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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5월, 최고의 벚꽃 엔딩

드디어 작업실을 구하다

by 밀도

작업실을 구할 때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특정 주제를 가진 창작자라면 주제에 맞게 특화된 지역을 찾아가야 작업물 효율이 좀 더 높아질 것이다.


예를 들어 미술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은 서울 구기동, 신영동, 부암동, 평창동, 홍지동 일대 즉, ‘자문밖(자하문 밖)’ 지역에 주로 작업실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 연대하며 축제 등을 열어 자신의 작업에 시너지를 낸다. 연예인이자 화가인 솔비 씨도 부암동에 개인 작업실이 있다고 들었다.


음악인들의 작업실은 합정, 홍대, 강남에 많다. 대형 아이돌 기획사 사옥 주위에 각종 댄스, 보컬, 작사, 작곡 아카데미도 많고 개인 작업실들이 많다. 개인의 실력을 채우고 작업물을 내기에 좋은 지역이다.


나 같은 현업 방송작가들은 상암동에 작업실을 두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 각종 방송사들의 사옥이 상암동에 몰려있어서 출근을 주로 그쪽으로 하니 각종 미팅 잡기도 편하고 회의 전후 시간을 보내기에 최적의 동선이다.


그래서 나도 처음엔 상암동이나 우리 집 근처 위주로만 알아봤었다.


물론 내 취향과 형편에 맞는 적당한 곳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알아보는 곳마다 조금씩 어긋났다. 상암동이나 우리 동네에서는 내가 원하는 작업실을 만날 인연이 아닌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월세지출을 무리하게 올리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결국 다른 지역의 후보군이 필요했다.


주차 어렵고 월세 비싼 ‘집 근처와 상암’ 말고 대안이 없을까?


해외촬영 후 얻은 기미가 조금씩 옅어지며 방송 일도 점차 안정화되기 시작할 무렵. 다시 작업실 뽐뿌가 5월의 벚꽃잎처럼 쏟아져 내리던 그때! 문득 ‘향동’이란 동네가 떠올랐다.


상암동과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이 아닌 고양시에 속한 곳.

그동안 나의 일상과 접점이 전혀 없었던 곳이었기에 작업실 후보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지역이었지만, 전에 한 번 가봤을 때 좋은 인상을 받았던 곳.


그래, 어쩌면 향동일지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이번엔 꽤나 예감이 좋았다.




사실 내가 ‘향동’이라는 동네를 알게 된 건 방송인 남*희씨 덕이다.


N군(이후 N으로 칭하겠다)과는 오랜 인연이 있다. 2018년 mbc에서 제작에 참여했던 프로그램의 출연자 중 한 명이었다. 10회짜리 예능프로그램이었는데 희한하게도 그때 출연자들과 제작진들이 꾸준히 친분을 유지하며 모임을 가져왔다.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왔지만 모든 팀이 이토록 꾸준히 모임을 지속하는 건 아니기에 나에겐 굉장히 의미 있는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N은 방송에 임하는 태도도 훌륭하고 인간적으로 품성도 너무 좋아 내가 정말 응원하는 출연자 중에 한 명이다.


2024년 3월의 어느 날, N이 옛 프로그램 멤버들과 제작진을 본인의 집에 초대해 줬다. 전달받은 주소를 내비에 찍고 운전을 해서 찾아갔는데 그곳이 ‘향동’이었다.


해 질 녘의 초행길이라 사뭇 걱정도 됐었는데 도로정비가 잘 돼 있어서 운전하기 너무 편했다. 대형 빌딩, 신축빌라, 브랜드 아파트들이 즐비하면서도 쾌적해 인상적이었다. 상암이랑 굉장히 가까운 곳에 이런 동네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N은 그 집에서 요리와 토크를 결합한 유튜브 <실*집>이라는 콘텐츠도 찍고 있었다. 3년째 그 동네에서 살고 있는데 조용하고 괜찮은 동네라고 만족해했던 기억이 났다.


그 이후에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퍼뜩 ‘향동’이 후보군으로 떠오르면서, 갑자기 그날의 초대가 나를 위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궁금하면 바로 출동! 공인중개사 한 번 더 가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훤한 대낮에 다시 찾아간 향동은 훨씬 더 깨끗하고 조용하고 넓은 곳이었다.


신도시라 그런지, 브랜드 신축 아파트들이 즐비하고 대형 오피스 블록도 조성되어 있었다. 새로 짓고 있는 건물도 많아 도로에는 레미콘들이 수시로 지나다녔지만 전체적으로 쾌적하고 조용했다.


저속으로 운전하며 동네 탐방을 삼십여 분쯤 해 보니 일단 동네 분위기는 합격. 그 즉시 가장 부동산이 많이 몰려있는 곳으로 가서 상담을 받았다.


딱 내 또래의 마른 체격 여자 사장님이 짙은 네이비색 슈트를 상하의 세트로 입으시고 왼쪽 귀엔 무선이어폰을 끼신 채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는데, 그동안 내가 갔었던 부동산 사장님들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인상적이었다.


“작가시라니 너무 멋있네요! 여기가 글쓰기 딱 좋은 동네예요! 좋은 조건으로 몇 군데 보여드릴게요”


방송작가라고 세부적으로 말씀드리진 않았지만, 중개사님의 세심함에 벌써부터 감동이 밀려왔다.


향동지구는 다양한 면적의 오피스동, 지식산업센터 빌딩이 굉장히 많았다. 알고 보니 소형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에게 특화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무드에 맞게 나 역시 오피스 타입으로 문의를 했고, 추천받은 두 군데를 방문했다.


후보 1. 9평 오피스 - 보증금 300에 월세 30 (현재 공실, 즉시 입주가능)

후보 2. 6.9평 오피스 - 보증금 300에 월세 23 (전 세입자와 날짜 조율 필요)


둘 다 깨끗했고 주차 편했고 관리비 수준은 5~10만 원 수준으로 비슷했다. 둘 다 1년 계약이 가능했고 내 예산 범위 안에 해당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하나도 거리끼는 게 없었다. 이번엔 대문자 T 남편도 흔쾌히 찬성해 줬다.


난 후보 2를 선택했다. 나 혼자 사용하기에 충분한 스펙이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작업실병을 얻은 지 10년 차, 본격적으로 부동산을 찾아다닌 지 꼬박 6개월.

드디어 ‘나만의 작업실’을 갖게 되었다.


향동을 살피던 그날, 내 머리 위로 떨어지던 막바지 벚꽃잎들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 이토록 멋진 벚꽃 엔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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