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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n 23. 2021

세상이 엄마들에게 좀 더 친절해지면 좋겠다

적어도 엄마가 베푸는 만큼의 친절과 배려를 되돌려 받는 세상에살고 싶다

몇 달 전 사람들 사이에 크게 회자되었던 트윗이 하나 있었다. 본인 어머니가 패스트푸드점에 가셨다가 터치 스크린 방식의 무인 주문 기계 (키오스크) 사용법이 어려워 그냥 돌아오셨다는 사연이었다. 기계 앞에서 이십여분을 헤맸지만 주문에 실패한 엄마는 말로는 화가 나서 전화했다고 했지만 결국 ‘엄마는 끝났다’라며 눈물을 보이셨다고 한다. 엄마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낯선 무인 주문 기계 앞에서 한 번쯤 버벅거려 본 적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관점으로 이 이슈에 대해 논하고, 안타까워하고, 화를 냈다. 


많은 서비스가 빠르게 비대면, 자동화 전환되고 있는 이 시대를 엄마가 지금 살고 있다면 어땠을까. '경제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미디어의 주 소비층인 젊은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변화 속에서 편의란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이 빠르고 쉬워진다고 해서 엄마의 삶도 갑자기 빠르고 쉬워지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엄마가 있었다면 나 역시 저 딸처럼 속상한 일을 겪고 분노의 일성을 던지거나 어딘가에 청원을 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거리에서 역 방향으로 우회전이요’ ‘첫 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주세요’ 너무나도 익숙한 이 말을 하다가, 이 말 할 타이밍을 못 잡아서 늘 택시기사한테 혼나던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갑자기 그게 왜 생각났는지 몰라.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운전을 해본 적 없으니까 그 타이밍을 못 잡는 거 참 당연한데, 택시기사들은 꼭 세상 큰일 난 것처럼 짜증을 내고 그러더라. 그러면 우리 엄마는 정말 입을 꾹 다물고, 쌤한테 혼난 학생처럼, 그러나 태연한 표정으로 잠자코 가곤 했다. 착한 엄마. 언제나 분쟁을 일으키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따지기 좋아하는 강씨들 땜에 스트레스 좀 받았었지.

2019년 2월 22일


배우면 뭐든 곧잘 했지만 슬로 러너 slow learner였던 엄마에게 새로운 걸 가르쳐주는 건 거의 내 몫이었다. 삼성 애니콜의 천지인 자판에서 스마트폰의 쿼티 자판으로 넘어가기까지, 카카오톡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엄마와 나 상호 간의 인내가 참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곱게 말하지 못하고 한 번씩 터지는 내 짜증 앞에서 엄마는 항상 '그럴 거면 차라리 내가 안 배우고 말겠다'라는 의미의 경상도 방언 '고마 치아'를 외쳤고 그 말과 함께 상황 종료였다. 장성한 딸이 엄마한테 잔소리를 하는 건 우리 집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광경은 아닌 것도 같지만 엄마와 나 사이에는 보통의 모녀가 티격태격한 뒤에 갖는 살가운 화해의 시간이 없었다. 고마하라면 고마하는거고, 때려치우라면 때려치우는 거였다. 그래서 보통은 그 정도 파국까지 가지 않기 위해 엄마가 내 비위를 맞춰주는 일이 흔했다. 


홀로 떠난 대만 여행에서 계속 우연히 마주쳤던 한국인 모녀가 있었는데, 카메라 작동이 능숙하지 않은 엄마를 닦달해서 자기 사진을 계속 시도하는 걸 보며 엄마와 같이 갔던 홋카이도 여행을 떠올렸었다. DSLR로 종일 찍은 것 중에 제대로 된 사진이 없어서 '엄마는 사진 못 찍어서 같이 여행 못 다니겠다'라고 했더니 침대 위에 누워서 카메라를 만지작하며 '내가 연습할 테니까 여행 또 데리고 가'라고 하던 엄마. '너랑 간 여행은 다 재밌었어'라고 항상 말하던 우리 엄마. 그 생각이 나서 그들 모녀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친절을 보이며 '저도 엄마랑 여행 가면 제 사진만 많고 같이 찍은 사진은 거의 없더라고요'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고 나서 13개월 만에 가게 된 엄마와의 괌 여행에서는 셀카봉을 준비해서 이례적으로 둘이 찍은 사진을 많이 남겼다.

2016년 5월 22일  


오래전 엄마랑 단 둘이 갔던 여행지에서 내가 찍힌 사진이 다 별로라며 까탈을 부리는 나에게, 엄마는 "됐어 고마, 다 잘 나왔어"라고 하면서도 내일은 잘 찍어보겠다며 호텔방 안에서 사진 찍는 연습을 몇십 분이나 했었다. 사진 찍혀본 적도 별로 없고 찍을 일은 더 없었던 엄마는 DSLR을 양 손에 쥐어본 것도 처음이었을 텐데 애초에 불가능한 일을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내 마음속 한편에는 혼자 여행 가면 편하고 친구들이랑 가면 이보다 훨씬 예쁜 사진을 많이 남겼을 텐데 엄마랑 같이 와서 감수해야 하는 게 많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와 둘이서 여행 다닌 적은 여러 번 있지만 그 소중함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엄마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몰랐다. 엄마는 내가 '데리고' 여행하는 거라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였나 더 어릴 때였나 은천탕이라는 목욕탕이 있었는데 엄마랑 같이 갔다가 내가 겁 없이 엄청 뜨거운 물을 몸에 홱 부어버리는 바람에 온몸에 1도 화상을 입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울었는지 소리를 질렀는지 암튼 어디론가 옮겨져서, 차게 젖은 수건 위에 잠시 누워있었고, 집에 와서는 홀딱 벗겨놓고 전신에 화상 연고를 발랐던 것 같다. 근데 그 와중에 아빠가 알면 노발대발할 테니 엄마가 노심초사하는 게 느껴졌는데, 굉장히 부적절한 타이밍에 아빠가 들어와서 예상대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엄마한테 엄청 퍼부어대는 바람에 나는 그게 싫고 무서워서 엉엉 울고 엄마도 울고 온 집안이 난리법석 눈물바다가 된 기억이 난다. 연고 바르고 나서 다른 일 없이 싹 다 괜찮아졌었는데, 그 이후로 한동안 조금이라도 뜨거운 물에는 질겁을 하는 부작용이 생겼었던 거 같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 엄마도 기억할까.

2016년 3월 17일


생각해 보면 엄마는 분쟁을 극히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아빠, 언니, 나 전부다 집 안팎 가리지 않고 자기 목소리 크게 내고 있는 대로 성질부리는 성격이지만 우리 중 누군가가 언성을 높이거나 감정이 격해지지 않도록 진정시키는 역할은 엄마 몫이었다. 언니와 나의 행동을 제지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너거 아빠 가만있겠어?"였고, 그다지 비밀도 아닌 일에 "언니 알면 난리 나"라는 말을 붙이곤 했으니까. 하지만 엄마가 어떨 때 불같이 화를 내는지, 어떤 상황을 질색하는지에 큰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고, 누가 지금 묻는다 해도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가족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엄마는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기에 충분한 나이였지만 노약자석에 가면 어르신들 눈치 보이고, 일반석에 서면 젊은 사람들이 부담될까 봐 통로에 기대서는 사람이었다. 밀친다고 욕먹고 시끄럽다고 욕먹는 아줌마 집단의 오명을 지우는 것이 사명인 듯 행동했다. 한 번은 지하철에 가끔 있는 소위 '이상한 아저씨'가 엄마 맞은편에 앉아서 다짜고짜 껌 씹지 말라며 소리를 친 적이 있었는데, 주변에 다른 사람이 다 미친 사람이라며 피하거나 무시할 때 우리 엄마는 '하라는 대로 해 주면 조용히 할 것'이라며 갑자기 씹던 껌을 혀 밑에 붙이고 안 씹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하나하나 얘기하자면 끝도 없다. 그때는 엄마의 성격이 원래 그렇다고 생각했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고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배려가 지나쳐서 가끔 굴욕적일 때까지 있다고. 왜 그렇게 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 누가 갈등을 멈출 수 있었을까. 오직 엄마의 친절과 배려, 그리고 희생이 우리 가족을 평화롭게 했고 엄마가 가는 곳곳마다 그랬다. 아무도 엄마에게 같은 걸 되돌려 주진 않았지만 내가 아는 엄마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이들 사이에서나 그 역할에 충실했다. 


"이 영화 재밌을 것 같으니깐 보러 가자" 도 아니고 내 눈치 봐가면서 "그 영화 재밌겠더라"라고 말하는 엄마.

일 년 반 만에 딸이 보여주는 영화 한 편 보겠다고 아침부터 준비해서 기껏 버스 타고 영화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아빠가 찾는다'며 왔던 길 다시 되돌아간다는 우리 엄마.

"그럼 그러던가"라고 팩 신경질을 부리고 돌아서서 핸드폰 전원을 끈 채로 혼자 영화 보러 들어간 나.

불편한 마음으로 혼자 영화를 보고 나서 꺼두었던 핸드폰 전원을 다시 켜자마자 반짝반짝 불빛과 함께 문자 하나가 수신된다. "혜빈아 너무너무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엄마는 왜 일 년이 가도 보고 싶은 영화 한 편 제대로 볼 수 없는지, 영화관 앞에까지 와서도 전화 한 통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지, 왜 서운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나 간다"라고만 하고 돌아서는지, 그것도 모자라 오히려 딸이 부리는 괜한 신경질까지 받고야 마는지, 왜 마음 상한 딸까지 걱정하며 전화하고 사과 문자까지 보내는지, 정말 엄마가 바보 같고 답답해서 막 너무너무 속상했다.

나랑 같이 아니면 영화 한 편 보러 갈 여유도 없는 엄마란 사실을 일 년 반동안이나 잊고 지내면서 엄마가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뭔 지조차 기억 못 하는 나. 내 스케줄 비는 시간을 고르고 골라서 고작 조조를 보러 온 주제에 약속 취소하면서까지 영화 보여준다고 생색냈던 나. 그런 영화를 못 보게 돼서 더없이 속상했을 맘도 이해 못하고 엄마한테 가는 길도 안 가르쳐주고 이유 없는 성질부린 내가 참 나쁘고 너무너무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이 채 빠져나가지 못한 상영관에서 마치 삼류 신파에 감정 이입한 사람처럼 엉엉 울어댔다. 미안하다는 말을 좀처럼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우리 엄마이기에 엄마가 보낸 그 미안하다는 문자가 너무 속상했다.

"됐어. 보고 싶던 영화 못 본 엄마가 더 속상하지 7월에 보면 돼."라고 뒤늦게 답문을 보냈지만 끝까지 "엄마 미안해"라고는 말 못 한 바보 같은 나. 역시 나도 엄마 딸이라서 이렇게 바보 같은가. 7월엔 엄마랑 꼭 영화 보러 가야지. 널널한 오후로 시간 잡아서 같이 밥도 먹고. 집에 올 때는 산책도 하고 하루 종일 데이트해야지.

2005년 6월 24일


살면서 몇 번 밖에 들어본 적 없지만 엄마의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때 언제나 마음이 일렁였다. 십오 년도 더 된 내 일기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하고 싶은걸 포기하고, 또 사과하는 엄마의 문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다시 한번 출렁거렸다. 모두에게 조금은 더 배려받아도 됐을 것 같은데, 기억과 기록을 암만 뒤져봐도 그랬던 것 같지가 않다. 나를 비롯한 가족이 엄마를 우선으로 해서 움직였던 적이 없는데 사회가 우리 엄마를 배려해줄 거라는 생각은 얼마나 뻔뻔한가. 


많은 사람들이 키오스크 사연에 속상했던 것은 그 기계가 엄마가 가진 욕구를 지워버리고 엄마를 무력하고 작은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우리 엄마가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때문에. 우리 가족 때문에. 엄마에게 친절하지 못한 세상 때문에. 뭔가 스스로 해보려고 섰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서면서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척하는 엄마를 그려보니 엄마를 울린 기계만큼이나 내가 미웠다. 


만일 지금 엄마에게 무인 주문기 사용법을 알려줘야 한다면 이전보다는 더 많은 인내심을 가지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이 기계를 60세 이상 고령자 친화적으로 개발하라고 어딘가에 요구할 것 같다. 엄마의 욕구와 필요를 당연하게 지우는 세상에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엄마가 베푸는 만큼의 친절과 배려를 되돌려 받는 세상에 살고 싶다. 이제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우리 엄마에게는 이제 갚을 수 없게 된 이 친절을 엄마 또래의 아줌마(또는 할... 줌마)분들에게 대신 돌려보낸다. 구석구석 사랑을 베풀지만 충분히 되돌려 받지 못하는 모든 엄마들을 위해 오늘도 지하철 앉은자리에서 슬쩍 내리는 척하며 일어선다. 양보는 피차 쑥스러우니까. 물론 나중에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을 친절을 쌓는 의미도 조금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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