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입주하여 처음 맞은 작년 가을 어느 저녁, 공기 중에 복숭아 향기가 가득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외투를 걸치고 웅크린 채, 종종걸음으로 필라테스를 하러 뛰어가고 있었다. 이 날씨에 웬 복숭아지. 속도를 줄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달라진 풍경은 없었다. 현관에서 나오면 앞 동으로 연결된 통로가 있고 주변으로 잘 다듬어진 화단이 있다. 특별히 향기가 날 만한 것은 없었다. 향수를 뿌린 누군가가 금방 지나갔거니 생각했다.
다음 날 그 자리를 지나가는데 또 복숭아 향이 났다. 여름에 한 입 베어 물면 끈끈한 단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던 그 물렁하고 노란 복숭아 말이다. 입과 코에도 끈적한 흔적을 남기던 그 달디 단 천상의 과일. 아 먹고 싶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탐색했다. 여전히 못 찾았다. 그런데 거대한 사철나무같이 생긴, 아파트 2층 높이까지 자란 나무에 하얀 전구가 달린 듯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꽃이 피었나. 10월인데. 다가가니 바로 그 향을 풍기고 있었다.
생전 첨 들은 '은목서'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고, 꽃말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날 이후로 은목서 향에 푹 빠졌다. 곁에 두고 싶은 마음에 바로 작은 묘목을 하나 주문했다. 배달된 나의 은목서는 키가 5센티미터에 달랑 하나의 줄기가 애처롭게 돋아나 있었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나에게 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기가 손녀를 볼 때쯤이나 볼 수 있을 거라고.
올해는 10월이 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은목서 앞을 지나갈 때마다 쳐다보며 기다렸다. 언제 꽃이 피려나. 초순에 은목서 꼭대기에 연둣빛 새순들이 돋았다. 곧 꽃을 피우겠다는 신호처럼. 길거리 화원에는 잘 키운 형형색색의 국화들이 줄을 지어 서 있고, 나무들도 하나둘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상록수인 '은목서'는 시베리아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을 기다렸다가 새순을 돋고 꽃을 피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날, 그날도 한껏 웅크린 채 필라테스 교실로 뛰어나고 있었다. 새큼 달큼한 향이 공기 중에 휙 지나갔다. 아! 왔구나. 걸음을 멈추고 다가갔다. 작은 전구가 하얀 빛을 내며 잎 사이사이에 빼곡히 매달려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이렇게 크자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은목서는 스산해지는 공기에 달콤한 향을 섞어 사람들의 마음이 천천히 떨어지도록 응원한다. 웅크리지 말고 올려다보라고. 늘 푸른 모습으로 있다가 하필이면 이 시점에 꽃을 피우는 마음이 '진정한 사랑'과 썩 어울린다. 춥다 춥다 하는 마음에 달콤한 한마디를 날린다. 이리 와. 세상은 달콤해. 이 향기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추운 겨울 잘 헤쳐나가. 안녕. 내년에 또 보자!
나의 은목서도 이제 10센티미터는 되었고 밑동에 새로운 가지가 연둣빛으로 자라 나왔다. 잎도 작지만 녀석 속에는 큰 나무가 자라고 있고 향긋한 꽃들도 자라고 있다. 곁에 두는 것만으로 거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부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