 그래야 하는 걸까. 스스로를 지킬 재주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게 사회이고, 정치공동체의 목적은 모두의 안녕일 텐데. 편안히 쉬게 하는 사회, 모두가 포근히 잘 수 있는 세상이면 좋을 텐데 우리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한쪽 눈을 뜨고 자는 새가, 어른들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서서 자는 말이 되고 있다.  


   강은교 시인은 저물녘에 우리가 가장 다정해진다고 했다. 그의 시 '저물녘의 노래'가 소설로 바뀌면 딱 이렇겠구나 싶은 부분을 백수린의 단편 <고요한 시간>에서 발견했다.  


“사라져 가는 태양의 빛줄기가 쇠락한 골목과 남루한 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그러면 그 손길을 따라, 동네는 쪽잠을 청하는 고단한 노인처럼 주름이 깊게 팬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해가 지고 나면 대기에 남아 있던 온기도 노인의 마지막 숨결처럼 느리게 흩어져갔다.”


   저녁은 이렇게 고단함을 어루만져 주는 시간, 우리가 가장 다정해질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훈색이라는 이름의 색이 있다. 노을이 질 때 하늘에 보이는, 분홍빛에 노랑이 섞인 색이다. 색이름에 저런 따뜻하고 훈훈해 보이는 글자를 넣은 이유도 아마 비슷한 감각이 아닐까. 그동안 좋아하는 색을 묻는 질문에 소녀 시절 갈색에서 시작해서 지금껏 팔레트 하나를 다 돌았는데,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색은 훈색이다. 저물녘에 세상만사를 포근하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색. 인격이 있다면 아마도 가장 다정할 것 같은 색.   


   모두가 훈색을 보며 매일마다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삶을 살면 좋겠다. 파이어아벤트라는 예쁜 독일어 단어를 연재 첫머리에 소개하는 이유다.
 

제가 동네 산책길에 만난 훈훈한 훈색입니다.




   한 주 동안 안녕하셨어요.

   아시다시피 브런치에 '응원하기'라는 제도가 새로 도입되었습니다. 제 글에 '응원하기'를 눌러주는 사람이 있을지 저도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금액이 전해져서 당황하며 삐걱거렸어요. 사람이 민망하고 고마우면 되게 못생겨지더라고요. (원래 못생기지 않았냐고요? 울 엄마는 제가 제일 예쁘다고 했어요, 흥.) 


   책을 약 200권쯤 팔면 받을 수 있는 인세와 맞먹는 금액이 모인 것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첫 글이라 앞으로의 연재를 응원하는 의미에서 주신 분들이 많고 앞으로는 이렇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부끄럽더라고요. 이 글이 이런 돈을 받을만한 글인가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내 글의 가치를 너무 하찮게 여기는 건가, 반대로도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제가 워낙 하찮은 인간이다 보니 그게 잘 안 되네요. 잘 모았다가 독자님들께 돌려드릴 수 있는 방법, 출판계의 선순환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래는 제가 지난주에 첫 글을 올리면서 제 소셜미디어에 올렸던 글입니다. 저는 이런 마음으로 연재를 시작했어요, 하고 고백하는 마음으로 여기에도 올려둡니다. 열심히 쓴 글로 보상을 받는 방법이 많아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많은 분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 방향으로 다정하게, 작가님들 스스로도 글에 더 정성을 다하는 방향으로 건강하게, 그렇게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브런치 측에서도 고민과 고생이 많으셨을 거고, 특히 이번에 먼발치에서나마 곁에서 (대체 뭐라는 걸까) 브런치 팀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의 마음이 무척 컸어요. 계속 생각을 놓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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