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다니던 대학 병원에는 학교 학생들과 식구들을 위한 특별한 출산 프로그램이 있었다. 1인실을 쓸 수 있는 우선권을 주고, 산모와 아기에게 작은 선물도 주고, 보험이 커버되지 않는 범위의 co-pay를 병원 측이 부담하고, 병원에서 제공하는 모든 출산 예비교실에 무료로 참석할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배려가 있었다.
그중 가장 크게 도움이 되었던 건 출산 예비교실이었다.
임신출산오리엔테이션, 분만실과 입원실 견학, 아기 돌보기의 기초, 모유수유 교실, 아기를 위한 응급조치와 심폐소생술, 무통이나 수중분만 등 각종 분만법, 임신부의 건강 케어 및 운동법에 대한 조언 등 다양한 수업이 있었고, 동생이 태어나는 어린이들을 위한 클래스와 새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시는 분들을 위한 클래스도 있었다.
교실에 앉아 있는 게 전공인 나는 거의 모든 클래스를 섭렵했는데, 그중 특히 도움이 되었던 것은 소아과 의사와 소방청 직원이 한 팀으로 진행했던 신생아 안전에 관한 수업(Child Safety Class)이었다.
그분들이 가장 강조했던 것은 아직 뇌 손상을 받기 쉬운 아기를 격하게 흔들지 말라는 것, 그리고 아기 침대 안에 아무것도 넣지 말고 아기만 넣으라는 거였다. 특히 인형이나 베개, 책, 이불 같은 것을 절대 넣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이는 그냥 시트를 깐 매트리스 위에 브리또처럼 잘 싸서 올려두면 되는 것이었다.
인형이나 베개, 이불 같은 것은 신생아의 숨을 막히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아. 저 귀여운 폭신이들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흉악범 테디 선생 ⓒ a little teapot
청소 도구나 세제류는 어른들에게도 더럽고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는 물건들이라 주의를 기울일 수 있어서 차라리 낫다. 쏟아지고 넘어질 위험이 있는 가구(특히 TV나 고정되지 않은 신발장 같은 것)라든가 감전 위험이 있는 콘센트, 뾰족한 모서리 등도 대충 예상은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전혀 위험하거나 독성이 있는 물질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 그렇지만 아기들에게는 위험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를테면 베이비파우더.
기저귀 갈아 줄 때 옆에 두고 쓰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가 툭 쳐서 가루가 얼굴에 쏟아지면 질식 위험이 있다. 조금 커서 여기저기 탐험하며 돌아다니는 경우, 밀가루도 마찬가지.
다음으론 엄마화장품.
크림처럼 듬뿍 입에 넣고 먹어버리면 내성이 없는 아이들에겐 문제가 될 만큼의 독성물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코로 들어가도 아기들의 작디작은 콧구멍으로부터는 빼기가 어려워 숨이 막힐 수 있어서 문제. 기저귀 가방 안에 핸드크림이나 아이들 발진 크림을 꼭 넣어야겠다면 아주 소량으로 나온 샘플을 넣는 게 그나마 안전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른들이 먹는 약.
아이들 눈에는 사탕처럼 예쁘게 보여 입에 넣을 위험이 크다고 했다. 의사는 수유하는 엄마들이 계속 챙겨 먹는 철분제를 특히 조심하라고 했다. 몇 알씩 따로 담아 기저귀 가방 안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은데, 기저귀 가방은 아이들이 잘 뒤지고 노는 보물상자이기 때문에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소방청 직원은 세탁기 안에 한 알만 던져 넣으면 되는 캡슐형 세제를 특히 조심하라고 했다. 색깔이 예뻐서 아이들에게 매력적인 데다 말랑말랑 입에서 잘 터지기 때문에 최근 사고가 잦은 물건이라고 했다. 바닥에 두지 말고 아이들이 잘 열 수 없는 상자에 담아 높은 곳에 보관하라고 당부했다. 이제 쓰는 사람은 많이 없지만, 옷장 속 나프탈렌도 주의하라고 했다. 아이들 눈에는 그냥 박하사탕이라고.
그다음으로는 창문 블라인드 줄.
줄이나 끈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아이들이 갖고 놀다가 목에 감겨 질식하거나 심한 경우 목뼈가 부러진다고 했다. 아악.
그 뒤로도 한참, 평소에 아무 생각 없었던 물건들이 잠정적 살인범 및 흉악범들이 되어 줄줄이 소개되었다.
아기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수배범 리스트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햇빛도 물도 땅도(아이들은 화분에서 흙 주워 먹는 것을 즐긴다) 위험하다.
아이에게 마음껏 노출시킬 수 있는 건 공기뿐이려나. (...라고 썼더니 떠오르는 황사와 미세먼지...)
아 이 새끼 언제 크지
소인국에 떨어진 걸리버 엄마
돌아와 집 안을 둘러보니 온 집안이 흉악해 보였다.
부드럽고 안온한 파장을 내던 집안 공기가 갑자기 불안한 느낌의 파열음을 내는 느낌.
평화롭던 집안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모든 사물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이 공간을 다른 시선으로 보아야 했고, 허용 가능한 범위에서 재조립해야 했다.
나는 소인국에 떨어진 걸리버 엄마가 되었다.
나는 대인국의 환경에 익숙해진 대인이지만, 곧 태어날 약하디 약한 소인을 위해 나에게 이미 익숙한 세상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야 했다.
높아진 눈을 다시 아래로 하고 새롭게 세상을 보아야 했다.
(걸리버 여행기는 그런 면에서 시선 바꾸기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작품이다. 소인국에서 대인국으로, 다시 말들의 나라로 여행해 그곳에서 적응하는 걸리버를 보며 우리는 다각도로, 입체적으로, 낯설게 보기를 체험한다.)
아기 침대에 모빌을 달아줄 때 흔히들 하는 실수가 있다. 어른의 눈높이에서 옆으로 볼 때 예쁜 모빌을 골라 달아 주는 것. 누워 있는 아기는 주로 모빌의 아랫면을 보게 되는데, 막상 옆에서 볼 때는 예쁜 모빌이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심심한 경우가 많다. 이는 내 시선을 타인의 시선으로 옮겨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점점 높아진 내 눈을 다시 아래로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인인 걸리버가 소인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눈높이에서만 삶을 살면 저런 일이 벌어진다. 소인들을 불러놓고 “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빌을 봐! 정말 귀엽고 예쁘지 않니?” 하고 외친들, 소인들 눈에는 동물들의 발바닥과 엉덩이만 보이는데 그게 뭐 그리 귀엽고 예쁘겠는가.
그렇게, 집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을 일일이 아이의 입장에서 새로 보아야 했다.
이 작은 녀석이 안전하고 재미있게 지내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은 위험할 수 있는 물건들이 많다고 스스로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야 했다. 똑같은 상처도 엄마가 웃으면서 “괜찮아, 별 거 아니야,” 하는 경우엔 덜 아픈 것 같은데 엄마가 호들갑스럽게 소리를 지르면 훨씬 아픈 법.
내가 불안하다고 아이를 우리에 넣어 키울 수도 없지 않은가. 아이는 좀 다치더라도, 좀 놀라더라도, 세상을 만져보고 그 위에서 걷고 뛰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최대한 아기에게도 안온한 파장을 내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어 보지 뭐.
모빌 달 자리 아래에 얼굴을 넣어보고 아, 아기가 주로 보는 공간은 이렇게 보이겠구나, 하며 둘러보는 우리 집은 내 눈에도 새로웠다. 그네를 타다 머리를 아래로 하고 거꾸로 보는 세상이 신기하고 재미있듯이, 시선을 돌려보니 신기해 보이는 게 꽤 많았다. 아기가 주로 눕는 곳 바로 위로는 눈부신 조명이 없게끔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머리를 그렇게 넣어보고서야 들었다.
아기가 세상에 오고 나서는 땅따먹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아기가 움직이지 못하니 신경 쓸 공간이 딱히 넓지 않았다. 그러나 차츰 아기의 기동성이 좋아지고 손이 닿는 높이가 밀물처럼 차오르자, 아래쪽에 있던 위험한 물건들은 모두 높은 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만지지 못하게 하고 싶은 엄마와 만지고 싶은 아기의 대 추격전. 아기가 처음으로 부엌 서랍장 앞에 의자를 놓고 버둥버둥 그 위에 올라가 호모 파베르의 미소를 씨익 지으며 엄마를 돌아다봤을 때(단숨에 높이가 +30 증가하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아악 소리가 나왔지만 그건 엄마에게도 아기에게도 귀중한 성취이자 발전이었다.
우리 집은 대인도 소인도 함께 자라며 즐거운 곳이어야 했다.
남이 되어보는 연습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것을 새로 배우지만, 가장 귀한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남이 되어보는 연습을 한다는 점이다. 그간 내가 주인인 일인칭 시점의 세계에서 살아왔지만 아기를 통해 내 시선이 변화한다는 것.
내 시선이 변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도 당연히 조금씩 변화한다.
아이들 그림책에는 그런 깨달음의 순간들이 많다. 시선의 차이로 인해 다르게 보이는 것들. ⓒ Yusuke Yonezu <Guess what?> 세트로 모두 소장하고 싶었던 귀여움.
철학에서 남이 되어본다는 것, 낯설게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초월해 보는 것은 보통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장자는 목숨을 걸고 스턴트맨처럼 수레를 바꿔 타라 말했고, 니체도 레비나스도 나와 타자 사이의 그 어쩔 수 없는 긴장을 이야기했다. 맹자는 슬픔과 분노에 차 있는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을 말했고, 롤즈(John Ralws)는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이성적으로 뒤집어써 보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제안했다. 모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 혹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보고자 하는 시도들이지만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긴장과 고통, 혹은 자의식적 노력이 수반된다.
그저 아기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면서 순수하고 기쁜 마음으로 시점을 전환시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조그만 타인을 위한 순전한 변화.
1인칭의 내 세상에서 내려와 스스로 조금 낮아지는 데도, 거기에 어떤 긴장이나 고통이 크게 따르지 않는 경험.
그간 세상은 1인칭인 내가 주인공이었는데, 1인칭으로만 바라보던 세상을 기쁘게 조금씩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 부모다. 이제 이 조그만 녀석을 위해 나는 기꺼이 조연도 되어 줄 수 있고 가끔 필요하다면 무심한 배경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재주 넘치고 사랑스러운 후배 H 양.
보는 사람 심장에 무리가 가는 귀여운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그녀는 “예전의 나는 내가 주인공이 되기만을 바랐는데, 이젠 내가 이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였구나 생각할 때 더 벅차다”고 했다.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가 무척 맘에 들었던 지점은, 주인공 쿠퍼가 '아, 그들이 선택한 건 내가 아니고 내 딸이었구나'를 깨닫는 지점이었고 그 순간 왈칵 눈물이 나기도 했다고.
암요. 님들이 주인공이십니다. (출처: imgur)
위험과 안전 사이에서 슬기롭게 줄타기
하지만 이 시선의 변화가 너무 극단적이어서는 안 된다. 아이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계속 혼자 주인공으로만 사는 부모도 슬프지만, 나를 완전히 버리고 아이만 존재하는 것처럼 사는 부모도 슬프다.
내가 밥을 못 먹더라도 아이 입에 따뜻한 밥을 넣어주고, 나는 몇 년째 옷을 못 사도 아이에게는 철마다 알록달록 고운 옷을 입히고, 이런 게 ‘엄마의 마음’이지만 이런 게 ‘엄마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내 아이라 해도, 자아를 잃은 채 아이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아이의 욕구에만 반응하며 사는 삶은 너무 서글프다.
소인국에서 소인들과 더불어 즐겁게 사는 방법을 터득했던 걸리버처럼, 대인과 소인이 함께 즐겁게 지내며 서로 시선을 교류해야 한다.
원작을 읽어보면 심오하기 그지없는 걸리버 여행기. 걸면 걸리는 걸리버. (그런데 이 광고를 아시는 분들이 계시려나. 흠흠.)
시선을 아이에게 고정하면서 눈을 너무 안전 쪽으로만 극단적으로 돌려서도 안 된다.
육아 용품 중에는 Play Pen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기를 가둬두는 울타리다. 아기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아직 뭐가 위험한지에 대한 개념은 없을 때, 그곳에 잠시 넣어두면 엄마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안심하고 샤워를 해도 좋고, 아기가 옆에 올 위험이 없이 다림질을 해도 좋았다. 하지만 이게 편하다고 해서, 혹은 안전하다고 해서 아이를 종일 이 안에만 넣어두면 아이는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Play Pen. 저기 씨익 웃고 있는 엄마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었다. (출처: babysecurity.co.uk)
시선을 아이에게 돌리긴 돌렸는데 어른의 입장에서 왜곡된 시선을 돌려도 문제가 된다.
미국에서 임신과 출산을 겪는 것이 낯설어, 가끔 들르며 정보를 얻었던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었다. 그곳의 한 엄마는 이유식을 할 때 아이 손을 항상 의자에 묶어 놓고 음식을 받아먹게 했다고 한다. 포크 같은 것에 눈이 찔릴까 겁이 났고, 아이가 자기 옷과 손과 얼굴과 식탁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 싫었다고 했다. 평화롭고 안전하고 깨끗했을지 몰라도 아이는 커서 도구 사용에 어려움을 겪었고, 또래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포크나 가위 같은 도구를 적절히 사용하지 못해 더 위험해지고 말았다. 그 안쓰러운 엄마는 또래보다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는 아이의 상태에 절망하며 익명의 게시판에서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위생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머니께서 정말 좋은 재료로 만든 신선한 음식만을 신경 써서 먹여 키우셨다는 한 언니가 있다. 야무지고 참 고운 언니. 그런데 이 언니는 길거리에서 떡볶이(나의 애국심의 근원)나 어묵 같은 음식을 사 먹으면 자주 탈이 난단다. 외국으로 여행을 가도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건 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했다. 1급수에만 산다는 산천어처럼, 좋지 않은 식재료의 생물 지표랄까. 한 번은 시어머니께서 끓이신 국을 먹자마자 탈이 나서 식구들이 맛있게 국을 먹던 식탁을 어색하게 만들었다는, 마냥 웃지 못할 얘기도 들었다. 나는 엄마가 젖병에 분유를 타 주면 마당에 들고나가 나 한 입, 강아지 한 입, 이렇게 나눠 먹었다고 한다(어후 뭐라고요 엄마). 그렇게 커서인지 조금 상한 것 같은 음식을 함께 먹어도 나는 탈이 잘 안 난다. 내가 더 더러워서 그런가 보다. 흠흠. 어떤 선을 지켜야 할지 기준을 잡는 것이 좀 어렵겠지만 어차피 세균이 가득한 세상, 적당히 더럽게 큰 아이가 건강하다는 건 맞는 말인 듯하다.
아이들 놀이터 역시 그렇다. 놀이터 디자인에 있어서도 위험과 안전 사이의 슬기로운 줄타기가 중요하다. 너무 안전만 신경 써서 누가 봐도 뻔한 놀이기구는 재미가 없고 배우는 것도 많지 않다. 적당한 선에서 아슬아슬함도 느껴보도 위험한 경험도 하고 조금은 다쳐 보기도 해야, 아이들은 자기 몸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몸으로 배우게 된다.
물론 아이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위험요소를 준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좀 위험해 보인다 싶으면 그렇게 내버려두기가 어렵긴 하다. "아아 어우ㅊ이;ㅏㄴ;;ㅋㅍㅚㅏㅈ.,ㄷㅠ러ㅏ 안돼애애애애애애!!!" 보다는 "조심해~!" 하며 웃어주려고는 하지만, 나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게 된다.
중용이란 게 평생 그렇게 어려운 숙제다.
뮌헨에 있는 놀이터들 (左: 이 정도는 돼 줘야 스릴이.. 흰 옷 주목 / 右: 저 신나는 거대 미끄럼틀을 보고 제가 더 소리 질렀다는 것은 비밀) ⓒ a little teapot
넓어지는 시선
어른들의 입장에선 전혀 위험한 물건이 아닌데 갓 태어난 아가들에게는 위험할 수 있는 물건을 생각하다 보니,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전혀 위험한 게 아닌데 다른 동물들에게는 위험할 수 있는 경우에 생각이 살짝 가 닿았다.
예를 들면 개와 초콜릿.
고양이와 포도.
말(馬)과 토마토.
물고기들과 포장 비닐.
북극곰과 에어컨.
지나가다 우리 아이 얼굴에 담배 연기가 훅 와 닿으면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도 짜증이 훅 솟아오르는 게 엄마들이다. 특히 유럽은 담배에 관대한 문화라, 주차장 엘리베이터 안에 끄지 않은 담배를 들고 타는 사람이 있어 나는 뭉크의 절규 같은 얼굴로 기함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동안 프레온 가스를 아기곰 얼굴에 훅 부어댄 타인은 아니었을까.
엄마 북극곰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기곰일 텐데.
너무 비약인 걸까 생각해 봐도, 분명히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엄마가 됨으로써 얻는 또 다른 귀한 교훈이다.
내 새끼가 예쁘면 남의 자식들도 예쁘고, 세상의 삐약거리는 모든 작고 약한 것들이 사랑스럽고 안쓰럽다.
1인칭의 세상에서 내려와 낮은 곳을 볼 때 우리는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느낀다.
이런 깨달음의 기회를 주니 아기란 참 고맙고 신기한 존재다.
우리 집 꼬마들이 이제 자기에게 위험한 것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은 나이가 된 지금, 현재 우리 집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은 마커(a.k.a 유성매직)다.
와. 이게 이렇게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무기인 줄은 내 미처 몰랐다.
천, 플라스틱, 종이, 벽, 유리 등 재질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파괴가 가능한 신무기. 흉악하기 그지없는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