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를 쓰다
드디어 계약당일. 오후 3시에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마침 회의가 없는 날이어서 집 근처 스터디카페에 있다가 여유 있게 2시쯤 이동하려던 찰나 중개사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임대인 사모님이 오늘 아이 치과 예약을 깜박하셨다네요, 혹시 오늘 오후 4시 30분으로 시간 변경이 가능하실지 여쭤보시네요?]
문자를 받은 난 그 즉시 [가능합니다!]라는 답문을 보내며 쥐었던 차키를 다시 내려놓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류의 약속변경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이 날은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에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실제로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기도 했고.
아직 만나보기도 전이었지만 ‘임대인 사모님’‘아이 치과 예약’ 등으로 미루어봤을 때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내 또래의 주부 같았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라고 생각하니 공감력이 확장되었다.
‘그래, 아이의 치과 예약을 깜박할 수도 있지!’
난 약속시간 5분 전에 도착했다.
공인중개사무소 앞에 주차를 했는데 안쪽 소파에 ‘임대인 사모님’으로 추정되는 분이 이미 와서 앉아계셨다. 갈색으로 염색한 롱기장 웨이브헤어와 화사한 컬러감의 의상조합으로 봤을 때 나보다는 약간 어려 보였다.
나 홀로 운전석에서 내리자 좀 의외셨는지, 중개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혼자 오셨네요? 남편분이랑 같이 안 오시고?”
음... 내 작업실을 구할 거라고 했고 심지어 평일 4시 30분이었는데도 당연히 남편이랑 같이 올 거라 생각하셨다는 게 신기했다. 물론 주말이었다면 남편에 아이까지 데리고 계약서 쓰러 갔을지도 모르겠다만.
암튼, 오월의 어느 평일 오후. 중개사님, 임대인, 그리고 이제 막 ‘임차인의 길로 들어선 나’까지 비슷한 연배의 여자 셋이 소파에 앉아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의식을 치렀다.
제1조 임차인은 보증금 및 차임을 아래와 같이 지불하기로 한다.
보증금 삼백만 원정.
계약금 삼십만 원정.
잔금 이백칠십만 원정. 은 2024년 5월 14일에 지불하기로 함.
차임 이십삼만 원정. 은 매월 14일에 후불로 지불하기로 함.(부가세 별도)
제2조 임대인은 2024년 5월 14일까지 임차인에게 인도하며, 임대차 기간은 인도일로부터 2025년 5월 14일까지 (12개월)로 한다.
...
계약 당사자가 이의 없음을 확인하고 각자 서명. 날인한다.
계약서 안에는 ‘임차인’과 ‘임대인인 나’의 주소와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이름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는데, 내 또래 주부일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놀랍도록 적중했다. 심지어 나랑 출생 연도가 같았다. 1979년생. 첫인상은 나보다 어려 보였는데 동갑이었구나.
“저도 79년생이에요!”
별생각 없이 이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는데 동시에 약간 아차 싶었다. 계약에 상관없는 불필요한 말을 지금 내가 왜 하고 있는 거지?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임대인에겐 임차인과의 교집합이 그리 흥미로운 얘긴 아닌 듯하였다. 내 말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다른 종류의 얘기를 꺼냈다.
“사업자시죠? 사업자등록증이랑 이메일주소 보내주시면 그쪽으로 세금계산서 발행해 드릴게요.”
너무 당연하게 물으셔서 조금 움찔하긴 했는데
“아니요, 저 개인사업자는 아니고요 그냥 개인 작업실로 쓸 건데요.”
라고 말씀드리니,
“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담... 사업자가 아니신 분은 처음이라....”
이쯤 되자 순간 내가 지금 뭔가 애먼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살짝 두려움이 몰려왔다. 개인 작업실로 오피스를 구하는 경우는 진정 없는 거야?
상황파악을 한 중개사무소 대표님께서
“임차인이 작가시래요. 개인적으로 글 쓰실 작업실을 구하신 거래요. ”
중개사님이 부연설명해 주시긴 했지만 당사자인 내가 설명을 마저 하는 게 이치에 맞다고 생각 돼서 흔들리던 멘털을 다 잡고 머리를 굴려 말해봤다.
“제가 프리랜서 작가예요. 제 생각엔 제가 사업자가 아니니까 월세 입금할 때마다 그냥 주민등록번호로 현금영수증 발행해 주시면 될 것 같거든요. 요 사항은 제가 상담받는 세무사님께 한번 더 확인해 보고 문자로 말씀드릴게요.”
이렇게 해서 난 내 임대인이 계약한 임차인 중 ‘비 사업자 임차인 1호’가 되었다. 나와 동갑내기 임대인은 계약서 사인을 마치자마자 아이 학원 다녀올 시간이라며 서둘러 떠났고, 나는 일주일 후 입주날 스케줄을 조율하기 위해 다시 소파에 앉았다.
중개사님과 약간의 스몰토크를 하다가 알게 된 건, 임대인이 내가 계약한 오피스의 다른 층에도 임대를 놓고 계시단 사실. 이 건물에서만 두 곳 이상이고, 다른 곳에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임대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계신 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약한 오피스 건물은 3년 전 분양을 했다고 한다. 당시 분양가가 얼마였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1억 3천 전후였다고 한다. 6.9평 사무실의 분양가가 1억 3천. 만약 내가 월세 세입자가 아닌, 아예 내 오피스를 분양받아서 사용했으면 더 이득이었을까? 잠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거주지 용도로서의 빌라, 아파트 등만 관심을 가져왔었는데 이런 새로운 정보들 만으로도 부동산 재테크에 무지했던 나에게 잠시나마 새로운 자극이 되어주었다.
중개사무소 대표님께 중개보수료 189,090원을 드렸더니 아까 작성한 계약서와 등기부증명서 등 서류들을 플라스틱파일에 넣어 건네주셨다. 그걸 받는데 기분이 참 묘하고도 좋았다.
우리 집 책꽂이 한켠에 각종계약서만 넣어 둔 파일꽂이가 있다. 내가 살면서 주고받았던 계약서들이 차곡차곡 모여있는 곳. 오늘 받은 계약서 파일을 꽂기 전에 그동안 모아두었던 계약서들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프리랜서 방송작가가 본캐인 내가 직업적으로 가장 많이 작성하고 있는 계약서는 단연 ‘프리랜서 업무위탁계약서’이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마다 방송사와 꼬박꼬박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방송사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주로 시작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주식회사 000(이하 "갑"이라 한다)는 최00(이하 "을"이라 한다)에게 프리랜서 업무를 위탁 의뢰하면서 다음과 같이 “프리랜서 업무위탁계약”을 체결하고, 이를 이행할 것을 약정한다.]
직업적으로 내 포지션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도 쭈욱 나는 ‘을’로 명명될 터이다. ‘을’로 표기된 채 계약서를 받아 든 나는 위탁대금(작가료) 항목에 받기로 한 숫자가 제대로 표기되었는지, 정산일은 합리적인지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사인을 하곤 했다.
반대로 내가 ‘갑’이었던 계약서도 하나 들어 있었다.
아파트 올수리 인테리어공사 했을 때 작성했던 계약서.
[상기 내용을 계약함에 있어 발주자를 ‘갑’이라 칭하고, 시공사 00 디자인컴퍼니를 ‘을’이라 칭하여 다음과 같이 계약서를 작성한다.]
위와 같이 시작되는 계약서였다. ‘갑’으로 표기된 채 계약서를 받아 들었지만, 숫자가 제대로 표기되었는지 두 번 세 번 확인해 보는 건 ‘을’ 일 때나 매한가지였다.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 공사총액과 부가세 등에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사인했던 기억.
대학졸업 후 결혼 전까지 서울에서 월세, 전세살이 하며 혼자 살아왔던지라 초창기 대부분의 부동산 계약서에서의 나는 줄곧 ‘임차인’이었다. 그러다가 결혼 후 5년 차 때 실거주아파트 매매 계약서를 쓰면서 처음으로 ‘매수인’의 자리, 엄밀히 말하면 ‘공동명의인’ 자리에 사인과 더불어 인감도장을 찍었더랬다.
내 집 마련 하면서 당분간은 계약서 쓸 일 없겠지~ 하고 살았는데 갑작스레 이렇게 다시 ‘임차인’이 된 계약서를 집으로 들고 오니 너무 기분이 묘하고 설렜다.
빌딩이나 오피스텔 건물 임대사업자 정도 돼야 성공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나도 약간 성공한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임차인이어도 성공한 기분이 들 수 있구나! 예전에는 상상한 적도 없는 자영업자들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그날 저녁, 퇴근 후 돌아온 남편에게 오늘 계약서 쓴 일을 얘기해 주며 혹시나 해서 물었다.
“계약서 궁금하면 한번 볼래?”
그랬더니 됐다고 한다. 굳이 볼 필요 없다고. 앞으로 잘 지내보라고.
그렇게 오롯이 나만의 계약이 이루어졌다. 나 스스로 선택하고 나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월세 23만 원 1년짜리 부동산 계약. 앞으로 잘 지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