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을 탔는데, 어떤 사람들은 나라 망신이라고 한다. 왜 부끄러운 역사를 세계만방에 드러내고 그러느냐는 것이다. 역사가 저지른 일이 부끄러운 줄은 알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왜 부끄러운가? 당당하다면 부끄러울 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어처구니 없는 폭력으로 무고하게 죽은 억울한 영혼을 남겨서 그렇다. 억울한 마음은 참 질기다.
부끄러운 역사를 직면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까놓고 드러내고 똑바로 직시해서 다 함께 고통을 뚫고 나가기도 하지만 부인하고 숨기고 외면해서 속으로 곪아 썩어 문드러져 주변에 악취를 풍기기도 한다
독일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짓을 했다. 그들은 첫 번째 방법으로 해결했다. 지금도 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들은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하고 단죄하고 보상하고 당당하게 벗어 나왔다.
일본은 반대다. 비슷한 강도의 부끄러운 짓을 주변국에 가했지만 두 번째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진심 어린 사과만 해도 주변국에서 지금까지 억울하다고, 너네 잘못했다고, 사과하라고 원한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역사를 반복할지 모른다는 믿음의 부재 때문이다.
4.3이나 5.18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그래서 '소년이 온다'도 읽기를 외면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독서토론 용이 아니었다면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 지쳐있었다. 국가가 자기 국민에게, 이웃이 자기 이웃에게 저지른 잔인함이라 더욱 그랬다.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는 더 이상 듣기도 싫었다. 고통 때문이었다. 들여다보면 아파서 그랬다. 그래서 가볍고 유쾌하고 쉬운 것들만 찾았다. 오래 외면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작가는 이야기의 중심으로 데려가는데 책의 절반을 할애했다. 제주도 중산간, 외딴집, 반짇고리 커버를 덮은 알록달록한 천 속에 숨겨져 있던 오래된 사연에 다다르도록 어둠을 뚫고 눈보라를 헤치며 한발 한발 끌고 갔다. 작가의 필력에 끌려 한 편의 영화 속으로 들어갔다.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몽환적 분위기에서 죽은 새가 살아나고 친구 인선의 환영이 다가와 이야기한다. 작가는 소설이라서 할 수 있는 수법을 동원하여 시적인 아름다운 표현을 무기로 사력을 다해 그 이야기를 꺼낸다. 이유도 모른 채 가족을 잃고 하나뿐인 '오빠' 흔적을 찾아 결국 경북 경산 코발트 광산 갱도까지 데려가 기어이 그 안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 부분에서 다시 읽기 싫었다.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읽어야만 길을 찾을 수 있고 따라갈 수 있었다. 더 이상 멈출 수 없게 끌고 가는 힘이 소설 속에 있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인선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다. (사실이다.)
다시 너무 아프지만 이번에 통증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지금껏 동떨어져 혼자 감당하고 가슴을 움켜쥐고 어찌할 줄 몰라했었다. 그걸 작가는 알았던 걸까. 자신이 앞서서 나아가며 온몸으로 아파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같이 그 아픔을 나누자고, 그러니 '작별하지 말자'라고 한다. 앞서서 직면하고 나갈 테니 같이 뚫고 나가자고 한다.
덮어두고 모른 척하면 계속 아프니 똑바로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아파하지 말고, 빠져나가자고 한다. 외면하고만 싶었던 그 이야기를 똑바로 바라보고 읽으면서 나도 그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아플 것은 아파야 한다. 아픈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같은 역사의 되풀이를 막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아직도 빨갱이 운운하는 작태가 한심스러워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눈을 뜨라고 한다. 귀를 열라고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조용히, 당당하게 마주 보자 한다.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311)
사랑이 '무서운 고통'인 줄 알면서 작가는 이 책이 '지극한 사랑'이기를 기원했다. 작가의 사랑은 자신을 온전히 먼저 내어주는 것이었을까. 글을 통해서.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폭력적인 장면에 민감한 편이에요. 아우슈비츠를 다룬 영화를 보면 토하고 며칠 아프고 그래요. 제가 가장 두려워하고 힘들어하는 게 폭력의 장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너무 힘드니까 그걸 돌파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의 이야기(채식주의자)를 쓰고 싶었던 것이고, 이 사람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왜 폭력이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를 결국은 폭력적인 장면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저도 힘들게 통과를 했던 거죠."
책을 덮으면서 이 책은 한 편의 진혼곡이라고 생각했다. 진혼은 죽은 혼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남은 자들이 두려움과 고통과 불편함을 덮어두지 말고 '돌파'해서 뚫고 '통과'해 나가도록 응원하고 있다. 진정한 작별을 위해 역설적이게도 작별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외면하고 싶었던 한강의 책을 손에 들 수 있었던 것은 노벨 문학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상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지만) 나도 함께 뚫고 나가고 싶어서고,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아주고 싶어서였다. 이제 그녀의 다른 책들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한강 작가가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악동뮤지션의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입니다. 책을 읽고 들으니 달리 들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