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아직 젖을 떼지 못했던 시기, 나는 주말에 독일어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독일어를 배워 B1(한국어 능력시험 급수 같은 것) 자격증을 따고, 독일 문화와 역사, 사회 전반에 걸친 오리엔테이션 코스를 듣고 테스트에서 일정 수준을 통과하면 그간 들었던 모든 비용의 절반을 국가에서 대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메르켈 언니 고마워요.
이 프로그램의 최대 난관은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첫째는 엄마가 공부하러 안 갔으면 좋겠다고 울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좀 컸다고 대체로 괜찮았다.
문제는 둘째.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각종 트릭이 집안에 난무했다.
수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면 종종 아이들 사진이 전송되어 오곤 했는데, 첫날에는 둘째의 아임 크라잉 3종 세트가 도착했다.
수유 쿠션을 들고 울부짖는 사진.
엄마 옷을 안고 울부짖는 사진.
엄마가 신던 슬리퍼를 안고 울부짖는 사진.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와 더불어 아빠의 더운 땀이 느껴지는 공감각적 사진들이었다.
아이가 귀엽고 안쓰럽고, 아이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사실 나는 은밀한 해방감을 만끽했다. 후훗. 여기선 내 맘대로 화장실도 갈 수 있지.
집에서 화장실에 있을 때, 화장실 스릴러: 나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아기에게는 엄마가 밥이고 옷이고 집이고 세계다.
아빠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만 그렇다.
남편은 섭섭해하는 듯도 했지만, 애들이 나만 찾는 상황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바빠 죽겠는데 옷도 엄마랑 입고 싶고, 기저귀도 엄마랑 갈고 싶고, 치카도 엄마랑 하고 싶고, 잠도 엄마랑 자고 싶은, 뭐든지 엄마랑 하고 싶은 아가들. 그리고 “애들이 나랑은 하기 싫대-“ 하며 어정어정 아이들을 들고 오는 그대.
그럴 때마다 슬그머니 분노의 쓸개즙이 샘솟는 것 같았는데, 그대가 혼자서 씨름할 생각을 하니 왜 맨 입에서 참기름 맛이 나지. 흐흐흐.
저게 1년 반쯤 전이었는데, 상황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새벽부터 아이들에게 내 몸과 영혼을 모두 내어 준 며칠 전 휴일 오후.
허리가 아프고 너무 쉬고 싶었다.
2층 침대 위층에 아이들 몰래 도루 주자처럼 숨어 들어갔다.
세이프! ⓒ LG 숨 죽이고 흐뭇하게 누운 지 5분도 되지 않아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엄마 여깄네에!”하고 꾸역꾸역 올라와 두 녀석이 내 옆에 (혹은 내 위에…. 쿨럭) 드러눕는다. 뭐지. 어떻게 알았지. 나한테 냄새나나.
글을 쓸 때도 그렇다. 아이들은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뭘 쓰는 꼴을 못 보고 기어이 내 무릎 위로 올라오고야 만다. 첫째는 내 무릎에 앉더라도 엄마가 쓰는 글을 망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둘째는 쇼스타코비치에 빙의해 곧바로 광란의 키보드 연주를 시작한다.
아가들은 어째서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나랑 딱 붙어 있으려고 하는 걸까.
그렇게 붙어있고 싶으면 내 말이라도 좀 잘 듣던가.
분리 불안 (separation anxiety)
분리 불안은 사람이나 물건 등 애착 대상으로부터 분리될 때, 혹은 분리될 것으로 예상될 때 불안감을 느끼는 증상을 말한다. 아이들에게 거쳐 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이라고 한다. 애착 대상과 떨어지게 되면 심리적 안정을 위해 대신할 물건을 찾기도 하는데, 스누피 만화에 나오는 라이너스의 담요가 유명하다. 담요를 항상 질질 끌고 다니고 손가락을 빠는 이 귀여운 꼬마 철학자가(데카르트를 인용한다!) 어찌나 유명했던지 ‘라이너스의 담요(Linus Blanket)’는 심리학 용어로 굳어지기까지 했다.
스누피야 자꾸 뺏지 마. 그거 소중한 거란 말이야. ⓒ PNTS 아이들은 8개월 무렵이 되면 서서히 낯선 사람이나 새로운 곳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아기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인지하고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뜻하고 포근한 엄마와, 얼굴에 가시가 나서 조금 까칠하지만 역시 따뜻한 아빠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엄마 아빠 말고도 더 넓은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엄마 아빠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은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고 차츰 느끼고 있다는, 아이의 세상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아주 건강한 표시다.
분리 불안은 보통 두 살 정도가 되면 현저히 감소한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시간 개념이 발달하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지금 내 옆에 없지만 나중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시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을뿐더러 발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에게 분리는 어렵고 고통스럽다.
엄마 가지 마
분리 불안, 홉스가 설명하는 이유와 대책
불안이라는 감정은 전통적으로 학자들의 눈길을 끌어왔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마음속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에 큰 관심을 쏟았고, 현대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에서도 불안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상대와의 관계에서 얻는 만족에 좌우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친밀할수록 분리 불안 증세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1856년생이시라 그런지 분리 불안에 있어서 엄마 얘기만 주로 하신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애 엄마 입장에선 그다지 신통치 않아 보인다. 아니, 엄마와 아이의 사이가 좋을수록 불안이 커진다고 일부러 사이를 안 좋게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나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 아악.)
불안이라는 개념 연구에 큰 획을 그은 라캉(Jacques Lacan)의 말은 꽤 귀담아들을만하다. 그는 불안이 결핍에서 온다기보다 “결핍이 결핍되었을 때” 온다고 말한다(Anxiety occurs when lack itself lacks). 엄마나 아빠가 없어서 불안한 게 아니라, 엄마나 아빠랑 떨어져 보지 않아서 불안하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면 동의의 박수를 물개처럼 치고 싶은 말이다. 그런데 라캉은 분리 불안이 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실패한 분리'에서 온다고 했다. 이 말도 굉장히 의미 있는 말이긴 한데, 조금 문제가 있다. 불안은 미래의 개념이고 분리의 실패는 과거 및 현재의 개념이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사각지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뭐 과거 현재 미래가 어쨌다고? 갑자기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고 술이나 마시고 싶어진다면 가슴을 빡 때리는 이런 예는 어떨까. 연애하다가 헤어진 다음날. (더 좋은 예는 사실 오래 사귀다 차인 다음날… 흠흠. 더욱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건가요.) 내 일상에서 오랜 시간 곁을 차지하며 공기 같았고 햇살 같았던 익숙한 사람. 그 사람이 없어져 혼자서 뭘 하는 게 너무나 어색하고 힘이 드는 그런 시간. 이 분리를 받아들이는 게 너무 힘이 들고, 아직은 내가 사랑했던 상대와 성공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분리의 실패다. 하지만 이미 헤어졌기 때문에, 상대와의 이별을 더 불안해하지는 않아도 된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분리의 실패에서 분리 불안이 오는 게 아니다.
내 생각에 분리 불안과 그 대책을 가장 제대로 들어맞게 설명하는 것은 홉스(Thomas Hobbes)다.
홉스가 ‘분리 불안’이라는 개념 자체를 설명한 적은 없지만, 인간이 가지는 불안과 공포에 대한 명쾌한 설명으로 가장 이름난 철학자인 만큼 그의 이론을 분리 불안에 대입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다.
홉스가 불안과 공포에 관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미래’라는 시간적 개념이다. 돌쇠가 지금 쌀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도 불안한 이유는 내가 내일도(미래) 쌀밥을 먹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내 옆에 있는데도 아이가 불안한 이유는 엄마 아빠가 나중에(미래) 없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쉽게 말하면 국가도 법도 없는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들이 서로 선빵을 날리며 싸우게 된다는 것. (선빵이라는 빵도 출시되면 좋겠다. 내 미각에 선제공격을 가하는 맛.)
인간들이 이런 투쟁 상태로 접어드는 것은 본래 성격이 고약해서가 아니라,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접어드는 것은 인간들이 본래 성격이 고약해서가 아니라,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울고 불고 뒤집힌 풍뎅이마냥 방바닥에서 버둥거리며 엄마 아빠 앞에서 농성을 벌이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성질이 더럽거나 예민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엄마 데려와!!! 이 불안을 해소하려면 그 불안한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해야 한다.
즉, 홉스가 말하는 분리 불안에 대한 해결책은 '예측 가능성을 통한 신뢰 확보'다.
불안이 만연한 홉스의 자연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약속을 통해 규칙을 만들고 법을 만든다.
그래야 컴컴하고 불안한 미래가 어느 정도 투명해지고 예측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야 서로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지금은 나가지만, 2시간 뒤에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
아빠가 지금 너를 이 어린이집에 맡기지만, 너는 오후 3시에 틀림없이 다시 집에 돌아가게 된다는 규칙.
처음에는 그 규칙을 신뢰할 수 없어 울지만, 아이는 그 규칙이 틀림없이 잘 시행되는 것을 알게 되면 차츰 미래에 대한 불안을 거둔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그 규칙을 아이가 신뢰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 그래서 아이와 한 약속을 최선을 다해 지켜 주어야 한다. 신뢰가 쌓여야 예측 가능성이 생기고 아이는 안정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훈육을 할 때도 “너 자꾸 이렇게 떼쓰면 엄마 가 버릴 거야. 너 혼자 여기 있어.” “말 안 들으면 딴 집으로 보낸다.”“자꾸 이렇게 말 안 들으면 경찰 아저씨/아줌마가 와서 너 경찰서로 데리고 간다.” 같은 고전적 3대 위협을 사용하는 것은 아이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기 때문에 좋지 않단다. (애고 어른이고 뻥치지 말자.)
급한 일이 있을 때, 아이가 놀고 있거나 자고 있는 틈을 타 몰래 빠져나오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한다. 아이가 울며 매달리더라도 엄마가 어디를 가고 언제 다시 돌아오는지 잘 설명해 주고 인사를 나눈 뒤에 헤어져야 한다고.
나는 독일어 배우러 갈 때 맨날 수유해서 재워 놓은 다음 남편에게 뒤를 맡기고 튀었다. 허허. 이런.
약속과 규칙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언니네 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간 적이 있다.
둘째는 아직 세상 구분이 안 되는 와생동물 상태였고, 첫째는 두 살이 조금 넘었었다.
항상 만나고 싶었던 지인이 마침 밴쿠버에 거주하고 있어서 언니에게 아이를 잠시 맡기고 나가 점심을 먹고 돌아오려고 했다. 언니도 나도, 내가 몰래 나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노는 틈을 타서 몰래 나오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밖에서 지인의 차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살짜리 아이는 창 밖을 내다보며 엄마를 발견하고는 애타게 불렀고, 곧 폭주하기 시작했다.
저런 땡깡은 나도 처음 봤다. 불을 뿜는 지옥의 드래곤을 보는 느낌. 언니가 도저히 달랠 수 없어서 내가 다시 들어갔다. 아이를 달래고,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엄마가 나갔다가 밥 먹고 다시 올 거야.”라고 했더니, 어머나. 아이는 거짓말처럼 울음을 멈췄다. 그리고 놀기 시작했다.
언니랑 나는 마주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아, 두 살짜리 아이도 약속을 해 주면 불안을 거두는구나.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하는 과정도 이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규칙’이라는 홉스적 시스템이 그대로 반영된 프로세스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에서는 아이의 적응을 위해 약 4주가 소요되는 ‘Berliner Settling Model(베를린식 적응 모델)’이라는 걸 쓰고 있었는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아이들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점차 줄여가기 위한 방법이었다.
나에게 '베를리너'는 얜데… (체리잼은 안 넣어줬으면 하는 소망이.. 신 잼 싫어요.) 오른쪽은 화방에서 발견한 Berliner Mauer (베를린 장벽)! :-)
방법은 간단하다.
첫 3일간은 분리는 없고, 엄마나 아빠 등 양육자가 아이와 함께 교실에 들어가 시간을 보낸다.
4일째 되는 날 첫 분리 시도가 이루어진다. 양육자가 짧고 간결하게, 헤어진다고 이야기해 주고 10분 정도 아이가 혼자 견딜 수 있는지를 본다. 달래지지 않는 상황에 대비해 양육자는 다른 방에서 대기한다.
그 뒤로 4주간 점진적으로 아이가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린다.
꼬질꼬질해진 안내문. 읽어보셔도 좋지만 눈이 아프실 겁니다. ⓒ a little teapot 아이는 이 방법으로 무리 없이 3주 정도에 적응을 완전히 마쳤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엄마나 아빠가 나를 데리러 온다는 것.
그 규칙을 믿고 아이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많은 친구가 생겼고, 집 밖의 세상을 알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