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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드리 Nov 01. 2024

은목서/ 진정한 사랑

10월에 향긋한 꽃을 피우는 나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입주하여 처음 맞은 작년 가을 어느 저녁, 공기 중에 복숭아 향기가 가득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외투를 걸치고 웅크린 채, 종종걸음으로 필라테스를 하러 뛰어가고 있었다. 이 날씨에 웬 복숭아지. 속도를 줄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달라진 풍경은 없었다. 현관에서 나오면 앞 동으로 연결된 통로가 있고 주변으로 잘 다듬어진 화단이 있다. 특별히 향기가 날 만한 것은 없었다.  향수를 뿌린 누군가가 금방 지나갔거니 생각했다.


다음 날 그 자리를 지나가는데 또 복숭아 향이 났다. 여름에 한 입 베어 물면 끈끈한 단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던 그 물렁하고 노란 복숭아 말이다. 입과 코에도 끈적한 흔적을 남기던 그 달디 단 천상의 과일. 아 먹고 싶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탐색했다. 여전히 못 찾았다. 그런데 거대한 사철나무같이 생긴, 아파트 2층 높이까지 자란 나무에 하얀 전구가 달린 듯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꽃이 피었나. 10월인데. 다가가니 바로 그 향을 풍기고 있었다.


생전 첨 들은 '은목서'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고, 꽃말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날 이후로 은목서 향에 푹 빠졌다. 곁에 두고 싶은 마음에 바로 작은 묘목을 하나 주문했다. 배달된 나의 은목서는 키가 5센티미터에 달랑 하나의 줄기가 애처롭게 돋아나 있었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나에게  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기가 손녀를 볼 때쯤이나 볼 수 있을 거라고.  


올해는 10월이 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은목서 앞을 지나갈 때마다 쳐다보며 기다렸다. 언제 꽃이 피려나. 초순에 은목서 꼭대기에 연둣빛 새순들이 돋았다. 곧 꽃을 피우겠다는 신호처럼. 길거리 화원에는 잘 키운 형형색색의 국화들이 줄을 지어 서 있고, 나무들도 하나둘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상록수인 '은목서'는 시베리아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을 기다렸다가 새순을 돋고 꽃을 피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날, 그날도 한껏 웅크린 채 필라테스 교실로 뛰어나고 있었다. 새큼 달큼한 향이 공기 중에 휙 지나갔다. 아! 왔구나. 걸음을 멈추고 다가갔다. 작은 전구가 하얀 빛을 내며 잎 사이사이에 빼곡히 매달려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이렇게 크자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은목서는 스산해지는 공기에 달콤한 향을 섞어 사람들의 마음이 천천히 떨어지도록 응원한다. 웅크리지 말고 올려다보라고. 늘 푸른 모습으로 있다가 하필이면 이 시점에 꽃을 피우는 마음이 '진정한 사랑'과 썩 어울린다. 춥다 춥다 하는 마음에 달콤한 한마디를 날린다. 이리 와. 세상은 달콤해. 이 향기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추운 겨울 잘 헤쳐나가. 안녕. 내년에 또 보자!


나의 은목서도 이제 10센티미터는 되었고 밑동에 새로운 가지가 연둣빛으로 자라 나왔다. 잎도 작지만 녀석 속에는 큰 나무가 자라고 있고 향긋한 꽃들도 자라고 있다. 곁에 두는 것만으로 거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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