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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드리 Mar 09. 2024

말랐단 말 좀 못하게 해 주세요

마른 이들을 위한 항변(2)

“야 너 왜 이렇게 말랐어. 너무 말랐다. 먹는 건 다 어디로 간 거야. 살 좀 쪄야지 이래 가지고 공부는 어떻게 해. 살 좀 찌자.”

 

D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1학년 때 내가 담임을 했는데 젠틀맨이 있다면 이 아이일 거라 생각했다. 키도 크고 인물도 좋은데 성품이 온화하고 목소리도 부드럽고 자기 관리도 잘하는 학생이다. 그가 복도에서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앞에는 작년에 발령받은 얼굴이 보름달같이 환한 선생님이 하얗고 토실한 손으로 출석부를 감싸 안고 마주 서 있다. 상기된 얼굴에 젊은 웃음꽃을 가득 피운 채. 지나가다가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나는 ‘풋’하고 웃어 버렸다.

 

며칠 전 나도 복도에서 D를 만났다. 나를 보고 일부러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얼굴 윤곽이 묻히게 살이 올라 첫눈엔 긴가민가 했다. “오, D구나. 얼굴에 살이 좀 쪘나, 마스크를 벗어서 그런가,  못 알아볼 뻔했네. 방학 때 운동 좀 했나 봐. 잘했다. 체력이 있어야 공부도 잘할 수 있지. 요즘도 잘하고 있지?” “네, 잘하고 있어요.” 언제나처럼 수용적이고 긍정적이다.

 

나와의 그 대화가 생각나 순간 웃음이 터졌던 것이다. 참을 수 없게 웃기는 상황에 튀어나올법한 웃음이었고 맥락 없이 들으면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겠다 싶어 마음이 쓰였는데 마침 그 선생님이 웃으며 내 뒤를 따라 교무실로 향했다. “D가 너무 말라서 걱정이에요. 살이 좀 쪄야 하는데.” “나는 며칠 전에 보고 살이 좀 쪘다고 했는데. 흐흐 D가 헷갈렸겠어요. 흐흐” “그러셨어요. 아니에요. 훨씬 더 쪄야 해요.” 다행히 나의 웃음소리는 듣지 못한 것 같다.

 

내 기준과 수준에서는 D는 적당하고 건강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같은 사람을 보고 있어도 자기 관념과 관습으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다. 판단하는 것까지는 아무 문제없다. 말로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문제다.

 

왜 남의 살찌고 빼는 것을 자기가 왈가왈부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살 빼는 것이 힘든 만큼 살찌는 것도 무지 힘든 일이다. 왜 사람들은 살찐 사람한테 살쪘다고 말하는 것은 금기시하고 예의 없다 하면서 마른 사람한테 말랐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물어보고 싶다. 진짜. 마른 사람들도 자꾸 들으면 기분 나빠요.

 

어떤 사람은 자기 살을 좀 떼가라고까지 한다. 떼주지도 않으면서 그런다. 겨울에는 옷을 많이 입고 다니니 잘 모르다가 여름이 되어 맨몸이 노출되면 노골적으로 공격을 한다. 나는 공격이라고 느낀 적도 있다. 한 번은, 나도 기분 나쁘니 그러지 말라고 엄청 용기를 모아 볼멘소리를 해본 적이 있다. “아이, 날씬하다고 하는데 뭐가 기분 나빠요. 나도 날씬해 봤으면 좋겠다.” 날씬하다고 안 했거던요. 말랐다와 날씬하다는 개미와 코끼리만큼이나 차이 나는 말이 거던요.

 

어떤 이는 부러워서 그런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비도덕적이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야 하는데, 자기는 살을 아무리 빼도 안되는데 마른 것들은 아무리 먹어도 말라 있어서 그게 부러운데, 부럽다는 말을 하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못 먹는 호박 찔러나 보자는 심정이었다면 그건 인격의 문제라고 본다.


어떤 이는 자신도 말랐으면서 그러기도 한다. '남 말하네.'라고 던지면 자신은 속살이 장난 아니라고 한다. 속살까지 스캔당하고 비교당하고 있었던 거다. 넌 속살마저 없이 아주 비쩍 발라 비틀어졌다는 것인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지. 자신은 안 말라서 속살 있어서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아! 난 마른 거고 자기가 날씬하다는 건가. 헐.


너무 말라 걱정이 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걱정이 되면 혼자 걱정하면 된다. 자기 걱정을 왜 남이 해소해줘야 하는가. 그저 말없이 고기를 사주던가 빵을 사주던가 하면 아름답지 않겠는가. 한 번도 사준적도 없으면서 말로만 그런다. 좀 사주고 그러던가. 차라리 공식적으로 뚱뚱한 사람들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양극에서 살고 있는 동병상련이랄까. 도대체 누가 만든 스펙트럼인지.

 

난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모 품평에 있어서는 깡패를 방불케 한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사람을 이모, 언니, 오빠라고 부르는 민족이니 사생활을 훅훅 넘어 들어오는 문화가 익숙해서 그런가 싶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는,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 옷 참 잘 어울린다, 머리 스타일을 바꾸니 젊어 보인다', 뭐 이 정도에서 선을 지키는 것 같은데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은-다는 아니고 주변에 몇몇 사람들이- 남의 사생활에 너무 간섭을 많이 한다. 마치 자기 소유물인 것처럼. 사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 나라, 이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린 모두 희생자라 할 수도 있겠다.

 

교사들은- 아마 다른 공무원들도- 매년 양성평등교육을 의무적으로 2시간을 수료해야 한다. 강사가 직접 와서 출석을 확인하고 시간을 꽉 채워서 교육을 한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가르쳐준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고 어떤 표현은 절대 쓰면 안 된다고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직장문화에서 남녀사이, 상하관계에서 일어날법한 사례들이다. 덕분에 예전보다 사생활을 지켜주는 문화가 당연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교육에 친한 사이와 학생들에게 가하는 외모에 대한 품평과 오지랖과 지적질 금지도 넣기를 제안한다. 특히 마른 사람의 마름도 존중해 달라고. 결국 외모에 대한 평가 자체를 자제해야 하겠지만(이건 다음 편에 한번 써봐야겠어요.)

 

‘외모 평가는 걱정도 덕담도 아니다. 무비판적 습관이다.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어내고 표현하는 능력이 인간종 전체적으로 감퇴하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다가오는 말들, 은유, p.241) 나도 딱 이 마음이다.

 

사람들이 몰라서 습관적으로 계속하는 일들이 많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 선생님(정말 토실토실하고 예쁘다. 내 로망인데...)을 찾아가 말하지 못한다. 피해 당사자가 되어도 말 못 하는 주제에 어떻게 하겠는가. 그럼, 청와대 청원이라도 한번 해봐야 하나. 국민 모두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휩쓸려 바뀌도록. 제목은 ‘말랐단 말 좀 못하게 해 주세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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