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담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
나의 첫 외국어는 영어였다.
막내딸이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게 되자 엄마는 참고서를 한 권 사 주셨다. 제목은 영어완전정복. 표지에는 말을 탄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 진군하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이 위풍당당하게 박혀 있었다. 이쪽을 바라보며 한 손을 치켜든 나폴레옹은 이제 갓 중학생이 된 꼬맹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이렇게 험준한 산맥을 넘어 군대를 이끌고 전쟁하듯 해야 하는 거라고, 나를 따라 영어를 완전히 정복하여 냅다 승리의 깃발을 꽂자고.
원래 언어를 좋아하는 성향이라, 영어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열두 살 짜리는 곧 매혹되었다. 같은 사물을 두고 다른 이름을 알게 되는 일, 낯선 발음 기호를 만나 새로운 소리를 내보는 일은 무척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런 재미도 잠시, 하루에 단어를 몇십 개씩 외우고 사전을 씹어 먹으라며 전쟁하듯 부산을 떠는 시스템 안에서 가끔은 그놈의 세계가 꼴도 보기 싫어질 때가 있었다. 국영수를 중심으로 빨리 나이를 먹어서 똑같은 그림이 박힌 코냑이나 정복하고 싶었다. (마시면 아이큐가 떨어진다는 캪틴큐의 친구, 나폴레온이라는 이름의 코냑을 기억하시나요?)
“I am a boy. You are a girl.”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는 ‘영어완전정복’ 본문 첫 페이지 내용은 바로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었다. "난 남자고, 넌 여자야."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에 버금가는 이 새삼스런 성 정체성의 선언이 당시에는 왜 하나도 당황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는지 당최 모를 일이다. 사람이 만났는데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름을 밝히는 것도 아니고 냅다 성별 고지라니. 당시 교육계에서는 새로운 언어를 배움에 있어서 가장 첫머리에 놓고 싶은 가치를 혹시 남녀유별(男女有別: 음, 모든 인간 안에는 별이 있다는 말일 겁니다)로 생각했던 걸까.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고서야,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상황이란 대체 무엇인지. (헬로우, 저는 사십칠 세고 당신은 여성 같은데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어쨌든 새로 만난 사이에 해도 어색하고, 알고 지낸 사이에도 뜬금없는 이 선언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읽고 받아 적었다. 일단 빨리 정복해야 했기에 의문을 가질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나에게 영어는 언어가 아니라 점수라는 숫자였다.
나폴레옹이 흐뭇할 만큼 영어 점수를 잘 받는 축이었지만 막상 말을 해보라고 하면 내 입은 얼어붙었다. 교과서를 외워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프리 토킹은 그놈의 자유를 자유롭게 반납하고 싶었다. 문법이 잘못되었다고, 전치사가 틀렸다고 할까 봐 ‘침묵은 금입니다요’의 미소를 발사했다. 미소에라도 최대한 버터향을 실어 은은하게. 나는 내가 받는 외국어 교육에 관해 내용면에서도 방법면에서도 딱히 의문을 가져본 일 없이, 그저 하라면 하는 군인 정신으로 묵묵히 진격하는 학생이었다. 언어를 특전사처럼 배우면서도 과묵한 군인이었다는 점이 좀 웃기긴 했다.
그러면서도 언어를 배우는 것이 좋았다. 영어를 배우면서 그놈의 ‘a boy’가 ’the boy’가 되는 과정에 놓인 간질간질함을 알게 되는 것이 좋았고, 스페인어를 배우면서는 시에스타(Siesta, 매일의 낮잠 시간)의 달콤함이 놓이는 삶을 상상해 보는 것이 즐거웠다. 독일어를 배울 때는 언어 자체의 에너지가 참 남다르다고 생각하며 용맹하게 침을 튀기고 가래 끓는 발음을 연습했다. 일본어 속 여성스러운 말투와 남성적인 문장을 구별하고 존대의 층위를 인지함으로써 자연스레 알게 되는 일본의 사회심리적 구조가 흥미로웠고, 초급 러시아어 시간에 우주선 닮은 글자와 문고리를 닮은 글자를 써볼 때는 그 문고리를 열어 새로운 우주로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알파벳에 담긴 약속을 알아가는 일은 내 몸에 창을 하나 내는 일이었다. 그리로는 다른 세계의 풍경이 보였다. 주입식으로 군사훈련처럼 배운 언어라 해도 거기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예뻤고 바람이 신선했다.
시간이 흘렀다.
몇몇 언어는 나를 떠나갔고 어떤 언어는 내가 놓아버렸고, 어떤 언어는 내 곁에 남았다. 우주선 알파벳이 든 러시아어는 그야말로 외계인과 교신하는 느낌이 들어 고이 우주로 보내드렸고(동사 변화가 안드로메다처럼 광활하게 펼쳐졌다), 일본어와 스페인어는 상당히 좋아했음에도 자주 얼굴 보기 어려워 헤어진 옛 애인처럼 아득히 멀어져 갔다. 지금 내 곁에 가까이 남은 것은 영어와 독일어다.
아기 코끼리 덤보와 벅스 라이프의 하임리히가 시소 타듯 필기시험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영어, 먹다가 그대로 둔 떡처럼 딱딱해진 독일어를 가지고서 나는 미국에서 10년을 살았고 이제 독일살이 7년 차에 접어들었다. 어른이 되어 새로 접하는 외국어, 살면서 부대끼는 외국어는 질감도 풍미도 많이 다르다.
이제 내게 외국어는 더 이상 점수나 시험이 아니라 삶이고 사회다. 이제 나폴레옹 앞에서 코냑 한 잔 꼴꼴꼴 따라 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외국어는 내가 정복하는 게 아니라 외국어가 내게 스며드는 거라고.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고의 확장이고, 다른 세계로 난 창문이라고. 단어는 총알 같은 게 아니라 색색의 유리구슬 같은 것 아니냐고. 하루에 스무 단어씩 외우기보다 한 단어를 입 안에서 스무 번 굴려보면서 맛과 향을 음미하는 쪽이 느리긴 해도 더 즐겁다고.
<독일에서 전하는 단어들> 매거진은 그렇게 마주하는 독일어에 관한 이야기다. 작은 단어 안에 얼마나 커다란 이야기가 들어있는지 생각하면 새삼 놀랄 때가 있다. 정(情)이라는 단어 안에 엄마손 파이처럼 겹겹이 쌓여있는 이야기, 빨갱이라는 단어 안에 굽이굽이 물결치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우리는 안다.
같이 보고 싶은 독일어 단어를 골라 조물락거리며 그 안에 든 의미들을 만져보고, 유리구슬 삼아 양쪽 사회를 비춰보는 글들을 쓰려고 한다. German word - German world 사이에 그어진 작은 선이 되는 글들이면 좋겠다. 그렇게 모은 구슬을 꿰어서 만든 목걸이는 내년에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어른(….인가? 밖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늙었으니 일단 그렇다고 하자.)이기는 하지만 나의 독일어는 아직 어린아이 수준이다. 독일에 온 지 6년이 지났는데 정직하게 한 살씩 먹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처럼 지나치게 정직하다. 하지만 여섯 살의 감각으로 채집하는 단어의 새로움을 전하고 싶다. 익숙하기보다 낯설고 거리감이 있을 때 세상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으니까. 아래의 목차는 그렇게 고른 단어와 표현들이다.
1. Feierabend: 축제가 있는 매일 저녁
2. Servus!: 인사, 매일 건네는 말
3. gefallen: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방식
4. 11.01 vs. 1.11: 우리가 세상에 놓이는 순서
5. Arbeit: 아르바이트, 이렇게 슬픈 단어였어?
6. Prost!: 맥주 나라의 특별한 주문
7. Gift: 선물은 독이 될 수 있다
8. Kindergarten: 아이들을 위한 정원
9. Rauswurf: 내던져진 존재들
10. melden: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11. der innere Schweinehund: 우리 안의 개돼지들
12. aufwecken: 꿈과 현실 사이
13. Stolperstein: 걸려 넘어진다는 것
14. Weltschmerz: 이 통증의 약은 무엇일까
15. Habseligkeiten: 축복으로 여겨지는 만큼의 소유
안희연 시인은 《단어의 집(2021)》에서 “한 단어에 대해 말하는 일은 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했다. 여기에 쌓일 글들은 독일에서 시인의 문장에 적어 보내는 긴 답서다. 단어들이 품은 풍성하고 입체적인 세계를 잘 담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단어의 뜻을 설명하는 건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일이고, 여섯 살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단어 속에 들어있는 작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글, 결국은 우리의 삶과 인생에 대한 글이 되기를 바란다.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수줍은 마음으로 구매링크를 붙여 둡니다.
YES24
https://bit.ly/4dMSsul
교보문고
https://bit.ly/3MxrrPm
알라딘
https://bit.ly/4edtMel
+ 아래는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덧붙여 둔 글입니다. 책은 출간되었지만 당시의 기록으로 그대로 남기고 싶어서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 연재는 별 일이 없다면 제 다음 책이 될 원고의 일부입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외국어 공부(가제)’라는 기획으로, 영어(박혜윤), 일어(김미소), 불어(곽미성), 독어(이진민) 순으로 내년 한 해 동안 순차적으로 나올 시리즈의 한 편이고요. 2024년 상반기에 영어와 일어, 하반기에 불어와 독어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더 멋진 분들이 각각의 언어에 손을 담그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단어와 표현들, 그 이면에 가라앉은 덩어리들을 살펴보고 계세요. 시리즈의 필진이지만 저도 다른 분들이 들려주실 외국어 이야기들이 무척 기대되고 설렙니다.
아래는 출판사에서 이 시리즈를 기획하며 내놓는 소개글입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외국어 공부(가제)’ 시리즈는 더 이상 점수나 증명을 위한 외국어 능력은 필요하지 않지만 여전히 잘하는 외국어 하나쯤은 있었으면 하는 당신, 그래서 새해마다 결심하지만 작심삼일에 그치는 당신을 떠올리며 기획했습니다.
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각기 다른 이유로 삶의 터전을 옮겨 그곳의 언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어른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외국어 공부의 지향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하고 외국어라는 수단으로 나의 세계를 확장해 가는 희로애락을 나누려 합니다.
이 시리즈는 박혜윤, 김미소, 곽미성, 이진민 작가(출간예정순)와 함께합니다.
박혜윤 작가는 한국인에게 유난한 존재감으로 자리하는 영어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나다운’ 영어 공부를 찾아가는 과정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김미소 작가는 직장에선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 직장 밖에선 일본어를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일본에서의 이중생활을 들려줍니다.
곽미성 작가는 오랜 기간 프랑스에서 살아온 생활인으로, 프랑스어 생활자의 일상과 프랑스식 화법으로 들여다본 프랑스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이진민 작가는 아이의 시선으로 채집한 독일어 단어들을 씨앗 삼아 독일 사회와 문화 이야기로 풍성한 꽃을 피웁니다.
외국어라는 공통의 소재에서 출발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성될 4인 4색의 에세이처럼 당신도 ‘나만의’ 외국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첫발을 뗄 수 있길 응원합니다. 작은 시도라도 좋아요. 점이 모여 선이 될 테니까요.
제가 닦아 둔 독일어의 창에서 어떤 풍경이 보이는지 보실 수 있게 화요일마다 창가에 의자를 놓아두겠습니다. 풍경이 궁금하신 분들은 오셔서 앉았다가 가세요. 전하고 싶은 풍경인 만큼, 정성껏 닦아 놓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