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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미련은 마치 기미와 같아서

제거불능 작업실병

by 밀도

2024년 3월 첫 방송을 목표로 여행 예능 프로그램을 준비하게 되어서 사실상 많이 바빴다. 회의가 갑자기 너무 많아지고 심지어 일주일씩 해외촬영도 두 번이나 다녀와야 했기 때문에 작업실을 구했어도 생각만큼 알차게 활용을 할 순 없을지도 몰라...라고 주입식 사고를 하며 셀프 위로를 했다.


2월엔 일주일간 영국 촬영을 다녀왔고, 4월엔 일주일간 인도 촬영을 다녀왔다.


‘양육자적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이것이 내포하는 것은 ‘엄마가 한국에 없는 동안 가족 누군가는 아이의 양육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데 합의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남편과 시어머니가 그 공백을 메워주시기로 했다. 시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를 케어해 주셔서 무사히 출장을 다녀올 수 있었다. 가족의 배려와 헌신 덕분에 나는 이렇게 또 한 번 워킹맘 신분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해외촬영은 잘 다녀왔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한창 젊었을 땐(아차차, 시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도 지금 제 인생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때라 꽤 혼란스럽거든요) 보름씩 촬영을 다녀와도 이렇게 몸뚱이가 힘들지 않았는데 이번 출장 후엔 육체적 피로함이 딱 출장 기간만큼 더 갔다. 오-마이-갓!


원래대로라면 해외출장 다녀오면 시차 적응 완료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후 동네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탕 안에 들어가 몸을 지지며 힐링하는 게 루틴이었는데, 이젠 힐링 따위는 허세란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확실한 대책이 필요했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중년의 워킹맘(=나)은 이른바 ‘New 버전 출장 후 루틴’을 만들었다.


‘스포츠마사지샵 & 피부과 예약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머리뼈의 단단함과 큰 차이가 없을 만큼 딱딱해진 불쌍한 내 등과 어깨, 장시간의 비행으로 인해 더욱 악화된 내 고질병 허리통증을 속히 바로잡기 위해서 가끔 가던 스포츠마사지샵에 전화를 걸어 제일 빨리 가능한 시간으로 예약을 잡는다. 손 압이 일품이신 ‘한 선생님’으로부터 90분짜리 근육통증관리마사지를 받고 나야 비로소 허리를 펴고 운전을 다시 할 수 있게 된다.


또 하나의 예약은 피부과인데, 출장과 피부과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나 의아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얘기해 보겠다. 야외촬영 때 꼬박꼬박 모자를 써도, 꼬박꼬박 선크림을 발라줘도 내 피부는 작렬하는 자외선으로부터 더 이상 보호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크기의 기미들이 탄생해 내 광대 위를 너울거렸다. 출장 3~4일 차가 되면 거울을 볼 때마다 화가 뭉크의 작품 ‘절규’ 속 인물과 같은 포즈와 표정을 짓고 있는 스스로를 목격하게 된다. 그때부터 ‘한국에 돌아가면 피부과부터 가야지!’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예약이 비교적 쉽고 싼 공장형 피부과 앱을 열어 제일 빨리 가능한 시간으로 예약한다. 울세라, 써마지 이런 건 모르겠고 일단 기미 박멸을 하려면 레이저 시술을 받아야 한다. 내가 주로 받는 건 피코토닝이다. 레이저가 쏘고 지나가 화끈해진 얼굴에 쿨링팩까지 받고 거울 속의 나를 확인하는 시간이 제일 긴장된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잡티가 약간 흐릿해지고 피부톤이 조금 맑아진 느낌이 든다. 휴... 그제야 비로소 챙 넓은 모자를 벗고 다시 외출을 할 수 있게 된다.


써놓고 나니까 좀 유난스러워 보이는 것도 같은데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유난 떨지 않으면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고. 망가진 근육과 얼룩덜룩해진 피부는 꾸물댈수록 회복이 더디다는 걸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새 프로그램 준비하랴, 무너졌던 건강과 피부 회복하랴, 떨어져 있었던 아이에게 두 배로 관심 가져주랴...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한창 열 올렸던 작업실에 대한 정보수집은 올스톱 되고 말았다. 시간이 잘도 갔다. 한겨울에 열병처럼 뜨겁게 타올랐던 ‘작업실병’은 따뜻한 봄이 되고 바빠지면서 이렇게 사라지고 마는 걸까...?


말았다,라는 결말이었으면 애초에 이 글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코 사라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작업실에 대한 나의 미련은 마치 중년에 얻은 기미와 같아서 옅어졌다 짙어졌다를 반복할 뿐 여전히 존재했다. ‘바쁨’이라는 레이저에 노출되었을 때 잠시 사라진 기분이 들었을 뿐이었다. 살면서 다양한 욕망과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들이 내 속을 거쳐 갔지만 이번엔 심상치가 않다. 정말 깊게 뿌리내린 게 분명하다.


사십 대 중반쯤 되니 이제 뭐든 한번 내 안에 자리 잡으면 쉽게 제거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미도 그렇고 작업실병도 그렇다. 내가 원하는 작업실을 구해 그 맛을 누려봐야만 비로소 ‘완치’에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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