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가 원하는 건 공간의 자유
내가 앓고 있는 ‘작업실 병’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마음을 가다듬고 이 병에 관해 진지한 얘기를 해 보겠다.
나는 출산과 동시에 이 병에 걸린 케이스다.
어느덧 9년 차 환자다. 가끔은 병이 호전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악화되었다. 아마도 내가 원하는 작업실을 구해 그 맛을 누려봐야만 비로소 ‘완치’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미혼인 내 방송작가 친구는 종종 의문을 가졌다.
“그냥 집에서 작업하면 안 되는 거야? 꼭 어디론가 나가야 하는 거야?”
주부들의 멘토 김미경 강사님도 여러 강의에서 말씀하셨다.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만약 내 방이 따로 없더라도 부엌 식탁이나 거실 귀퉁이 그 어느 곳이든 내가 책을 펼치는 그곳이 바로 내 책상이며 작업실이라고. 그곳에서 공부도 하고 책도 쓰고 다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게 안 되는 인간이었다.
고개만 들면 집 안의 모든 살림살이가 눈앞에 펼쳐지는 곳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루트를 따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일단 집 안 어딘가에 나만의 공간을 마련한다 →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이나 일기장을 펼쳐본다 → (문득 집이 ‘더러움’을 느낀 나) 그동안 못했던 청소와 정리를 후딱 해 본다 → 다시 책이나 일기장을 펼쳐본다 → (문득 집안 곳곳에 ‘사야 할 것들’이 떠오른 나) 쿠팡을 검색해 본다. → 후기를 읽어보고 구매를 누른다. → 다시 책이나 일기장을 펼친다. 이번엔 진짜다! → (문득 오늘 ‘저녁 반찬’이 마뜩잖음을 인지한 나)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후딱 요리를 시작해 본다. → (문득 ‘케첩과 올리브오일’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음을 인지한 나) 다시 쿠팡을 검색해 본다. → 이전의 구매 이력을 찾아 재구매를 누른다. → 다시 책이나 일기장을 펼친다! 는 개뿔. 아이의 하교 시간을 인지한 나는 서둘러 책을 덮는다.
쓰는 나도 이렇게 답답한데 읽으시는 분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싶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닌 거 안다. 그러니 이쯤에서 다 같이 한숨 좀 쉬고 가자.
하.................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을 뿐인데 카드값이 늘어나고 집안일만 잔뜩 하게 되는 놀라운 경험 다들 겪어 보셨으리라 믿는다.
내가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 있을 수 있는 곳이 집 안의 어딘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살림살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바람이 점점 간절해졌다.
그래서 생겼다. ‘작업실 병’이.
10여 년에 걸쳐 수많은 변형과 수정 끝에 다듬어진 ‘작업실 병’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마다 어디 갈지 고민하지 않고 공간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집과는 분리된 나만의 공간을 최소 1년 만이라도 임대해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
사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집 밖의 어딘가’는 찾으면 많다. 하지만 어디 갈지 고민하는 것도 늘 고역이었다. 그 고민의 시간에서 이제 그만 해방되고 싶었다.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업무 특성상 회의와 회의 사이 혹은 모처럼 주어진 회의 없는 날이 생겼을 때 어디든 목적지를 빨리 정해서 가야 낭비되는 시간이 없는데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대충 집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게으른 인간으로 오해받기 싫어서 밝히는데 원래부터 그런 성향은 절대 아니었다. 보고 싶은 영화, 공연 등은 늘 꿰고 있었고, 최신 핫플들도 핸드폰 메모장에 빼곡히 적어 뒀다가 짬 났을 때 가장 적합한 아이템을 빠르게 선택해 속전속결로 움직이고 실행하는 타입이 바로 나였다.
단, 출산 전까지만. (또르르...)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 들었던 의문 중 하나가 ‘도대체 저녁밥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 거지?’였다. 이 전의 내 하루는 밤 12시까지 꽉 채워서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가용할 수 있는 하루의 아웃점은 출산을 계기로 확 당겨졌다. 단순히 결혼만으로는 이렇게 체감하진 못했던 것 같다. 늦게 들어가고 싶은 날엔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면 되었으니까.
아이는 달랐다. 내가 줄 수 있는 안정감은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절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내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 둔 곳들은 이렇게 급작스럽게 갈 성격의 곳들이 아니었다. 리스트 소멸이 더디니 핫플 업데이트도 시들해지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방향을 선회했다. 인기 많은 곳을 찾아가기보단, 차라리 노트북이나 책을 들고나가서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찾아보거나 독서에 잠시 빠져보는 시간이 더욱 알찼는데, 맙소사, 두세 시간 있을 카페를 고르는 게 두 세배는 더 어렵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돌고 돌아 늘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을 보장해 주던 스타벅스 마저도 어느 순간 너무 시끄럽다 느껴져 오래 버티기 힘들어졌다. 카페 너도 안녕.
카페 대신 도서관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더운 날 몇 번 전화받으러 폰부스로 튀어나갔다 오면 역시나 아쉽다. 전혀 급하지 않을 수 있는 전화를 아묻따 급하게 받아야 하는 운명을 가진 게 프리랜서 방송작가다. ‘언제까지 출근해 주세요’ ‘작업 함께 해주세요’ 메일로 주고받는 거 20년 넘게 단 한 번도 없었다. 도서관을 정말 사랑하지만 오래 머물기 힘든 이유다. 편하게 전화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했다.
넓지 않아도 좋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를 들여놓고 내가 자주 사용하는 텀블러, 슬리퍼, 책, 문구류 등의 물건들을 두고 다닐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면 된다. 단 그 정도 세팅하고 사용하려면 최소한 1년이라도 임대를 해야 안정감 있게 루틴도 쌓고 공간을 누릴 수 있겠지 싶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건 공간의 자유!
한때 ‘경제적 자유’란 말이 인기였다. 여전히 지금도 핫 할 수 있는데 나한텐 좀 신기루 같이 느껴진달까. ‘내가 만약 로또에 당첨된다 한들 진정한 파이어족이 될 수 있을까? 음. 아니라고 본다.’로 자체결론을 내린 이후부터 약간 더 멀어진 개념이 되었다. 그것보다 내가 더 강렬히 원하게 된 자유는 바로 ‘공간의 자유’가 됐다.
집과는 철저히 분리된 새로운 공간, 내가 어디 갈지 망설일 필요 없이 지속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
작업실병 9년 차 환자인 나에게 과연 그런 자유가 허락될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