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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리사무소 실장님 오래 계셔주세요

4층에 든든한 그녀가 있다

by 밀도

작업실 입주 날, 아주 날씨가 좋았다.


관리사무소부터 들렀다. 관리사무소는 4층에 있었다. 파티션 쳐져 있는 개인 자리가 네 자리인 거 보니 아마도 서너 분 정도 근무하고 계시는 듯했다. 하지만 파티션 높이가 꽤 높아 각각의 자리에 모두 앉아 계신 건지 안 계신 건지 분간이 잘 안 됐다.


맨 앞자리에 계신 여자 실장님만 제대로 보였는데 그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응대해 주셨다.


“오늘부터 10**호 입주하게 돼서 왔어요.”


라고 말씀드리며 계약서를 보여드렸다.

입주자 등록을 위한 ‘개인정보 확인’‘사업자등록증 제출’을 말씀하시길래 사업자는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세금계산서를 주민번호로 발행하시겠노라 하셨다.


“입주하신 분 중에 사업자가 아닌 분은 안 계셨는데 처음이시네요. 사업을 시작하게 되시면 그때 알려주세요!”


계약서 쓸 때 임대인으로부터도 들었던 그 단어 ‘사업자’를 또 듣게 되었다. 오피스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해당되는 부류가 ‘사업자’인 게 확실해졌다.

내 인생에 들어와 있지 않았던 단어, 양가 직계 가족 중 아무도 아직 겟 해보지 않았던 포지션인데, 나를 처음 본 관리사무소 실장님은 아무 의심 없이 나를 ‘예비사업자’로 받아들이고 계셨다.


이쯤 되니 ‘사업자’란 단어에 궁금증이 확 솟구쳤다. 방송작가 본능에 따라 순간 내 머릿속엔 관련 인터뷰 질문들이 뽑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Q. 실장님, 이 빌딩에 입주하신 분들은 어떤 사업자들이 많나요, 랭킹 5를 뽑아본다면?

Q. 저는 어떤 사업을 하면 어울릴 것 같나요? 첫인상만으로 접근해 보신다면?

Q. 다년간 업계를 지켜보신 경험으로 봤을 때 앞으로 유망 사업종목 베스트 3을 뽑아본다면?


차라도 한 잔 할 시간이 있었다면 분명 은근슬쩍 스몰토크를 빙자한 인터뷰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입주등록을 신속히 마치고자 소파에 한쪽 엉덩이만 대충 걸친 입주자 아니었던가.


머릿속에 주르륵 생성되고 있던 인터뷰 질문지 글자들에 재빨리 BACK키를 눌러 없앤 후 이어서 해주시는 말씀에 집중했다.


관리비 지로고지서가 익월 18일경 발송되며 관리비 납부일은 31일까지고, 보내는 사람 이름 대신 ‘호수’를 꼭 적어달라는 당부. 중앙냉난방시스템 건물이라 에어컨, 온풍기 가동은 절기마다 새로 공지하겠다는 점, 분리수거장은 지하 1층에 있고 상시수거하고 있으며 참고로 입주가 잦은 요즘은 폐기물이 많더라는 말씀.


주차는 지하 1층~지하 5층까지 이며 아직 오피스 공실이 남아있는 만큼 당분간은 주차 상황이 여유로울 거라고. 무료 차량등록은 기본 한 대 가능하고, 방문객들은 총 4시간 주차가 가능하니 전용앱을 깔고 사용하란 이야기.


공지사항 중에서 가장 내 흥미를 끈 건 바로 ‘방문객 무료주차 지원’에 관한 것이었다. 방문객에게 1시간 무료할인권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며, 그 이상을 초과할 경우 내가 자비로 유료권을 구매해서 3시간을 더 방문객차량에 등록해 줄 수 있었다.

30분짜리는 200원, 1시간짜리는 400원이었다.


쇼핑몰에 가면 구매내역에 맞게 1시간, 2시간 넣어주던 주차할인권이 이런 시스템이었구나!


할인을 받을 때마다 막연히 궁금했었는데 내 작업실을 갖게 되어서야 시스템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집 suv 차는 주로 내가 가지고 다니므로 그 차를 등록했다. 가끔 남편이 작업실 들를 때는 남편의 회사 차량으로 오곤 했는데 그땐 주차할인권을 사용했다. 어쩌다 친구들이 차를 가지고 왔을 때 주차가 해결된다는 점이 아주 좋았다. 할인권을 받던 입장에서 발행해 줄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는 게 나름 신기했다.


궁금한 것들을 다 묻고 나니 10여 분 정도가 흘러있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사이 관리사무소 여자 실장님께 굉장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40대 후반 ~ 50대 초반으로 보이시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에 에너지가 느껴져서 왠지 모를 든든함이 확 생겼다. 연고 없이 혼자 사용할 오피스인지라 나도 모르게 긴장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비록 10층에 있을 테지만 이 건물 4층에 ‘에너지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를 가지고 계신 여자실장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좀 편안하게 해 주었다.


여자분이든 남자분이든 첫인상이 나른하거나 시큰둥했다면 이런 든든함은 생기지 않았을 것 같다. 역시 또 느껴본다. 업무능력이 대동소이할 때 태도가 전부일 수 있음을. 날 향해 미소 지어주신 적은 없지만 10분 남짓의 시간 동안 프로페셔널한 모습 보여주셔서 감사했다.


첫인상 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이후, 문의 사항이 있어서 전화통화도 몇 번 했고, 찾아가서 문의도 해봤는데 그때마다 여자 실장님의 신뢰 가는 목소리와 모습 덕에 안정감을 느끼고 궁금증을 해결하곤 했다. 나 혼자만의 일방적 친밀감이라서 상대방은 전혀 모르고 계실터인데 그렇다고 딱히 친해질 타이밍이 있는 건 아니라서...


또 언제 길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계약이 만료 돼서 전출하게 될 그날에 관리비 정산으로 방문할 때? 아마도 그때가 적기인 것 같다. 그때는 소파에 엉덩이 깊숙이 묻고 옆에 있던 녹차티백 한 잔 하면서


“아직까지도 사업자 없는 분은 저뿐인가요?”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봐야지. 스몰토크를 가장한 인터뷰 좀 스리슬쩍 해봐야지. 에너지 넘치게 이곳을 지켜주셔서 너무 든든했다고 감사 인사도 전해야지.


부디 오래 계셔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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