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사람 속에 살고 있는 네 가지 감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쁨, 슬픔, 분노, 까칠이란 이름으로 캐릭터 하여 한 아이의 성장 스토리를 따라간다. 그 애니메이션을 보고 슬픔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를 키우면서 ‘기쁨’이라는 감정에 얼마나 매달렸었나 깨닫게 되었다.
다른 감정들은 부정적이고 그저 기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줄 알았다. 기쁘지 않은 것은 해롭다 생각했고 어떻게 하면 그런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안달을 했었다. 기쁘지 않으면 그 반대 개념인 슬픔으로 치부했고 슬픈 감정은 마치 몸에 붙은 도꼬마리를 떼내듯이 화들짝 떼내고 싶었다. 행여 가시 하나라도 남아서 불편하게 할까 노심초사했다.
그때는 참 어렸고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나중에야 하게 되었다. 부모가 자기 속의 슬픈 감정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이를 키우면서 그런 일이 생길 수 있겠다는 반성을 했다. 의기소침하거나, 기가 죽거나, 속상해할 때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대신 벗어나서 빨리 기쁘게 해주고자 했다. 참, 왜 그랬을까.
애니메이션에서도 아이가 사춘기를 통과하면서 감정의 주도권을 슬픔이가 잡게 된다. 슬픔은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공감력이 있는 성숙한 감정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주야장천 아이처럼 기쁨으로 날뛸 수는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고. 내가 키운 아이도 결국은 그 모든 것을 통과하며 자라고 있다. 둘 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지만 나도 아이도 같이 대가를 치르며 성장을 했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친근하게 다가온다. 왜 그렇게 피하고만 싶었을까. 인정하고 마주 보게 되었을 때 슬픔도 나인 것을. 그리고 결국은 다 없는 것들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