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되어야 연결된다
분리는 중요하다.
신뢰와 안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나지 못하면 아이들은 자랄 수 없다.
분리가 되어야 새로운 세상과 연결될 수 있고, 결국 다시 부모와도 건강하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지금은 나를 떠났지만 나중에 내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아는 것.
나도 어딘가 새로운 곳에 갈 수 있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아는 것.
이렇게 쌓은 신뢰로 아이들은 집 밖의 세상을 탐험할 용기와 자신감을 얻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내 새끼는 엄마가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고 탐험을 지속한다. 크흑.)
그래서 떨어져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때로는 아이의 손을 놓아줄 필요가 있다.
분리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아이들은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가 불안해한다고 해서 아이를 늘 곁에 두면 아이의 불안이 누그러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또래와의 경험이나 새로운 환경을 접할 기회가 부족해져서 커 갈수록 결국 더 큰 불안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한 자식일수록 내보내라고 했나보다.
아이가 귀하고 예쁘다고 한 몸처럼 붙어 지낸다고 해서 평생 그렇게 아이와 나와의 사이가 좋을 거라는 것도 아마 착각일 것이다. 건강한 두 개인, 홀로서기에 문제가 없는 두 개인이 만나야 연애와 결혼이 건강히 이루어지듯, 아이와도 적절히 분리되지 않으면 건강히 연결될 수가 없다. 아이는 언젠가 세상에 나가야 하고, 화장실에 혼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 삶에서 불안은 결코 없앨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인간 삶의 근원적인 감정이라고 했다.
즉, 인간인 이상 평생 불안한 법이다. 여기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따라서 불안을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불안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네. 호랑이 아저씨도 이케 불안하다고 합니다. 나는 전공이 정치철학인데, 그중에서도 공포와 불안 개념에 관심이 많았다.
한 때 나는 공포가 자유의 반대 개념이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자유의 영역을 넓히고 공포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항상 공포를 ‘제거(get rid of)’한다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한 번은 지도교수님이 나한테 물으셨다. (산타할아버지를 닮으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인.)
“너는 공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아. 그렇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공포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었다.
자매품인 불안도 마찬가지다.
없애려고 들면 더 큰 불안이 찾아올 수도 있다. 불안을 없애준다고 내 곁에만 두었던 아이는 세상을 더 불안해하게 되듯이. 그러므로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나는 그 뒤로 더 이상 ‘제거’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공포와 불안은 평생 내 가슴께 어디엔가 담겨있는 것임을 알게 된 후로 공포라는 주제를 대하는 내 눈이 새로워졌던 것 같다. 공포와 불안이 꼭 자유의 반대 개념인 것도 아니라는 점도, 그렇게 시선의 전환이 있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어른들의 분리 불안
불안을 잘 다스리는 것, 분리되어야 연결된다는 것을 아는 것, 이는 비단 어린아이들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른들도 분리 불안을 겪는다.
대표적인 현대인의 분리 불안. 흐흐흐. 조회 수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휴대폰이 없으면 초조하고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하는 행동 패턴을 보인다. 예를 들어 휴대폰을 집에 두고 오면 하루 종일 불안하다. 괜히 세상과 소통이 막힌 느낌을 받는다. 중요한 연락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하루를 지배한다. 세상에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것은 내 폰에 배터리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보겠다고 어렵게 약속을 잡아 만나서는 자꾸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앉아 있다. 오죽하면 모두 테이블 위에 전화기를 엎어놓고, 가장 먼저 무의식 중에 자기 전화기를 집어 드는 사람에게 페널티를 주는 게임이 생길 지경.
사실 이것은 스마트폰이라는 물건 자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온라인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집착이다. 나를 둘러싼 온라인상의 관계에 대한 무의식적 확인이 습관화된 것이다. 삶의 의미를 댓글이나 조회수 같은 타인의 관심으로 보상받으려는 행동, 타인 의존적인 행동, 자신보다 타인의 감정을 더 우선시하는 행동 등은 모두 어른들이 보이는 '관계에 대한 불안'이자 '분리에 대한 불안'이다. 정도가 심할 경우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의존성 인격 장애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어른형 분리 불안이라고 하겠다.
제대로 폰을 놓고 나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면 타인의 삶만 들여다보며 내 삶을 허비하게 된다.
그들은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이며, 내가 내 삶을 충만히 살고 하루하루 좋은 것들을 쌓아 다시 만나야 그 만남이 더욱 견고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아는 것.
세상 놓기 싫은 연인의 손도 잠시 놓고 내 삶을 충실히 살아내야 서로가 성장하고 둘의 관계도 더 견고해진다는 것을 아는 것.
이렇게 보면 어른들의 삶도 아이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어른들의 분리 불안은 또 있다.
부모도 아이들과 떨어지면 살짝 분리 불안을 겪는 경우가 있다. 나도 나름 귀여운 분리 불안을 겪었다.
나는 아이들의 하루하루가 굉장히 궁금한 타입의 인간이다.
애들 아빠가 아이들을 놀이터에 데리고 가면 나는 좀 집에서 쉬어도 될 텐데,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 궁금하고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꾸역꾸역 따라가는 인간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아이들이 굉장히 보고 싶었다.
늘 옆에서 꼬물꼬물 불어있던 따뜻하고 말랑한 것들이 없어지니 마음이 허전했다.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말은 잘 통하는지 걱정도 됐다.
허락한다면 하루쯤은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택도 없는 일이었다. 허허.
지인들의 소셜 미디어를 보면, 한국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선생님들께서는 정성스럽게 아이의 하루하루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려주시고 사진도 많이 올려주시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애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의 경우, 애가 크게 다친 곳 없이 하루를 잘 보냈으면 그냥 그걸로 끝이다. 서로 과묵하다. 내가 독일어를 잘 못해서 과묵한가 싶었지만, 독일인이고 외국인이고간에 다 그냥 과묵하다.(그래서 다행이다.)
각 반별로 벽에 붙어있는 알림판. 한 주의 활동을 간략히 알려주는데, 아이가 뭘 했는지 알 수 있는 정보는 기본적으로 이게 다다. ⓒ a little teapot 사진에서 보듯이 하루하루 어떤 활동을 했는지 간략하게 게시해 두는 게 전부고(주로 “다른 반에 가서 놀았어요, 간식을 먹었어요, 밖에서 놀았어요” 정도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한 부모 입장에서는 읽으나마나한 활동들.), 그 마저도 별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선생님이 한 주 정도 안 쓰고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선생님 부디 좀 관심을…)
처음에는 아기자기하게 오가는 게 많은 한국 시스템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 알림장을 적는 시간이 선생님들께는 큰 부담이자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임을 알고 욕심을 버렸다. 내가 대학에서 아이들 중간 기말 페이퍼에 코멘트를 달아봐서 안다. 일일이 뭔가를 써준다는 게 얼마나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는 일인지를. 나만해도 내가 할 일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달라진다. 선생님들이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가져주고 더 적절히 보살펴주시는 것, 그거면 됐지.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은 그런 알림이 오면 하루에 한 30분 정도는 족히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을 인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고마운 시스템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독일의 무뚝뚝한 시스템이 나의 부모로서의 분리 불안을 조용히 잠재운 것이라고나 할까.
아이들이 가 있는 동안 오롯이 내가 할 일에 집중하면,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 기꺼운 마음으로 더 새롭게 아이들과 만날 수 있다. 나도 내 새끼의 하루가 궁금하지만, 그렇게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하며 안달복달하는 것은 부모의 못난 분리 불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따로 또 같이
나는 무얼 할 때 굉장히 집중하는 편이라 (집중력이 좋은 게 아니라 멀티 불능이다. 걸으면서 물을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신기하다.) 주변 상황에 굉장히 무심해진다. 연애 시절 남편이 옆에 왔는데 눈길도 안 돌리고 페이퍼 쓰는 데 집중하다 남편이 크게 상처 받은 적이 있고, 지금은 글 쓴다고 아이들을 가끔 밀어내 아이들이 상처를 받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밀어내다가도 의식적으로 올 스탑, 모두 접고 아이들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그들의 참견이 싫지만은 않다.
내가 뭔가를 쓸 때 내 무릎에 올라앉아 워드 프로그램 눈금자에 보이는 숫자를 세는 첫째 아이가 귀엽다. 토실한 엉덩이를 들이밀며 낑낑 올라와서 엄마 무릎에 앉는 순간, 모든 것을 얻었다는 듯 만족한 표정으로 히죽 웃는 둘째의 웃음을 사랑한다.
나는 원래 굳이 함께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거실에서 남편은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듣고, 나는 글을 쓰고, 큰 아이는 좋아하는 메이즈 볼을 하느라 초집중하고, 작은 아이는 좋아하는 그림책을 보며 안에 있는 컵케익을 세고.
이렇게 한 공간에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잔잔히 흘러가는 시간.
이럴 땐 집 안에 옅은 하늘색이나 말간 연두색이 채워지는 느낌이고, 소소히 집 안을 떠다니는 먼지조차도 평온의 입자를 안고 따뜻하게 반짝거리는 것 같다.
“내가 뭐 해 줄까?”하고 묻는 남편에게 아마 내가 가장 많이 한 대답이 “그냥 거기, 옆에 있어 줘.”였을 거다.
내가 살고 있는 독일은 분리가 빠른 나라다.
14세(우리나라로 치면 중2)부터는 보호자가 있다면 함께 맥주나 와인, 샴페인을 마실 수 있고, 16세부터는 보호자 없이도 마실 수 있다. 학교 축제에서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흥겨워한다. 18살이 성년이기 때문에, 원칙상 고등학생이 부모 동의 없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독립해서 살 수 있는 나라이기도하다.
말할 때 목소리가 삐약거리는, 아직 기저귀도 떼지 못한 우리 토실이 막내가 약 10년 정도 더 자라면 옆에서 맥주를 들이켤 생각을 하면 기분이 이상하다. 그걸 보면 흐뭇할까, 꼴사나울까.
내 눈에는 아이돌 뺨치게 생긴 우리 첫째가 고등학교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집을 나가 살겠다고 하면 어쩌지. 허허허.
미국에도 아기 때부터 적절한 분리를 해내는 것을 어떤 사명처럼 생각하는 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
수면교육이 특히 그랬다.
미국에서는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잔다는 개념이 없었기에, 안전을 위해서도 아이들은 무조건 아이 침대에서 자야 했다. 그렇게 배웠고 문화가 그랬던 탓에, 첫째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혼자 아기 침대에서 자는 법을 익혔었다. 나는 혼자 자는 아이를 보며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둘째가 나고 우리가 독일로 이사를 하면서, 과도기를 거치느라 어쩌다 보니 우리는 다 같이 모여 자게 되었다.
남편이 먼저 독일로 가서 살 곳을 마련하고 새 연구소에도 적응하는 동안, 나는 백일이 되지 않은 둘째와 한창 호기심 많은 첫째를 혼자 돌볼 수가 없어서 캐나다에 있는 언니네 집에서 잠시 신세를 졌다. 한 방에서 나와 아이들이 모두 뒹굴거리며 놀고, 그러다 잤다.
어쩔 수 없이 뭉치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오히려 더 큰 기쁨을 느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꼬맹이들을 양 옆에 끼고 누워있을 때 참 행복했다.
함께 누워 같이 그림자놀이도 하고(고마워요 스마트폰), 얼굴을 어루만지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옛날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 조그만 손을 손에 쥐고 잠을 청하면, 그 단풍잎 같은 손을 통해 내 몸이 충전이 되는 것 같았다.
신기했다. 내 손안에 온 우주가 든 것 같은 놀랄만한 충만감이었다.
독일에 와서도 처음에 침대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함께 자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우리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침대를 사지 않고 있다.
지금의 나는 온 식구가 함께 잠드는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잠들기 직전이 캄캄하고 조용한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인 것 같다.
아이들은 아직도 자기 전에 보는 그림자놀이책을 엄청나게 좋아하고 (반복하다가 내가 먼저 잠들 지경), 잠들기 전에 엄마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리광 부리는 것도 좋아한다.
옆에 누워서 오늘 뭐가 재밌었는지, 내일은 뭐하고 싶은지 재잘대는 소리를 듣는 것도 즐겁다. 먹보 둘째는 주로 오늘은 뭘 먹었는지, 내일은 뭐가 먹고 싶은지 사서삼경 읊듯 읊어댄다.
이 행복한 시간의 부작용이 있다면 단층의 원리를 몸소 체험한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엄마의 S라인을 이렇게라도 잡아주려는 그 효심이 지극하다.)
자다 보면 양 옆으로 가해지는 힘.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단층의 원리를 몽롱한 정신상태로 체험한다. ⓒ a little teapot 글쎄. 아이를 키우는 방식에 있어 딱히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혼자 자는 아이를 볼 때 느꼈던 뿌듯함보다 지금의 행복이 나에게는 더 큰 것 같다.
아이들도 엄마 아빠와 낄낄거리다 잠드는 순간을 좋아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나도 행복하고 아이들도 행복하면 뭐 괜찮지 않을까.
사실, 얼마나 예쁜가.
아이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눈길과 손길로 나를 어루만지고 바라보는가.
내가 아이를 안고, 아이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는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얼굴, 사랑이 가득 담긴 그 작고 반짝이는 눈빛을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다.
3년 전, 놀다가 자꾸 엄마한테 와서 한 번씩 야도(?) 하고 가던 첫째 아이. 제 늙은 손이 보이시나요. ⓒ a little teapot 아이들은 자라나서 곧 문을 걸어 잠글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도 못 뜬 찐빵 같은 얼굴로 엄마를 찾느라 온 집안을 헤매고 다니는 일도 곧 없어질 것이고, 내가 샤워하는 욕실 앞에서 두 녀석이 진을 치고 기다리는 일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어미 본 아기, 물 본 기러기”라는 속담이 있다.
언제 만나도 좋은 사람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란다.
이 찬란한 분리 불안의 시기는 곧 지나겠지만 나는 우리 아기들에게 언제 만나도 좋고 기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잘 분리되어 각자 기쁘게 세상을 만나고 다시 또 사랑의 마음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아이들과 평생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