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계약의 후유증을 달래다
2024년 새해가 되었다.
새해가 밝았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당시 내 마음이 그리 밝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이는 한 살 더 먹어 사십 대의 정 중앙을 지나고 있었고 여전히 나의 작업실 프로젝트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마지막 보았던 상가매물에 약간의 미련이 남아있었던 나는 이삼일에 한 번씩 홀로 상가를 방문하여 아직도 공실인지를 체크했다. 남편의 예상대로 꽤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문 앞에 ‘임대문의’ 글씨와 함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는 걸 볼 때마다 아직 나에게도 기회가 열려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했다. 이러다가 운명이 돌고 돌아 결국 내가 계약하게 되는 거 아니야?
그러던 어느 날. 보고야 말았다. 계약성사의 실체를.
오랜만에 상가에 다시 가 봤는데 처음 보는 네일아트샵 간판이 달려 있는 게 아닌가. 가만 생각해 보니 그 공간과 충분히 어울리는 업종이었다. 한쪽에서는 네일아트를 받고 다른 한쪽에서는 속눈썹연장&펌을 같이 시술받기에 딱 적당한 공간이긴 했다.
어떤 사장님이신지 모르지만 계약 잘하셨네요! 비록 나는 선택하지 못했지만 누군가는 꿈과 비전을 갖고 선택한 그곳. 월세 45만 원 내시고도 충분히 많이 남게 매출 팍팍 올리시길 잠시 기도했다.
시원섭섭했지만 내 인연은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아직도 영업을 잘하고 계신 걸 보면. 마음속으로 행운을 빌어드리긴 했지만 차마 손님으로 찾아가는 것까진 하지 않았다. 혹시나 네일쌤과 친해져서 근질근질한 입을 못 참고 어쩌고저쩌고~~ 다 얘기하게 될까 봐.
암튼, 나 혼자 막연히 긍정회로 돌리며 상상계약까지 갔다가 뒤늦게 정 떼느라 고생 좀 했다. 가진 적도 없는데 이 상실감은 무엇이지? 20대 땐 상상연애, 30대 땐 상상임신 하더니, 40대 되니 이제 상상계약까지 해 보는군. 허허.
자기 계발서 책에 보면 이미 다 가진 것처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보라고 하던데, 그 방법은 나랑 좀 안 맞는 것 같다. 별 걸 다 상상하니 매우 피곤하고 웃펐다.
그 이후.... 매일 아침 아이 등교를 시키고 나면 ‘오늘은 어디에 나의 일일 작업실을 잡아볼까’가 나의 머릿속 최대 이슈가 되었다.
공간에 대한 관심사가 증폭하니 SNS 알고리즘이 내가 선호하는 공간에 대한 정보들을 무한 노출시켜 줘서 잠시나마 도움을 받았다. 요즘은 지자체에서 멋진 도서관도 많이 개관한다. 작업하기 좋아 보이는 곳을 발견하면 시간 내서 한 번씩 가보곤 했다. 대부분 마포구 주민인 내가 이용하기에 너무 멀거나 시간제한이 있어 아쉬울 때가 많았지만 가끔은 나 혼자만 알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곳들도 발견하곤 했다.
뒤늦게 알게 돼서 ‘유레카’를 외치며 잠시나마 나의 상상계약 후유증을 달래주러 갔었던 곳 중 한 군데를 소개해 볼까 한다.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쪽 ABC-MART와 KFC 사잇길에서 서교초등학교 쪽으로 10분 정도 걷다 보면 서울특별시 교육청 산하도서관인 ‘마포 평생학습관’이란 곳이 나온다. 이곳 5층에는 ‘마포리움’이라는 정말 근사한 공간이 있는데 서울 시민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서 책을 볼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여기에 있는 도서들은 정말 다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소장욕구 뿜뿜 하는 책들이고, 무엇보다 좋은 건 만화책이 만화방 수준으로 많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 테이블, 다인 테이블, 심지어 빈백까지 여러 개 갖추어져 있어서 원하는 곳에 취향껏 앉아 그 어떤 책을 꺼내 읽어도 무방하다. 책을 대여할 수는 없지만 정말 많은 책이 있어서 빈 몸으로 와도 너무 좋은 장소였다. 음료 가능, 대화 가능, 노트북 가능, 어린이까지 가능. 하지만 책이 많아서 다들 알아서 조용한 곳! 합의된 절제 속 자유로움이 너무너무 좋았다.
처음에 이곳에 와보고, 이곳을 모르고 살았던 시간이 너무 아까웠을 정도였다. 홍대에서 약속 있을 때 일부러 두세 시간 여유 있게 나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약속장소에 가기도 했다. 단점은 평일 9시부터 6시까지만 운영되고 점심시간 11:30분-12:30분 휴점이라 잠시 밖에 나가야 한다는 것. 온종일 작업실 삼기엔 치명적 단점 이긴 하지만, 개인 작업도 하면서 유명한 만화책과 소설책으로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나에게 좋은 선택지가 되어주었다.
가끔 이런 반짝이는 곳들을 발견한 덕에 상상계약의 후유증이 조금씩 아물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